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동시대 미술은 더 이상 세계 미술계의 변방에 머물고
있지 않다.
주요 비엔날레와 국제 미술관에서 한국 작가들이 지속적으로 초대받고
있으며, 형식과 주제의 측면에서도 국제 미술계의 기준에 대응할 수 있는 실력을 점점 더 갖춰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한국 동시대 미술은 언제까지 서양의 미술인들이 생성해낸 질문을 참조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거듭하는 위치에 머무를
것인가.
이 질문은 한국 동시대 미술의 현재가 낙후되었거나 혹은 우리 미술가들의
지적 결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가 밟아온 역사는 모든 문명이 성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처럼 그 과정을 그대로 밟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예술의 본질 한국 동시대 미술의 본질을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한국 특유의 장점인 ‘빠른
따라잡기’ 방식으로는 한국 동시대 미술의 미래가 지속될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국제 미술 제도 안에서의 한국 동시대 미술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동시대 미술은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전시나
세계 미술계의 권위가 있는 제도를 향해 끊임없는 도전을 해왔다.
최근에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와 미술관들은 이제 한국의 동시대 미술을
일시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소비하기보다, 세계 동시대 미술의 주요한 구성 요소로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다루어
왔다. 그 결과 한국 작가들은 세계 유명 미술관이나 비엔날레 등에서 좋은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이 변화는 한국 미술이 이제 국제 미술계의 위계에서 더 이상 낙후된
존재로 취급받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아직까지는
타인의 승인 제도-담론을 생산하는 주체들- 하에서 그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안에 들어가는 것과, 그 제도를 향해 질문을 던지며 밖에 위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며 이는 분명히 구분되어야만 한다.
서구 담론으로 형성된 한국 동시대성의 언어
한국 동시대 미술이 사용해 온 언어는 상당 부분 서구 미술 이론에서
먼저 정리된 개념들에 기반해 왔다. 물론 공공성, 정치성, 정체성, 젠더, 탈식민, 환경과 같은 동시대의 주요 논제들은 단순히 특정 지역의 문제만은 아니며 동시대 세계가 공유해 온 핵심적인 논점들이었다. 따라서 한국 미술이 이러한 언어를 학습하고 적용해 온 과정은 세계 미술계와 연결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이 언어들이 각 주체의 시각을 통해 비판적으로 재구성 되었다기
보다는 세계 동시대 미술의 표준적 기준으로 굳어졌다는 점이다. 즉 무엇을 말하는지는 분명해졌지만, 왜 그 언어를 사용하는지, 그 언어를 통해 한국 동시대 미술은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서구의 질문에 한국은 답변하는 구조의 반복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경우 한국 동시대 미술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는
외부 담론에서 먼저 제시되었고, 한국 미술은 그 문제에 대응하며 한국적 맥락 속에서 설명하는 역할을
진행해 왔다. 그 결과로 몇몇 작가들은 세계 미술의 담론에 빠르게 편입되며 그들의 인정을 받는데 성공하였고
그 열매는 다시 한국의 동시대 미술계에서 몇 배의 명성으로 보상받았다.
이 구조는 자연스럽게 그들은 질문을 만들고 우리는 답변을 반복하는
구조를 나았다. 한국 미술은 이에
대한 풍부한 결과물을 제공했지만,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성과는 언제나 무의미했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역량 부족이 아니라,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한국 동시대 미술의 수동적 참여 방식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이다.
아직도 우리의 새로운 작업들은 대체로 기존 담론을 보완하는 사례로
소비되고 있고, 해석의 기본 틀은 서구에서 선점한 그것의 범위 밖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실천의 이성적이며 냉정한 비판적 행위마저 제도의 권위와
위계의 틀 안에서 당연한 듯이 안정된 순위를 누가 매겨주기 만을 기다릴 뿐이다.
서구의 제도가 만들어낸 위계적 역할과 본질적인 질문의 부재
이러한 상황은 개인의 선택이기보다 제도의 작동 방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는
제도 안에서 분화된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이미 정리된 담론을 정확히 이해하고 전달하는 능력은 오랫동안
전문성의 기준으로 작동해 왔다. 이 기준은 평가와 기회 배분의 구조를 통해 반복적으로 강화되었다.
그 결과 기존의 언어와 틀을 벗어나는 시도는 점점 줄어들었고, 익숙한 담론을 변주하는 방식이 관행처럼 이어졌다. 이 구조 속에서
각자는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질문이 처음 만들어지는 지점에는 거의 개입하지 못했다. 질문의 부재는 개인의 용기 부족이 아니라, 제도가 허용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서구 담론을 기준으로 한 승인 중심 구조, 즉 정치적 제스처와 비판적 형식은 더 이상 낯설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
안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표현으로 관리되고 있다. 비판은 허용되지만,
제도의 방향을 바꾸는 힘으로는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조건 속에서 담론을 생성하는 것은 여전히 서구의
유명 비엔날레나 미술관 그리고 그 곳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이며, 우리는 인정받기 위하여 지금도 여전히
그들이 생산해낸 이야기를 묻고 따지지 않고 빨리 해석하고 빨리 그 지점에 이르려고 발버둥친다.
질문과 답변의 주체는 누구인가?
한국 동시대 미술은 아시아에서는 유일할 정도로 역동적이며 다양한
활동들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 우리나라처럼 활발한 동시대 미술 씬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또한 세계의 흐름 안에서 다양한 사회 정치적 사안을 직접 다루는
프로젝트, 제도에 대한 비판적 접근,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보편적 메시지 등에 대해 작가의 입장이 비교적 분명하여 이를 통하여 한국 동시대 미술계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고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제 한국 동시대 미술은 더 이상 외부에서 만들어진 문제 보다는
우리 스스로 무엇을 문제로 삼을 것인지, 어떤 조건에서 그 문제가 발생하는지, 그 질문을 스스로 설정해야 할 시점에 도달해 있다.
미술에 대한 주체적 담론은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제 우리는 타인이
제시한 주제에 대한 답변의 반복을 멈추고, 우리 스스로가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
필요하다.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시대에서는 그것만이 한국 동시대 미술의 미래를 새로운 자리에 놓아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