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학경,〈Other Things Seen, Other Things Heard〉, 1978. 차학경 기념재단 기증. / © BAMPFA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미술관·퍼시픽필름아카이브(BAMPFA)에서는 2026년 1월 24일부터 4월 19일까지 한국계 미국 작가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 1951–1982)의 회고전《Theresa Hak Kyung Cha: Multiple Offerings》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차학경을 다룬 25년 만의 대규모 미술관 회고전으로, 작가의 짧지만 밀도 높은 작업 세계를 미술사적 맥락 속에서 재조명한다.


차학경,〈Faire-Part〉, 1976, 잉크 및 활자 인쇄, 15개의 봉투. / © BAMPFA

전시는 텍스트 기반 작업, 영상, 퍼포먼스, 설치, 출판물 등 차학경의 다매체적 실천 전반을 아우르며, 약 100여 점의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1970~80년대 미국 실험미술 현장에서 차학경이 차지했던 위치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BAMPFA는 1992년 차학경 기념재단으로부터 작품과 아카이브를 기증받아 온 주요 소장 기관으로, 이번 전시는 그 축적된 자료를 본격적으로 공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차학경,〈Repetitive Pattern〉, 1975. / © BAMPFA

비선형 서사와 ‘다중 제공’의 방법론
 
차학경은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UC버클리에서 미술, 비교문학, 영화를 공부하며 시각예술과 언어, 움직임을 넘나드는 작업 방식을 구축했다. 그의 작업에서 핵심은 완결된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의미 생성의 조건 자체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 차학경은 이를 ‘Multiple Telling with Multiple Offering(다중 서술과 다중 제공)’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차학경,〈눈 먼 목소리(Aveugle Voix)〉, 1975.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그릭 시어터에서 진행된 퍼포먼스 리허설 기록.
차학경은 1975년 퍼포먼스〈눈 먼 목소리〉를 선보였다.『딕테』번역자 김경년은 차학경이 자신의 이력서에 스스로를 ‘프로듀서, 디렉터, 연기자, 비디오와 필름 제작 작가, 설치미술, 행위예술 및 출판 작가’로 기재했다고 전한다. 사진: 트립 캘러핸 / © BAMPFA

이번 회고전은 이러한 작가의 방법론을 전시 구성의 원리로 차용한다. 관람 동선은 단선적 연대기를 따르기보다, 기억, 망명과 이주, 언어의 불안정성, 역사와 신화, 여성의 목소리 등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를 통해 관람자는 차학경의 작업을 하나의 해석으로 수렴하기보다, 서로 다른 진입점과 독해의 가능성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1982년에 출간된 『딕테』. 이 책의 출간 직후 차학경은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딕테』를 통해 차학경은 이른바 ‘작가의 작가’로 자리매김했으며, 미술, 문학, 영화 분야의 연구자와 창작자, 그리고 아시아계 미국인을 포함한 다양한 독자층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 © BAMPFA

언어, 몸, 역사 사이의 긴장

차학경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딕테(Dictée, 1982)』는 문학 작품이자 시각적·개념적 작업으로, 프랑스어 받아쓰기 형식을 차용해 언어 훈육, 식민의 역사, 여성 서사를 교차시킨다. 이 책은 출간 이후 현대 문학과 미술, 탈식민 연구, 페미니즘 이론에서 지속적으로 참조되며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아 왔다.
 
전시에서는『딕테』와 더불어 퍼포먼스 작업〈눈 먼 목소리(Aveugle Voix)〉(1975), 필름과 텍스트를 결합한 설치 작업, 초기의 섬유 및 도자 작업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작업들도 함께 소개된다. 이는 차학경의 실천이 특정 장르나 형식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언어와 몸, 기록과 수행 사이의 긴장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음을 드러낸다.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 Avant Dictée〉전시 설치 전경, 2018, 버클리미술관·퍼시픽필름아카이브(BAMPFA). © BAMPFA

미국 실험미술사 속의 차학경
 
차학경은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중심으로 전개된 개념미술, 실험영화, 퍼포먼스 아트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서구 중심의 개념미술 언어를 단순히 수용하기보다, 이주와 디아스포라의 경험, 다언어 환경,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을 교차시키며 고유한 문제의식을 형성했다.
 
이번 전시는 차학경의 작업을 고립된 개인적 서사가 아니라, 동시대 예술가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조망한다. 전시장에는 차학경과 동시대에 활동했거나 그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배치되어, 그의 작업이 이후 세대에 남긴 사유의 흔적을 가시화한다.
 
차학경은 생전 미술 제도 안에서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사후 그의 작업은 문학, 미술, 문화이론 전반에서 점차 중요성을 인정받아 왔다. 이번 BAMPFA 회고전은 차학경을 ‘경계적 존재’나 ‘비운의 작가’로 소비하기보다, 동시대 미술의 형식과 언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한 실천가로 위치 짓는 데 초점을 둔다.
 
전시 기간 동안『딕테』낭독회, 학술 심포지엄, 필름 상영 등 연계 프로그램이 함께 진행되며, 20여 년 만에 첫 미술관 단행본 도록도 발간된다. 이는 차학경의 작업을 다시 읽고, 오늘의 동시대 미술 담론 속에서 그 의미를 재검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차학경 (1951-1982) 의 생전 모습 / © BAMPFA

Theresa Hak Kyung Cha (차학경, 1951–1982)
 
Theresa Hak Kyung Cha (차학경, 1951–1982)은 한국 부산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한국계 미국 작가이자 예술가이다. 1961년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한 뒤, 1964년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거치며 디아스포라적 삶의 조건 속에서 성장했다.
 
부모 세대 역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이주와 유랑의 역사를 경험했으며, 이러한 가족사는 차학경의 예술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차학경은 11세에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서 예술과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이후 프랑스에서 영화 이론을 공부했다.
 
차학경은 문학, 실험영화, 사진,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언어와 기억, 역사와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한 작가로 평가된다. 대표작『Dictée』는 유관순과 잔 다르크, 그리고 자신의 가족사를 교차시키며 식민의 역사와 여성의 목소리를 전위적인 서사 구조로 풀어낸 작품으로,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이론적·문학적 텍스트로 다뤄지고 있다.
 
1982년,『Dictée』출간 직후 차학경은 뉴욕에서 폭력적인 사건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잔혹한 사건이 예술적 성취를 가릴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 오랫동안 적극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작가의 작업 역시 일정 기간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차학경의 작업은 이후 지속적으로 재조명되며, 동시대 예술에서 언어와 서사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확장한 핵심적 실천으로 자리하고 있다. 차학경의 예술은 개인적 비극에 환원되기보다, 기억과 이주, 언어의 불안정성을 사유하는 예술적 실천으로 오늘날 다시 읽히고 있다.



전시 정보
 
전시명:《Theresa Hak Kyung Cha: Multiple Offerings》
작가: 차학경 (Theresa Hak Kyung Cha, 1951–1982)
전시 기간: 2026년 1월 24일 – 2026년 4월 19일
전시장소: 버클리미술관·퍼시픽필름아카이브 (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 BAMPFA)
전시 성격: 회고전
전시 내용: 텍스트 기반 작업, 영상, 퍼포먼스, 설치, 출판물 등 약 100여 점의 작품 및 아카이브 자료
주요 연계 프로그램:『딕테(Dictée)』 낭독회, 학술 심포지엄, 작품 상영회
전시 도록: 20여 년 만에 발간되는 첫 미술관 단행본 도록
주관: 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
후원: 한국국제교류재단(KF)
웹사이트: https://bampfa.org/program/theresa-hak-kyung-cha-multiple-offer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