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림(b. 1982)은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환경을 인터페이스로 삼아, 이를 웹과 도시로 설정하고 평면과 영상 작업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는 디지털 화면의 가장 작은 단위인 사각형의 픽셀과 위성지도로 내려다 본 도시 구조에서 추출한 기하학적인 도형을 조합하거나 반복시켜, 이 두 장소가 교차하는 풍경을 그린다.

추미림, 〈Pixel Space 001〉, 2007, 종이 판넬 위에 종이를 겹겹이 쌓아 만든 종이블럭, 목공용 풀, 아크릴, 펜, 50x50cm ©추미림

추미림의 초기 작업 ‘픽셀 스페이스’(2008-2013)’ 시리즈는 사전적인 의미의 픽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 작업은 한국을 떠나 파리에서 지내게 된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새로운 문화와 언어로 둘러싸인 낯선 환경 속에서 작가는 거대한 세계의 작은 점이 된 느낌을 받았고, 그의 작은 아파트가 오히려 넓게 느껴질 정도로 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추미림, 〈Pixel Space 002〉, 2007, 종이 판넬 위에 종이를 겹겹이 쌓아 만든 종이블럭, 목공용 풀, 아크릴, 펜, 50x50cm ©추미림

작가는 낯선 타지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인터넷 안에서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지만, 로그아웃을 하는 순간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감각에 공허함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에 대한 여러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픽셀 스페이스’는 개인의 모습을 작은 점(픽셀)에 투영하여 웹(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추미림은 온라인 스페이스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다양한 정보들을 자신만의 필터로 재해석하여 종이 위에 단순한 선 드로잉으로 옮기고, 그 위에 알록달록한 종이블록으로 만들어진 데이터 픽셀들을 겹쳤다.

추미림, 〈파리 15구〉, 2014, 종이 판넬 위에 종이를 겹겹이 쌓아 만든 종이블럭, 목공용 풀, 아크릴, 펜, 50x50cm ©추미림

2014년부터 추미림은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도시(분당, 서울, 파리, 베르사유)를 구글어스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시점으로 바라본 풍경을 담은 작업들을 선보였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그의 두 번째 개인전 《P.O.I (Point of Interest)》에서 처음 선보인 이 작업들은 도시에 대한 단순한 재현을 넘어 직접 경험한 기억이 함께 녹아 있는 작가만의 새로운 지도로 만들어졌다.

추미림, 〈양평동〉, 2014, 종이 판넬 위에 종이를 겹겹이 쌓아 만든 종이블럭, 목공용 풀, 아크릴, 펜, 50x50cm ©추미림

작가는 구글어스 프로그램을 통해 바라본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도시 풍경 속에서 조형미를 찾은 동시에, 자신이 거주한 도시들을 추억하며 느꼈던 감수성과 향수를 표현하고자 아날로그 방식으로 화면에 옮겼다. 그는 디지털 매체가 가진 차가운 감성을 중화시키는 재료로서 종이를 사용하였고, 이는 작품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성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오늘날 디지털화된 세상 속에서 기억과 추억은 디지털 데이터로 치환되어 파일로 저장되고 인터넷을 통해 공유된다. 시대가 변하고 추억하는 방식도 변화하는 현 시대의 환경안에서 추미림의 작업은 기억으로의 새로운 접속 시도라 할 수 있다.

《일렁이는 그리드에서 태어난 새로운 형태의 모듈》 전시 전경(트렁크갤러리, 서울, 2016) ©추미림

추미림은 2016년 트렁크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일렁이는 그리드에서 태어난 새로운 형태의 모듈》에서는 디자인 툴 바탕에 깔린 가상의 안내선인 ‘그리드’를 바탕으로 한 스텐실 작업들을 선보였다. 디자이너로도 활동해온 작가에게 그리드는 그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그의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과도 같다.

추미림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끝없이 생겨나는 도시의 빌딩들을 보며 웹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보들과 닮아 있음을 발견했다. 이에, 작가는 이러한 도시와 웹의 풍경을 그리드로 만들어진 모듈로써 표현하여 교차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추미림, 〈New Grid 001〉, 2016, 캔버스에 아크릴, 펜, 종이, 112.1x162.2cm ©추미림

작가는 이 작업에서 그리드를 유동적이고 변형 가능한 것으로 설정하고, 기하학적 유닛을 다양하게 접합시켜 새로운 형태의 모듈을 만들어 내는 조형적 실험에 몰두했다. 작품은 먼저 컴퓨터를 이용해 형태를 만들고,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 출력된 부분을 칼로 오려 낸 다음 아크릴 물감을 스폰지에 묻혀 찍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작가는 이미지의 틀인 스텐실 템플릿도 이와 함께 전시했다.

작품 속 마치 수면 위의 물결이 이는 것처럼 일렁이는 모듈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도시 풍경과 웹 상의 정보들의 유동적인 풍경과 닮아 있다.

추미림, 〈9가지 컬러 스펙트럼〉, 2019, 《두 개의 기둥과 일곱 개의 글자》 전시 전경(서울시립미술관, 2019) ©추미림

디지털 데이터의 유동성은 추미림의 작업에서 캔버스 프레임 안팎을 오가며 물리적 공간으로 뻗어 나가기도 한다. 가령,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두 개의 기둥과 일곱 개의 글자》에서 선보인 설치 작업 〈9가지 컬러 스펙트럼〉(2019)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데이터의 특성을 공간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작업이었다.

