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조선 산수화 두루마리 전통을 재해석한 10미터 두루마리 형식의 박사논문(empty garden)이 15세기에 건립된 옥스퍼드대학교 유니버시티 교회(University Church of St Mary the Virgin)에 전시된 장면 (2020년) © 카이스트

미디어 아티스트 이진준의 옥스퍼드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빈정원 –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의 리미노이드 여행(Empty Garden – A Liminoid Journey to Nowhere in Somewhere)』(2020)이 영국 애쉬몰린 박물관(Ashmolean Museum)에 한국 현대 작가 최초로 정식 구입돼 영구 소장 및 전시된다.
 
애쉬몰린 박물관은 1683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대학 박물관으로, 루브르보다 110년, 대영박물관보다 76년 앞선 서양 지성사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작품을 소장한 이 기관이 생존 작가의 박사논문을 정식 구입해 영구 컬렉션에 포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다.
 
또한, 한국에서 출발한 예술·학문적 연구가 서구의 공적 지식 체계 안에서 장기적으로 보존·연구·전시되는 가치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AI 이후 시대에 예술과 인문학의 역할을 새롭게 묻는 한국의 연구가 국제 공공지식의 장에서 지속적으로 해석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도 상징성이 있다.


애쉬몰린 박물관 동아시아미술부 수장고에서 논문(empty garden) 검토 중인 애쉬몰린 박물관의 중국·한국 미술 담당 큐레이터인 옥스퍼드 대학의 셸라그 베인커(Shelagh Vainker) 교수 (2026) © 카이스트

이진준 교수의 논문 『Empty Garden』은 조선시대 문인들이 마음속에 그리던 ‘의원(意園, 실제가 아닌 마음속에서 상상으로 가꾸는 정원)’ 개념을 현대 디지털 기술로 재해석한 작품이자 연구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가 넘쳐나는 시대에 기술을 넘어 인간의 감각과 기억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
 
특히 이 논문은 ‘데이터 가드닝(data gardening)’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대신 정원을 가꾸듯 천천히 다루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벗어나 인간의 감각과 사유를 회복하려는 새로운 접근이다.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한지 두루마리 형식 또한 이 논문의 중요한 특징이다. 독자는 논문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되고, 동아시아 정원의 ‘거닐기’를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즉,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움직이며 느끼고 사유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특히 이 논문은 총 9개의 한지 두루마리로 제작됐으며, 이 가운데 하나가 애쉬몰린 박물관에 정식 구입돼 영구 소장·전시될 예정이다.


이진준 작가 © 카이스트

애쉬몰린 박물관의 엘리스 킹 중국·한국 미술 담당 큐레이터인 셸라 베인커(Shelagh Vainker) 옥스퍼드 교수는 “이진준 박사의 『Empty Garden』을 영구 컬렉션으로 소장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이 긴 사색적 두루마리는 재료와 기법, 그 안에 담긴 문화적·지적 지식의 폭과 깊이, 그리고 다양한 공간을 제시하는 복합적 구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고 평가했다.
 
이어 “『Empty Garden』은 애쉬몰린 박물관에 소장된 첫 번째 한국 현대 작가의 작품으로, 전시되지 않을 때에도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진준 작가는 옥스퍼드에서 논문을 집필하던 당시 다리 부상으로 휠체어 생활을 하며 ‘움직임과 멈춤’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밝혔다. 그는 “AI 시대에도 예술은 비물질적 이미지에만 머물 수 없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감각과 경험은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며 “데이터를 넘어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고 사유하는 새로운 감각 체계를 제안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서구 지성사의 대표적 박물관에 보관되면서 한국을 비롯한 동양적 사유가 AI 시대의 새로운 감각 체계를 잇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지속적으로 읽히고 논의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