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 미술의 언어를 점령하다

오늘날 동시대미술의 장은 자본의 언어로 재편되고 있다. 작품은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거래의 단위로 변했고, 작가의 창작은 사적 욕망과 시장의 요구 사이에서 조정된다.
 
미술의 정신적 가치—즉, 인간의 감각과 사유가 만나는 내면의 형식—은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좌: 0.5 달러에 구매한 바나나,  우: 마우리치오 카텔란



뉴욕 기반의 퍼포먼스 아티스트 데이비드 다투나는, 마이애미 아트바젤에서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벽에 덕트 테이프로 붙여진 바나나—15만 달러에 판매된 설치미술 작품의 일부—를 먹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2023년 리움 개인전에서 한 관객이 바나나를 먹고 있는 모습 / 사진: @shwan.han/Instagram

이 현상은 단순히 시장 확대나 대중화의 결과가 아니다. 자본은 미술의 형식을 흡수해 자신을 미적 이미지로 치장하고, 미술은 자본의 체계 속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결과적으로 미술은 사유의 언어를 잃고, 자본의 표정만을 닮은 채 생존을 모색하게 된다.
 
 
 
기호자본주의의 작동 방식

기호자본주의는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그 기호적 가치가 자본을 움직이는 체제다. 이 속에서 작품은 더 이상 ‘무엇을 표현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얼마에, 어디서’ 거래했는가로 정의된다.
 
갤러리와 경매, 아트페어, SNS는 작품을 미적 담론의 대상이 아닌 기호화된 투자자산으로 변환시키는 주요 장치가 된다.
 
이 구조 속에서 미술은 자본의 상징질서 안으로 완전히 흡수된다. 작가의 작업은 독창적 실험이 아니라 ‘투자 가능한 스타일’로 기획되고, 작품의 평가는 미학적 내적 완성도보다 시장의 수요곡선에 의해 결정된다.


 
컬렉터의 시대가 가져온 균열

오늘의 미술시장은 컬렉터의 시대다. 그러나 그 컬렉터는 더 이상 ‘안목 있는 후원자’가 아니라 ‘시장 창조자’로 기능한다.


암호화폐 기업가 저스틴 선이 2024년에 620만 달러에 구입한 바나나 작품 <코미디언(Comedian)> 을 먹고 있는 모습.




<코미디언>, 작품 경매모습 / 사진 : 소더비

자본을 가진 이들이 미술의 가치를 규정하고, 그들의 소비 패턴이 미술의 흐름을 지배한다. 그 결과, 작품의 가치평가보다 시장가격이 우선되며, 미술의 기준은 미학이 아닌 시장성으로 치환된다.
 
‘얼마에 팔렸는가’가 ‘무엇을 표현했는가’보다 중요해지고, 미술의 담론은 숫자와 랭킹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구조는 결국 미술의 수준을 낮추고, 작가로 하여금 자본의 시선을 의식한 전략적 생산자로 변모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저변확대와 시장의 역설

물론 미술의 대중화와 저변 확대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소비하고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시대적 진전이다.


2019년 키아프 서울의 현장 모습. / Photo: KIAF

그러나 문제는 그 소비가 비평적 감수성이 아닌, 자본의 논리에 의해 주도될 때 발생한다. 일반 대중의 관심과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는 종종 시장가를 통해 형성되고, 미디어는 경매 기록과 유명세를 미술의 ‘품질’로 오인하게 만든다.
 
그 결과 미술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미술은 ‘투자의 언어’로 번역된다. 대중화는 미술을 넓혔지만, 동시에 미술에 대한 인식을 얕게 만들었다.


 
수준이 낮은 컬렉션의 부작용

자본은 필연적으로 수준의 불균형을 낳는다. 충분한 자본을 가진 컬렉터가 비평적 이해 없이 시장을 주도할 때, 미술의 방향은 필연적으로 왜곡된다.
 
작가의 작품은 본래의 탐구와 무관하게 ‘팔리는 스타일’로 변하고, 갤러리는 예술적 실험보다 판매 가능성을 우선한다.
 
이런 시장 구조 속에서 진정한 예술적 실험은 설 자리를 잃고, 예술은 대체 가능한 이미지로 전락한다. 자본은 미술을 살릴 수 있지만, 그 기준이 잘못 설정될 때 미술의 생태를 병들게 한다.


 
미술의 자율성 회복을 위한 구조 전환

이 위기의 핵심은 ‘가치 판단의 권력’이 자본으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이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미술의 평가 구조를 다시 예술 내부로 돌려놓아야 한다.

 
첫째, 공공 미술기관과 플랫폼은 가격보다 담론을 중심으로 작품을 소개해야 한다. 작품이 가진 맥락, 사유, 미학적 탐구를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다.

둘째, 미술시장의 정보 비대칭을 해소해야 한다. 투명한 거래 데이터, 작가 이력, 전시 기록, 비평 자료를 개방함으로써 시장의 판단이 보다 공정한 정보 위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셋째, 컬렉터 교육이 필요하다. 단순히 ‘작품 소유자’가 아니라 ‘미술의 이해자’로서의 컬렉터가 늘어날 때, 시장의 질적 수준이 높아진다.
 
 
 
시장을 넘어서, 미술을 회복하기 위해

미술의 가치는 거래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 사유, 시대의 정서를 담는 언어로서의 가치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장은 그 언어를 수익의 언어로 대체하고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자본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이 미술의 본질을 대체하려는 태도다.
 
기호자본의 시대에서 순수미술이 다시 제 언어를 되찾기 위해서는, ‘얼마짜리인가’보다 ‘왜 존재하는가’를 묻는 감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미술은 시장의 소음 속에서도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