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조건’은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기 위한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컨템퍼러리 아트가 스스로 설정한 작동 원리를 다시 사유의 대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분석적 개념이다. 의미는 여전히 활발히, 끊임없이,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되고 있다. 핵심은 그것들의 가치와 의미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이다.

컨템퍼러리 아트의 한계는 의미 생산의 실패가 아니라,
가치 판단의 구조가 무력화되었다는 데 있다.

이 구조를 재구성하지 않는 한,
동시대 미술의 미래를 논하는 일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조건은 바로 이 인식에서 출발한다.


모던과 컨템퍼러리의 가치판단 방식


모던 아트에서 의미는 작품 내부의 형식적 논리로 조직되었다. 형식, 구성, 물질성, 매체의 자율성은 작품의 성취를 판단하는 기준이었고, 비평은 그 기준을 통해 작품을 비교하고 서열화하며 그 위계를 축적했다.
 
이 구조의 장점은 판단의 회로가 명확했다는 점이다. 작품이 무엇을 성취했는지, 무엇을 실패했는지에 대한 서술이 논리적으로 가능했고, 그 서술이 다른 것들의 판단에도 유효한 기준으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컨템퍼러리 아트는 이 구조를 거부하거나 재정의하면서 성립하기 시작했다. 모던의 관점에서 말하는 작품 고유의 의미는 더 이상 작품을 하나의 의미에 고정시키지 않고, 작품이 놓이는 사회적·제도적·담론적 조건, 관람자의 위치와 경험, 유통과 수용의 방식 속에서 생성되게 하였다.
 
즉 작품은 하나의 완결된 의미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의미 생성을 촉발하는 매개가 된다. 이 전환은 동시대의 복합성을 설명하는 데 유효했고, 모던의 독단적 배제 구조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우리가 행하는 다양한 실천을 마치 하나의 장 안에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컨템퍼러리 아트가 의미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는 많은 것을 성취했지만, 그 성취를 판단의 언어로 정밀하게 전환하는 단계에서는 심각한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생산은 차고 넘치는데, 그 의미를 가치 판단으로 환원하는 구조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가치 판단의 유예’가 남긴 가치와 부작용

컨템퍼러리 아트에서 ‘가치 판단의 유예’는 단일하고 즉각적인 판단, 즉 모던 아트가 행했던 방식이 동시대의 복합성과 다층성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작동 방식이다.
 
컨템퍼러리 아트에서의 가치 판단 방식은 가치 판단의 기준과 시점이 명확하게 확정되지 않은 채 내버려졌고, 이러한 보류는 ‘가치 판단의 유예라는 이름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모던의 형식 중심의 권위를 무력화했고, 특정 미학의 지배적 보편성을 배제했으며, 지역적·문화적 다양성을 동일한 무대 위에 올리는 제도적 방식으로 작동한 것이다. 따라서 컨템퍼러리 아트의 현재를 규정하는 핵심은 ‘기준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 생산된 기준에 있다. 예를 들어 작품의 맥락, 정치성, 참여, 공동체, 제도 비판, 정체성, 서사, 리서치, 아카이브, 기술, 생태 등 수많은 기준이 동시에 호출된다.
 
물론 이러한 다원성 자체가 포스트 컨템퍼러리적 조건을 이야기하게 된 배경은 아니다. 문제는 이 다원적 기준들이 서로를 보완하거나 검증하지 못한 채, 병렬적으로 ‘보류된 상태’로만 작동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기준으로 내려진 판단은 곧바로 다른 기준에 의해 무효화된다. 형식적 완성도에 대한 언급은 “형식주의”로, 미적 성취에 대한 논의는 “비정치성”으로, 정치적 급진성의 강조는 “도덕주의”로, 제도 비판은 “제도 내부의 역할 수행”으로 곧바로 상대화되며 가치 판단이 무력화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미술작품의 가치 판단은 원천적으로 작동 불가능해진다.
기준이 기준을 막고, 기준이 기준을 소거하며, 기준이 기준을 삼키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작품의 개별적 성취를 엄밀하게 판정하는 행위가 불가능해지고, 비평은 “왜 중요한가”를 말하기보다 단지 “어떤 맥락인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만 작용한다. 그 무수한 전시들은 하나의 이벤트로서 사라질 뿐 미학적·미술사적 성취로는 축적되지 못한다. 이것이 컨템퍼러리 아트에서 가치 판단의 부재가 낳는 최악의 부작용이다.
 

 
컨템퍼러리 아트의 성공과 실패

컨템퍼러리 아트에서 동시대의 조건을 포착하는 감각, 매체와 형식의 전환 능력, 문제 설정의 민감도, 제도와 사회를 해석하는 언어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작품이 무엇을 성취했는지, 그 성취가 어떤 근거로 타당한지, 한계가 무엇이며 어떤 수정이 필요한지, 동일한 주제와 포맷이 반복될 때 무엇이 남고 무엇이 소진되는지—이 질문들은 구조적으로 남지 못한다.
 
가치 판단의 문장이 남지 못하면 원인 분석을 할 수 없고, 그 분석이 없으면 비평은 영향력을 잃는다. 영향력을 잃은 비평의 자리는 빈 공동의 상태로 남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신호 체계가 자리를 잡게 된다. 그것이 기호자본이다.

