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두 원로가 주요 문화기관의 수장으로 복귀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로 각각 취임했다. 두
사람 모두 미술사학자이자 저명한 비평가, 기획자로서의 경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들의 복귀는 ‘연륜’과 ‘안정감’에 대한 기대를 모은다.

유홍준 신임 국립 박물관장

윤범모 신임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하지만
오늘날의 문화예술 환경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도전과 기회를 마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귀환은 단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의 제도와 전략을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만 한다.
유홍준 관장의 ‘해외 투어 전시’
유홍준
관장은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과 전시 콘텐츠를 세계 주요 도시로 순회하는 ‘해외 투어
전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그가 문화재청장 재임
시절부터 강조해 온 문화외교 전략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2020년대의
문화외교는 2000년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법을 요구한다.

국립 중앙 박물관 외부 전경
첫째, 문화의 세계화는 유산을 해외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인이 한국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BTS, <오징어게임> , 넷플릭스의 K-드라마 등은 이미 글로벌 팬들이 한국을 여행 목적지로 삼게 만들었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러한 흐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다.
둘째, 해외 투어 전시는 비용 대비 효율이 낮다. 수십억 원의 수송, 보험, 설치, 홍보 비용이 들지만, 일회성
전시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7년 ‘한·불 상호교류의 해’ 당시
프랑스에서 열린 대규모 한국문화전은 기대 이하의 관람객 수를 기록했다.
셋째, 박물관 자체를 외국인이 오고 싶은
‘글로벌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더 시급하다. 2024년
상반기 국립중앙박물관의 외국인 방문객 수는 94,951명,
전체의 6.1%에 불과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34.5% 증가한 수치이지만, 연간 총 관람객
약 378만 명 중 외국인 비율은 여전히 5~7% 수준에
머무른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위상에도 불구하고, 외국어 안내, 온라인 아카이브, 접근성 정보, 다국어 콘텐츠 등 박물관의 기본적인 글로벌 서비스는
국제 기준에 미달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따라서 ‘보내는 전시’가 아니라, ‘찾아오게
만드는 시스템’에 박물관의 자원과 전략을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문화의
세계화는 ‘이동’이 아니라
‘목적지화’의 문제다.
광주비엔날레, 아카이브 없는 비엔날레는 소장품 없는 미술관이다.
윤범모
신임 대표이사는 광주비엔날레의 태동기부터 깊이 관여해 온 인물이다. 그는 2015년 20주년 특별전을 기획하며 ‘광주정신’의 예술적 구현을 이끌었고, 이번 취임에서도 “광주정신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늘날 광주비엔날레가 직면한 핵심 과제는 ‘정신’이 아니라 ‘기록’의 부재다.

광주비엔날레 홈페이지 캡쳐화면.
한국을 대표하는 비엔날레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홈페이지의 자료실.
그나마 2024년은 도록 무료보기가 링크되어 있으나 이전의 모든 자료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광주비엔날레 아카이브의 현실이다.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 아시아 최초의 국제 비엔날레로 출범해 30년 역사를 지녔지만, 그에 걸맞는 아카이브 시스템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역대 전시의 예술감독, 주제어, 참여 작가, 주요 전시 도면, 작품
목록, 전시 결과 보고서, 비평문, 보도자료, 사진 등은 공식 홈페이지나 통합 포털에서 검색조차
어렵다.
또한
1995년부터 2023년까지 개최된 14회의 본 전시 및 특별전 중 상당수는 웹 링크가 끊기거나, PDF 파일조차
보존되어 있지 않다. 그나마 존재하는 일부 기록도
일관된 형식 없이 파편적으로 저장되어 있으며, 연구자, 기자, 기획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이러한
자료 부실은 단지 ‘관리 소홀’의 문제가 아니라, 비엔날레의 정체성과 미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다.
세계
주요 비엔날레들은 모두 과거 전시의 디지털화 및 학술 아카이브 구축에 힘써왔다. 베니스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상하이비엔날레 모두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역대
전시의 데이터베이스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후속 연구와 기획에 활용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가
다시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지 ‘좋은 전시’를
기획하는 것을 넘어, 다음 세대가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기반의 통합 아카이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선결 과제다.
첫째, 각 회차 전시의 아티스트 목록, 주제, 큐레이터 기획안, 설계도, 전시장
배치도, 매체 자료, 영상 기록을 포함하는 구조화된 디지털
인덱스 구축이 필요하다.
둘째, 영문
중심의 글로벌 포털 개발 및 비평문, 학술자료 병렬 저장 등과 데이터 기반의 큐레이션 연구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는 학술 지원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
연륜은 자산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대중적 문화 교양 시대를 열었고, 윤범모는 1980년 광주의 기억을 미술적 언어로 풀어낸 기획자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기관이 요구하는 역량은 단순한 해석력만이 아니다. 조직 운영, 디지털 전략, 국제 네트워크 구축,
ESG 감수성, 공공 거버넌스 등 새로운 리더십 프레임이 요구된다.
글로벌
기관들은 이미 변화를 시작했다.
테이트
모던은 관람객 동선과 선호를 분석하는 AI 기반 시스템을 도입했고, MoMA는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과 NFT 수집으로 새로운 예술경영 모델을 실험 중이다.

MoMA 디지털 아카이브 캡쳐화면
이에
비해 한국의 문화기관 인선은 여전히 문화권력 중심의 순환 구조에 머물러 있다. 경험 있는 원로의 복귀가
환영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과거를 반복하려는 움직임이어선 안 된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경험을 미래 설계의 자산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한국 미술의 세계화는 더 많은 전시가 아니라, 더 나은 시스템이다
한국
미술이 진정으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해외 투어 전시가 아니다. 그것은 신뢰 가능한
콘텐츠 제작 구조, 투명한 운영 체계, 국제 협업 네트워크, 비평과 학술의 병행 시스템이라는 생태계의 체계화다.
세계는
이제 단순히 “한국을 보겠다”가 아니라, “한국에서 배우겠다”는 흐름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기대에 부응하려면, 미술관과 비엔날레가 내부부터 ‘글로벌 기준’으로 정비되어야 한다.
관람객 수, 전시 건수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남기고 있느냐다.
지금이야말로 ‘올드 보이’들이 귀환의 의미를 ‘복귀’가 아니라 전환으로 재정의해야 할 때다. 그들의 진정한
역할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기관의 구조 개혁에 앞장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