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접합의 의미
하종현(1935~)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단색화(Dansaekhwa)의 선구자로 평가되며, 특히
그의 대표 연작인 ‘접합(Conjunction)’ 시리즈는
한국적 추상미술을 세계적으로 알린 중요한 작업이다.
그는 1970년대부터 50여 년간 지속적으로 접합 개념을 탐구하며, 물질과 공간, 신체적 제스처를 회화적 언어로 구축해왔다.
그의 작업에서 ‘접합’은 단순한 형식적 실험이 아니라, 물질과 작가 자신이 결합하는 과정이며, 회화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행위로 자리 잡는다.
‘접합’은 캔버스의 앞면이 아닌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 넣고, 그 흐름을 제어하는 독창적인 ‘배압법(背押法)’을 통해 완성된다. 이는 서구
추상회화의 일반적인 제작 방식과 차별화되며, 물질의 물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하종현은 단순히 물감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물감이 캔버스를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의 행위와 재료 간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은 회화의 전통적인 개념을 확장하며, 회화가 단순한 표면적 구성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과 시간성을 포함하는 예술적 실천임을 보여준다.
2.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와 초기 실험 (1960~1970년대)

아트선재센터에서는 2월 14일 - 4월 20일까지 작가 하종현의 초기 작업(1959–1975)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하종현 5975》를 개최하고 있다. / © 아트선재센터
1964년
창립된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Avant-Garde Association of Korea)는 1960년대 후반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적 경향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미술 단체이다. 하종현을 비롯해 김구림, 이건용,
성능경 등의 작가들이 참여하며, 기존의 전통적 회화 방식에서 벗어나 개념미술, 행위예술, 오브제 아트 등을 적극적으로 실험했다. 이들은 서구 현대미술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적 조형성과 실험정신을
접목하여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모색했다.

<탄생 B>, 1967년, 캔버스에 유채, 콜라주 / © 국립현대미술관

<무제 72-3(B)>(1972). / © 아트선재센터
하종현은 이 시기에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대표작으로 <무제 A>(1965)와 <탄생 B>(1967)가 있다. 신문지, 철사, 용수철과 같은 오브제를 활용한 그의 작업은 개념미술과 조형적 실험의 경계를 확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도시계획백서 67>(1967). / © 아트선재센터
이후 <도시 계획 백서>(1969)에서는 기하학적 패턴을 통해 공간 구조를 탐구하며, 서구적 미니멀리즘과 차별화된 접근 방식을 선보였다. 이와 같은 실험이 ‘접합’ 개념으로 이어지며, 하종현의 본격적인 단색화 작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아트선재센터에서는 2월 14일 - 4월 20일까지 작가 하종현의 초기 작업(1959–1975)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하종현 5975》를 개최하고 있다.
3. ‘접합’ 연작의 전개
(1970~1980년대)
1974년부터
시작된 ‘접합’ 시리즈는 하종현의 대표적인 연작으로 자리
잡았다. 이 작업에서 그는 올이 성긴 마대(hemp cloth)의
뒷면에서 유채(Oil Paint)를 밀어 넣는 독창적인 ‘배압법’을 개발했다. 이는 단순한 기법적 실험을 넘어, 회화의 개념 자체를 뒤집는 방식이었다. 전통적인 화법에서 벗어나
캔버스 앞면이 아닌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 넣는 방식은 기존 서구 회화와는 전혀 다른 공간적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하종현의 <접합 74-17>(1974). 국제갤러리 소장. / © 아트선재센터
1980년대에는
접합의 표면에 정적이고 명상적인 요소가 강조되었으며, 1985년 이후부터는 더욱 동적인 제스처가 두드러졌다. ‘접합 86-24’ 시리즈에서는 황갈색, 흰색, 청색과 같은 기본적인 색채를 통해 공간을 채우거나 반복적인
패턴을 통해 회화적 평면성을 극대화했다. 이 시기의 작업에서는 동양적 여백의 미와 서구적 물성 실험이
결합되며, 한국적 추상의 독자성을 구축하는 중요한 단계로 평가된다.
4. 물성과 제스처의 확장 (1990~2000년대)
1990년대
이후 하종현의 작업은 더욱 치밀한 제스처와 물성 탐구로 확장되었다. <접합 90>에서 <접합
99>에 이르기까지 그의 회화적 행위는 보다 질서 정연하면서도 강한 물질성과 리듬감을 형성했다.
특히, 기존 단색화의 개념을 확장하여 다양한 질감과 표면 효과를 실험하면서 회화적 가능성을
확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 그는 배압법의 기법을 유지하면서도 다채로운 색채를 도입하여 ‘이후 접합(Post-Conjunction)’ 연작을 전개했다. 이 시기의 작업은
나무 합판을 잘라서 천으로 감싼 후 유화 물감을 압착하여 새로운 형태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며, ‘접합’의 개념을 더욱 입체적으로
확장하는 시도였다.

<포스트-접합 11-3> (2011), 혼합 매체, 120 × 180 cm
사진: 안천호, 작가 및 국제갤러리 제공
5. 현대적 확장과 ‘이후 접합’
(2010년대~현재)
2010년대
이후 하종현은 기존의 단색화 개념에서 벗어나 다색의 가능성을 탐색하며 작업을 전개했다. Conjunction
21-38
(2021), Post-Conjunction
21-201
(2021)과 같은 최근작에서는 기존 ‘접합’ 연작과는
다른 색감과 화면 구성이 도입되었다.

<접합 21-38> (2021), 삼베에 유채, 162 × 130 cm / 사진: 안천호, 작가 및 국제갤러리 제공
이는 단색화와 다색화의 경계를 허물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작가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갱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후 접합’ 연작은 나무 조각을 이용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회화의 물성을 더욱 강조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는 한국 전통 건축의 구조적 특징과 연결되며, 그의 작업이 서구적 회화와는 다른 한국적 조형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6. 하종현의 회화적 유산과 다양한 활동
하종현의 작업은 단순한 기법적 실험을 넘어, 회화의 개념 자체를 확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는 물성과
공간, 신체적 제스처의 결합을 통해 한국적 단색화의 독자성을 확립하였으며, ‘접합’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실험을 이어왔다. 그의 작품은 동양적 사유와 서구적 추상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중요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1970년대 대표작 ‘접합’ 시리즈 앞에서 휠체어에 앉은 화가 하종현(90). / © 아트선재센터
하종현은 1964-74년, 당시 우리나라 전위예술을 이끌던 핵심 그룹인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카뉴 국제 회화제 커미셔너, 43회 베니스 비엔날레 커미셔너,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 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하며 한국
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2004년 경남시립미술관, 2003년 밀라노의 무디마 파운데이션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고, 2012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진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