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자본주의란 무엇인가

21세기 후기자본주의는 단순한 생산과 소비의 경제를 넘어, 기호와 상징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체계로 진입했다. 장 보들리야르는 이를 "기호의 정치경제학"이라 명명하며, 현대사회에서는 물질 그 자체보다 그것을 상징하는 기호가 더 큰 가치를 갖는다고 진단했다. 이때 상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닌, 기호의 집합이자 사회적 코드가 된다.

나이키의 스우시(swoosh)는 ‘자기서사의 상징’이자 성공한 삶의 라이프스타일 기호로 작동하며, 루이비통의 로고는 기능을 넘어 '명품의 계급 기호'로 작동한다. 애플의 사과는 기술 그 자체보다 '혁신과 감성'의 이미지로 인식된다. 이처럼 기호는 욕망을 조직하고, 인간의 정체성까지도 생산한다. 이 체계는 문화산업 전반을 포섭하며 예술, 그 중에서도 순수미술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기호가 실재를 지우다: 순수미술의 이미지화

보들리야르가 예고한 시뮬라크르의 시대는 이제 미술관과 아트페어의 벽면에서 현실로 구현되고 있다. 오늘날의 미술작품은 실재를 재현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의 연쇄 속에서 소비된다. 작품은 고유한 창작물이라기보다 브랜드, 이력, 가격, SNS 파급력 등 외부 기호로 포장된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화는 작품의 내면성과 실재성을 지운다. 회화는 색과 붓질보다 인증샷의 배경으로 소비되고, 조각은 조형성이 아닌 공간 연출의 도구로 기능한다. 감각과 사유, 물성과 시선의 긴장이라는 예술의 본래적 요소는 침묵당한다. 작품의 평가는 내적 완성도보다 외적 상징자본에 의해 결정되며, 결국 순수미술은 시뮬레이션의 논리 안에서 자율성을 상실한다.


 
욕망의 정치와 예술의 외주화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현대의 권력이 억압이 아닌 "욕망의 구성"을 통해 작동한다고 보았다. 예술 역시 이제 자율적 창작 행위가 아니라, 외부 욕망을 내면화한 기호생산의 노동으로 바뀌고 있다.
 
작가는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는 시장과 기관, 알고리즘이 원하는 것을 먼저 감지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전략을 짠다.
 
이로 인하여 작가 주체는 해체되고,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컬렉터, SNS 알고리즘이 공동으로 구성한 "시장 욕망의 청사진"에 따라 작업이 수행된다. 창작은 자기 욕망의 구현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대행하는 외주화된 노동이 된다. 작품은 감각이나 개념이 아닌, 브랜드 포지셔닝 전략의 일부로 기능하며, 그 존재 이유는 점점 기호적 가치로만 축소된다.


 
감상의 붕괴: 정보와 수치의 지배

오늘날 관객은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작품 앞에 서기 전에 검색하고, 해시태그를 확인하며, 작가의 이력을 체크한다. 미술관의 벽면보다 아트마켓의 낙찰가 정보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시대다. 감상은 감각과 사유의 경험이 아니라, 정보 수집과 판단의 연속적 행위로 변질된다.
 
이러한 감상 방식은 작품을 사물로 느끼기보다는 데이터로 환원시킨다. 색채, 구성, 내러티브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어느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는지, 어떤 컬렉터가 소장했는지, 향후 가치가 얼마만큼 오를 수 있는지이다. 감상자는 이제 수용자가 아니라, 기호의 판독자이며, 시장의 사전(事典)을 참조하는 소비자다.
 


‘전복의 언어’가 상품이 될 때

기호자본주의의 가장 교묘한 전략은, 저항과 비판의 언어조차 상품으로 포섭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업, 젠더나 기후위기, 이주와 불평등을 다룬 급진적 프로젝트들조차 이제는 전시 기획의 '기호'로 기능한다. 이들은 급진적 담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담론을 통해 시장성과 제도적 수용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다.
 
결국 비판은 사유의 불편함을 야기하기보다는, 시장이 수용할 수 있는 '쿨함'의 코드로 재포장된다. 예술의 전복성은 유희의 장치가 되고, 체제 밖의 언어는 체제 내부의 장식물이 된다. 이때 순수미술은 저항의 도구가 아닌, 체제의 윤활유로 기능하며 그 본래적 사명을 상실한다.


 
미술 제도의 재구성: 기호의 생산 공장

오늘날의 미술관, 비엔날레, 아트페어, 레지던시는 단지 예술을 전시하거나 생산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기호를 설계하고 배치하며 유통하는 구조물이다. 큐레이터는 작품을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조율하고 기획하는 전문가가 되며, 전시는 하나의 '스토리텔링된 콘텐츠 묶음'으로 기획된다.
 
아트페어는 작품의 기호적 가치를 실물 가격으로 전환하는 거래소이며, 미술관은 기호를 제도화하고 인증하는 시스템이다. 순수미술은 이 구조에서 자율적 영역이 아닌, '기호의 생산공정'으로 변질되며, 그 외부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작가의 존재 조건: 브랜드인가 창작자인가

오늘날 작가는 창작자이기 이전에 브랜드다. SNS의 팔로워 수, 전속 갤러리, 컬렉션 이력, 협업 기업 등이 작가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과거에는 '무엇을 그렸는가'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누가 그렸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이때 '누구'는 인격이나 철학이 아니라, 기호적 스펙의 총합이다.
 
이는 특히 젊은 작가들에게 심각한 압박으로 작용한다. 자신의 언어를 구축하기보다, 시장의 언어를 얼마나 빠르게 습득하고, 마케팅 전략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가 생존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작품은 성장이 아니라 증명으로, 실험이 아니라 기획으로 대체된다.


 
기호의 지배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기호자본주의는 예술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 내부로 침투한 구조다. 문제는 시장의 팽창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와 감상자, 제도 전반이 이 구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예술의 자기 해체이며, 결국에는 자율성과 실재를 포기하는 길이다.
 
순수미술이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호의 재생산자가 아닌 해체자로서의 태도가 요구된다. 작가는 시장을 구성하는 기호에 균열을 내야 하며, 감상자는 표면의 기호를 넘어 실재를 질문해야 한다. 작품은 이미지가 아니라, 감각과 사유의 언어로 복귀해야 하며, 예술은 다시 "사물 이전의 사유"로 되돌아가야 한다.


 
순수미술은 다시 실재의 편에 설 수 있는가

기호자본주의 시대, 순수미술은 존재의 깊이보다 표면의 기호로 평가받는다. 사유의 힘은 파급력의 수치로 환산되고, 예술의 시간은 알고리즘과 시장의 시간에 종속된다. 우리는 지금, 예술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진부하게 끊임없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그 오래된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질문을 반복하고 답을 구하려는 태도야말로, 예술이 기호의 세계에서 실재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