이 전시는 부동산 가격, 주가 변동 추이, 비트코인, 점성술, 명리학 등의 수치 자원 모두가 축적된 데이터와 통계를 근간으로 삼고 있으며 제한된 표본과 목적성 내에서만 유효함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현대 사회를 재고하고자 기획되었다. 여기서 작가는 암묵적으로 믿고 따르는 풍수지리의 요건과 기준이 시대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추미림은 전시장을 풍수지리의 요소에서 추출한 9가지 색의 스펙트럼으로 분할하고 데이터가 전송될 때 나타나는 전자파의 움직임과 용량을 차지하는 픽셀의 모양에 모든 스펙트럼을 중첩시켜 벽과 바닥에 이어 붙였다.

추미림, 〈횃불과 경사로〉, 2023, 《젊은모색 2023》 전시 전경(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3) ©추미림

추미림의 초기 작업은 자신이 살았던 도시들, 즉 그리움의 정서를 담고 있는 개인적인 장소들을 바탕으로 했다면, 이후에는 전시가 열리는 장소들의 지형적 특성과 그곳만의 풍경을 다루는 장소특정적 작업으로 확장되었다.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젊은모색 2023》에서는 위성에서 내려다본 과천의 지형과 지물, 작가의 작업실에서 과천관까지 이동하는 경로와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 도시간의 경계와 미술관의 내부 구조 등을 활용한 평면 및 영상 작업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중 〈횃불과 경사로〉(2023)는 기울어진 좌대 위에 설치되어 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위성의 시점처럼 작품을 내려다보며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이 작품 위로는 천장 프로젝터에서 영사된 여러 점들이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는데, 이 작은 픽셀 점들은 각자의 동선을 만들어 내며 미술관을 경험하는 작가 또는 관객을 상징한다.

추미림, 〈열매와 시냇물〉, 2023, 《젊은모색 2023》 전시 전경(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3) ©추미림

함께 선보인 〈열매와 시냇물〉(2023)은 위성 지도를 통해 바라본 과천의 모습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추출하여, 종이를 겹겹이 쌓아 미세한 두께의 부조로 표현한 작업이다. 전체적인 작업에 그려진 과천의 풍경들은 모두 위성으로 본 것처럼 축소되거나 내시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확대되어 나타난다.

축소와 확대의 시점, 디지털과 아날로그, 영상과 평면을 오가는 그의 작품들은 우리를 둘러싼 일상적 환경을 다시 새롭게 관찰하고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카오스 콩》 전시 전경(백아트 서울, 2023) ©백아트

추미림은 같은 해 백아트 서울점에서 열린 개인전 《카오스 콩》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데이터가 우리의 삶 전반에 녹아 들어 있는 데이터 중심사회의 일상을 다뤘다. 작가는 2022년에 발생한 판교 데이터 센터의 화재로 인한 서비스 장애를 경험하며, 구체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데이터들이 우리의 모든 일상에 연동되어 작동되고 있음을 체감했다.

당시 작가는 스마트폰과 연동된 데이터는 자신의 기억을 저장해주는 외부의 뇌이자 활동 범위와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막강한 장치가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면서 이에 대한 작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카오스 콩》 전시 전경(백아트 서울, 2023) ©백아트

이 전시에서 작가는 스스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서버 상의 오류인 ‘카오스 콩’이 되어 웹 상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데이터들을 전시장이라는 물리적 공간 안으로 불러 왔다. 작가는 우선 2001년부터 직접 생성하고 백업해온 데이터들의 변형/유실을 살펴보았고, 이 과정에서 불완전한 동기화로 백업되지 못한 파일들을 현실에 백업하는 행위로써 작품을 제작했다.

《카오스 콩》 전시 전경(백아트 서울, 2023) ©백아트

픽셀과 그리드를 활용한 회화, 콜라주, 그리고 영상 설치작업의 포맷으로 백업된 데이터들은 전시장에 모여 하나의 ‘데이터 도시’를 이룬다. 또한 작가는 영상작업과 이 영상작업의 스크린 샷을 평면으로 옮긴 작업을 짝지어 설치함으로써, 새로운 백업을 제안하고 데이터 중심사회의 일상을 환기하고자 했다.

이처럼 추미림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웹 기반의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의 형태를 들여다 본다. 작가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오가는 작업 방식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디지털의 보이지 않는 풍경을 가시화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유동적이고 불완전한 데이터로 연결된 우리의 일상을 새로운 감각으로써 인식하게 한다.

“매일 만나고 생활하는 일상적 표면을 웹과 도시로 설정하고 이 두 시스템을 감싼 인터페이스에 관심을 가진다. 두 장소의 유사성과 변화, 그 표면에서 느껴지는 디지털 노스텔지어와 도시적 감수성을 표현하고자 한다. (…)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지만 동시에 강력하게 제어하고 있는 구조와 그 속에 연동되어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추미림, 서울시립미술관 〈2024 난지액세스: 프리미어〉 인터뷰, 2024.07.30)


추미림 작가 ©리아뜰

추미림은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베르사유 보자르에서 수학했다. 이후 백아트(서울, 2023), 더그레잇컬렉션(서울, 2022), 갤러리룩스(서울, 2020), 트렁크갤러리(서울, 2016),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서울, 2014), 갤러리 스테프(싱가폴, 2013), 디 갤러리(서울, 2010)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작가는 디스위켄드룸(서울, 2024), 문화역 284(서울, 2023), 국립현대미술관(과천, 2023), 울산시립미술관(울산, 2022), 니콜라이 쿤스트홀(코펜하겐, 2019), 서울시립미술관(서울, 2018), 아트센터나비(서울, 2012), 일민미술관(서울, 2009)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추미림은 2024년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2019년에는 언노운 아시아 최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한화 드림하우스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