우리는 일상 속에서 ‘가치’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지만, 그 의미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가치’는 너무나도 손쉽게 ‘가격’으로 환산된다. 예술 역시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작품의 진정한 의미나 창작의 내적 필연성은 점차 뒷전으로 밀리고, 시장에서의 거래 가능성과 투자 수익률이 예술의 가치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모든 상품에는 사용가치(use value)교환가치(exchange value)라는 두 축의 가치가 공존한다.
 
사용가치는 사물이 지닌 내재적 유용성—즉, 그것이 어떤 목적에 어떻게 쓰일 수 있는가에 관한 물질적 효용을 뜻한다. 반면 교환가치는 그것이 시장에서 다른 사물과 어떤 비율로 교환될 수 있는지를 나타내며, 이는 흔히 가격이라는 형태로 외화된다.
 
중요한 점은 이 두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물은 매우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저평가될 수 있고, 반대로 또 다른 사물은 실질적인 효용이 거의 없음에도 상징적 가치나 희소성 등의 이유로 고가에 거래되기도 한다. 이 불균형은 자본주의 가치체계의 본질이자, 미술이 겪고 있는 오늘날의 위기를 드러내는 핵심 단서이기도 하다.
 
이 개념을 미술품에 적용하면 미술의 사용가치는 단순한 물리적 효용이 아니라, 감상과 사유, 정서적·정신적 체험을 유도하는 힘에 있다.
 
좋은 미술작품은 보는 이에게 울림을 주고,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하며, 때로는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진정한 예술은 실용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 내면에 작용하는 고유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 수의 미술품은 이러한 고유가치보다는, 투자 자산이나 소유의 상징, 즉 교환가치로서 더 자주 소비된다.
 
우리는 어느새 작품 앞에서 "이건 얼마짜리지?"라는 질문부터 던진다. 예술적 감동이나 내면의 울림은 사라지고, 숫자와 순위만이 작품의 가치를 말해준다. 반대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는 사실만으로 그 작품이 예술적으로 뛰어나다고 오인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왜곡은 결국 예술을 가격의 체계, 즉 상품가치와 교환가치 속으로 종속시키고, 미술의 본질적 가치—즉 나다움과 진정성, 창조의 윤리—를 흐릿하게 만든다.
 
더 심각한 것은, 이 가치의 혼용이 예술가들의 창작 태도마저 변질시킨다는 점이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보다 팔릴 수 있는 것, 시장에서 눈에 띌 수 있는 것을 제작해야 한다는 압박은 창작의 근본적인 이유를 흔든다. ‘나다움’이라는 주체적 표현은 ‘시장다움’이라는 외부 기준에 의해 대체되고, 예술은 점차 상품의 논리로 환원된다. 시장에서 미술품의 가치는 작가의 브랜드, 전시 이력, 낙찰가, 컬렉션 이력 등 외부적이고 제도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 교환가치는 예술의 ‘진짜 가치’를 대신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예술의 본질적 가치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틀 속에서 왜곡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은 단순한 개념적 현상이 아니라, 미술 생태계 전반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 갤러리는 더 이상 예술적 실험의 파트너가 아니라, 빠른 회전율과 매출을 우선시하는 ‘판매처’로 변모하고 있다. 전시의 기획은 예술적 탐구의 장이기보다는 시장에 ‘소비 가능한 이미지’를 선보이는 쇼케이스로 축소되고 있으며, 특히 많은 작가의 경우 갤러리가 요구하는 상업적 스타일을 반복 제작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창작의 진정성과 작가의 주체성은 심각하게 침해된다. 갤러리는 이제 작품의 ‘가치’를 발굴하기보다는 ‘거래 가능성’을 중개하며, 예술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팔릴 수 있는 것’으로 재편된다.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아트페어는 이제 미술계의 일상이 되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예술의 본질을 끊임없이 침식시키고 있다. 작가는 창작의 호흡 없이 ‘출품 가능한’ 신작을 반복적으로 찍어내야 하며, 작품은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로 소비된다. 이는 결국 예술을 시세에 따라 소비하고 교체하는 ‘속도와 표면의 게임’으로 변질시킨다. 더 이상 전시는 사유의 공간이 아니며, 예술은 인간 내면의 언어가 아닌 가격표가 매겨진 오브제로 전락한다.
 
오늘날의 옥션은 예술가의 평판과 시장 가치를 결정짓는 기준점이 되었지만, 그 기준은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반영하지 않는다. 현재의 옥션 시스템은 ‘팔릴 수 있는가’라는 투자 논리에 의해 움직이며, 작품의 미적 깊이, 철학, 맥락은 평가 기준에서 제외된다. 낙찰가는 그 자체로 작가의 명성을 의미하고, 한 번 시장에 올라온 작품은 또 다른 낙찰을 위해 이동한다. 예술은 시간과 맥락을 담아내는 존재가 아니라, 수익을 위한 전환 가능한 자산으로 취급된다.
 
미술 생태계를 지탱하는 동반자인 컬렉터의 역할도 변질되고 있다. 오늘날 다수의 컬렉터는 작품을 장기적으로 수집하거나 예술의 의미를 향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기 수익을 위한 ‘투자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작가를 띄우고, 언론과 갤러리의 협업을 통해 시세를 조정한 후, 매각을 통해 수익을 실현한다. 갤러리스트, 딜러, 컨설턴트들조차 이 흐름에 편승하면서, 예술은 ‘거래 가능한 이미지’로 축소되고, 예술가의 작업은 시장이 원하는 스타일을 반복 재생산하는 자기복제공정의 일부가 된다.
 
예술은 원래 쓸모 없음의 쓸모, 즉 실용을 초월한 존재의 깊이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도, 소유의 대상도 아니다. 좋은 예술은 인간의 감각과 정신을 일깨우고, 사회의 무의식을 드러내며, 새로운 감각과 감정의 문법을 창조하는 인간만의 고유한 언어다.
 
이 고유가치는 가격으로는 측정될 수 없고,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로도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작품 속에 스며든 작가의 시선과 삶의 궤적, 표현의 방식, 존재의 진정성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예술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변질되는 순간, 예술은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질문을 “이 작품은 얼마인가?”가 아니라,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는가?”로 바꿔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와 아름다움이 깃든 예술의 본질이며, 오늘날 돈의 노예로 전락하는 천민자본주의를 이겨낼 수 있는 인간 고유의 힘이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