가치 판단이 무력화된 공백을 가장 빠르게 점유하는 것은 갤러리, 아트페어, 옥션 등의 미술시장이다. 이 신호 체계는 작품의 고유한 성취를 분석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가치 신호를 생산한다. 거래 기록, 낙찰가, 반복 노출, 부스 위치, 갤러리 네트워크, 컬렉터 라인업은 작품의 질을 설명하지 않지만, 질을 “대체”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시장이 나쁘다는 윤리적 결론이 아니다. 핵심은 미술 내부의 가치 판단 회로가 무력화될수록, 시장의 신호가 판단의 대리물로 기능한다는 구조적 사실이다. 그 결과 작품의 고유가치는 균열을 일으킨다. 작품이 무엇을 했는지보다, 어디에 걸렸는지, 누가 샀는지, 얼마에 거래되었는지가 더 빠르고 강하게 가치의 언어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완성도, 밀도, 설계, 숙련, 형식적 통제력은 판단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노출·연결·거래의 지표가 중심으로 이동한다.
 
이렇듯 미술 내부의 고유한 가치 판단 체계가 불능 상태가 되면, 결국 시장이 모든 가치 판단을 대체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것이 낳는 결론은 문화 인식 수준의 낙후와 인간 고유의 가치를 생산하고 담보하는 예술 고유의 역할이 무너지고, 마침내 사라져 후진적 문화국가에 이르게 되는 현실적 메커니즘이다.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조건이 의미하는 것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조건’이 말하는 핵심은 컨템퍼러리 아트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 판단을 유보한 상태로 내버려 두는, 즉 판단으로 전환되지 않는 상태가 구조화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조건은 “컨템퍼러리를 극복하고 넘어가야만 한다”는 선언이나 구호가 아니라 “동시대적 가치로서의 컨템퍼러리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다시 작동시켜야 하는가”라는 반성과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는, 국제적 전시 포맷과 담론에 빠르게 접속하기 위해 이 유예가 사실상 ‘필수 장치’로 채택되었다. 단일 기준의 비교를 회피할 수 있었고, “동시대적 문제의식”이라는 공통 언어 안에서 이러한 실천들은 가치의 평가를 뒤로 한 채 자연스럽게 그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예가 지속될수록, 유예는 더 이상 “판단을 위한 숙고의 시간”이 아니라 “판단이 발생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가치 판단의 보류 상태”로 이동한다. 바로 이 이동이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조건을 구성한다.


 
포스트 컨템퍼러리 조건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컨템퍼러리 아트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말은 추상적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서는 모호한 처방 대신, 재구성이 요구되는 구체 요소를 정확한 단어로 분리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가치 판단 회로의 재생과 복원이 필요하다. 의미 생산 이후에 성취와 한계를 판정하는 언어, 그 판정을 축적 가능한 형태로 남기는 절차, 그리고 그 축적이 다음 기획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환류되는 회로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호 협의 및 동의가 가능한 기준의 정렬이 필요하다.
 
다원적 기준이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상태는 다원성이 아니라 상쇄이다. 기준들 사이의 긴장 관계를 드러내고, 각 기준이 무엇을 포착하며 무엇을 놓치는지를 규정하는 정렬이 필요하다. 정렬은 단일 기준으로의 환원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준이 서로를 무력화하지 않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구조화이다.
 
예를 들어 전시는 “문제를 제기했다”로 끝나서는 안 된다. 무엇을 제기했고, 그 제기가 어떤 방식으로 형식·구성·경험으로 구현되었으며, 어디에서 밀도가 떨어졌는지, 무엇이 남았는지의 명시가 필요하다. 이 명시는 평가의 위계가 아니라, 스스로의 책임의 문장이어야 한다.
 
따라서 비평의 역할 재정의가 필요하다. 비평은 작품의 생산 과정과 맥락을 설명하는 관점을 포함함과 동시에, 작품의 고유 성취를 판정하는 분석 장치로 복귀해야 한다. 이는 과거의 권위적 심판으로 위계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다. 판단을 “하나의 고정된 결론”이 아니라 “모두가 동의하고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분석 결과”로 구성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시장 신호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가치 판단의 대리물이 되는 순간, 내부 판단 구조는 붕괴한다. 거래와 노출은 참고 자료일 수는 있으나, 작품의 성취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 분리 작업은 윤리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다. 제대로 된 가치 판단의 기능이 사라지면 그 자리는 반드시 시장의 기호가치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한국 동시대 미술의 미래를 위하여

한국 동시대 미술에서 필요한 것은 “더 잘하자”는 실행 구호가 아니라, 원점과 기본에서 다시 묻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치로 삼을 것인지, 무엇이 작품의 고유 성취를 구성하는지, 전시와 비평이 무엇을 성과로 기록해야 하는지, 시장 신호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어디까지 배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가 다시 필요한 상황이다.
 
가치판단의 유예가 컨템퍼러리 아트의 맥락에서 재편되지 못하면, 그 의미는 내부에서 축적되지 못하고 외부 신호에 의해 재배열된다. 이렇게 되면 한국 동시대 미술은 타자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 동시대 미술의 종사자들이 자각해야 하는 것은, 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적 상황을 객관적 언어로 포착하고, 이를 명확한 개념으로 제시할 수 있는 가치 판단의 유예 구조를 가능한 빠르게 재편하는 데 있다.
 
다원적이고 국제적이며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종속되거나 외면받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생산이 아니라, 생산된 것들에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판단의 체계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러한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조건이 구축되지 않는 한, 한국 동시대 미술의 미래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