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지난 회에서 “주객전도의 시대”라는 의제를 통해 본질이 비본질에 의해 호도되는 현상을 짚었다면, 이번 회에서는 ‘가치의 상실’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란 예술을 예술로 존재하게 했던 진정성, 자율성, 내적 필연성에 대한 믿음이며, 진정한 예술을 지탱하던 보이지 않는 합의를 말한다.


2021 아트 부산 / 사진: 아트부산

이 합의가 무너지면 작품은 가치의 근거를 잃고 가격·팔로워·브랜드 같은 외부 지표에 기대어 존재를 정당화하게 된다. 그 결과, 예술은 더 이상 진리의 탐구행위가 아니라, 기호를 관리하고 이미지로 대치되는 교환체계로 전락한다.
 


예술의 가치를 지탱하던 보이지 않는 합의

근대 이후 예술은 “작품에는 작품만의 내적 진실이 있다”는 합의 위에서 존립해왔다. 작가는 그 진실을 탐구한다고 믿었고, 관객은 그 탐구에 참여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비평과 제도는 그 과정을 공적 언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오늘날 동시대 미술은 작품의 내면에서 가치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기호 체계로 대치되어가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가치상실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가장 핵심 징후라 할 수 있다.
 


복제의 시대와 진정성의 해체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사진과 영화에서의 복제 기술은 예술의 원본성을 흔들었다. 21세기 첨단 테크놀로지를 배경으로 하는 블록체인은 ‘인증 시스템’ 자체를 새로운 진정성의 근거로 제시했고, AI는 창작의 주체가 누구인지, 본질이 무엇인지를 혼란스럽게 하면서 진화발전하고 있다.


안드레이 메텔레프(Andrey Metelev) 촬영, Unsplash 제공.

이 과정을 그대로 두면 예술의 가치 체계는 기술적 신뢰 체계에 종속되며, 작가–작품–관객의 직접적 관계는 플랫폼–토큰–브랜드의 우회 회로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한 도구의 변화가 아니라, 예술의 진정성이 해체되는 체계적 변환의 징후이다.


AI-generated image

예술은 더 이상 인간의 사유와 감각의 산물이 아니라, 시스템이 관리하는 기호의 순환이자 교환의 대상으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다.


잭 키 (Zach Key) 촬영, Unsplash 제공.

세 축의 붕괴 — 작가, 작품, 제도

작가의 진정성, 작품의 자율성, 제도의 신뢰는 예술의 가치를 구성하는 세 개의 핵심 기둥이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 미술에서 이 층위는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
 

첫째, 작가의 붕괴이다.

‘창작자’로서의 작가는 점점 ‘운영자’로 전환된다. 작업의 깊이보다는 SNS 전략이, 탐구의 시간보다는 작가의 브랜딩이 중요해진다. 이렇게 창작의 내면은 시장의 교환가치에 의해 포획되고, 작가의 진정성은 기획의 언어로 대체된다.
 

둘째, 작품의 붕괴이다.

작품은 더 이상 자율적이며 독립적이지 않다. 그 내적 논리는 낙찰가, 거래 이력, 팔로워 수 같은 외부 지표로 대체된다. 보이지 않는 형식의 사유와 조형적 진실성은 데이터화된 시장 언어 속에서 소멸하고 만다.
 

셋째, 제도의 붕괴이다.

비평은 시장 담론에 밀리고, 미술관은 흥행의 도구가 된다. 시상과 심사는 공정성보다 네트워크 중심으로 운영되고, ‘좋은 제도’는 단지 ‘유명한 제도’로 자리매김해 버린다.
 

나쁜 제도는 바꾸거나 없어져야 하지만 본질적 신뢰로 만들어진 제도가 무너지는 것은 수십년 동안 진정한 가치로 만들어진 예술의 본질과 신뢰 자체를 모래로 만든 성처럼 만들어 버리고 만다.


루이비통 서울 도산 내부모습 © 루이비통 서울 도산

진정한 가치의 소멸과 불신의 일상화

가치가 사라진 시대에 예술은 끊임없이 대체적인 방식의 증명을 요구받는다. 작품의 의미보다 출처, 데이터, 인증, 이력이 신뢰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오늘날 예술의 진정성은 더 이상 창작의 과정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 대신 콘텐츠로 재가공되어, 시장과 기관의 요구에 맞춰 재포장될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감상은 사라지고, 작품의 내적 논리는 깊어지지 못하며, 결국에 미술작품은 배경·체험·사진으로 장식이 되고 만다. 그 결과 예술의 언어는 점점 얕아지고, 깊은 비평의 문장 대신 짧은 문구와 이미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적 진정성의 붕괴이며, 동시에 주객전도를 유발하는 내적 징후인 것이다.
 


‘단색화’ 이후, 가치의 표류

일례로 한국에서 단색화는 한 시대의 예술적 성취이자 정신적 탐구였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단색화는 ‘한국 미술시장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물질화되며, 작가의 의도와 시대적 맥락은 ‘한국 브랜드’라는 상징 아래 흡수되었고, 그 결과 단색화는 예술적 실험이라기보다 ‘투자 가능한 서사’로 소비되었다.


김기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976-1977, 캔버스에 유채, 250x190cm, 리움 삼성미술 관 소장 /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김기린의 색은 물질성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한 요소로 사용된다.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본질로 돌아간 화면의 색채는 그 순도 자체로 감각적인 요소를 만들고, 반복적으로 두텁게 축적된 깊이는 명상하는 공간을 제공한다.




2025 Kiaf HIGHLIGHTS 수상자 3인 (왼쪽부터: 박그림, 이동훈, 박노완) ©Kiaf SEOUL

최근에 등장한 젊은 작가군 역시 작가의 내적인 경험의 지적인 축적 대신 아트페어나 경매 리스트라는 시장의 속도에 올라타며 이른 시기에 ‘브랜드 작가’로 ‘인기 작가’로 포장된다.
 
결국 예술가의 진정성과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길’(축적)보다 ‘상품의 길’(회전)로 어긋나며 유통 가능한 상품 이미지로 희석되고 말뿐이다.
 


에필로그 — 잃어버린 가치, 다시 묻는 질문

가치가 사라진 시대의 예술은 화려하지만 그 내면은 공허하다. 지금은 공허한 미술만이 화려하게 반짝일 뿐이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에 의한 물화현상으로 끊임없이 가치상실을 위협받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인간 본래의 진정성을 잃는 순간 예술의 본질도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만 한다. “이 작품은 무엇이며 왜 이 형식과 과정을 선택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답을 구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예술의 정신성과 가치를 회복할 수 있으며 단순한 시각적 결과물과 물질적 형식을 넘어 근원적인 사유의 장으로서의 위치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