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크 브래드포드, 〈떠오르다(Float)〉 작품 전시장면, 2019, 혼합 재료 ⓒMark Bradford

마크 브래드포드, 〈떠오르다 (Float)〉 작품 전시장면, 2019, 혼합 재료 (부분) ⓒMark Bradford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업은 종종 “사회적
추상”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하지만 이 용어는 추상이라는
개념의 기초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윤리적·정치적 함의를 반쯤
지운 채 제도적 언어로 중화된 형태에 가깝다. 추상은 본래 서사와 맥락을 제거하는 방향에서 성립한 개념임에도, Bradford의 표면에는 특정 지역의 인종·계급·도시 구조가 직접적 흔적으로 남는다.
이 흔적들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특정 사회의 리얼리티를 담고 있는 정보의 잔해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추상적 구성으로 재배치된 순간, 내용은 흐릿해지고 의미는 암호화되며 정치적 급진성은 제거된다.
결국 그의 작업은 추상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정치적 실천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무해하다. 이 모순적 공간이
바로 Bradford의 작업이 놓인 자리이며, “사회적 추상”이라는 개념은 그 불안정함을 덮는 제도적 수사에 불과하다.
조형적 밀도의 결여
그의 작업이 시각적으로 강한 첫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각적 충격은 작품의 구조적 완성도를 대체할 수 없다.
Bradford의 표면은 매번 비슷한 방식의 긁기, 찢기,
중첩으로 구축되며, 이 과정은 의도보다는 재료의 우발성에 더 가까운 형태로 굴러간다.
대작의 규모는 작업을 ‘혹시나’ 더
깊어 보이게 하지만, 실제로 세부로 들어가는 순간 조형적 판단은 느슨하고 반복적이다. 추상회화가 역사적으로 쌓아온 구조적 긴장과 색면의 조직력은 그의 작업에서 주요한 요소로 작동하지 않는다.
(좌) 〈변화보다 눈물이 쉽다〉,
2024, 캔버스에 혼합재료 / (우) 〈심장이
뛰는 쪽〉, 2024, 캔버스에 혼합재료 ⓒMark Bradford이러한 특성은 Bradford의
작업을 ‘확장된 추상회화’로 해석하는 일반적 담론이 실제
작품의 조형적 무게를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표피의 복잡성이 곧 조형적 깊이는 아니며, Bradford의 작업은 이 간극을 충분히 메우지 못한다.
낡은 담론의 재배열
Bradford의 작업을
혁신적이라고 설명하는 미술계의 언어는 1990–2000년대 미국 미술의 전개를 과도하게 망각하고 있다.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전시 전경(휘트니 미술관, 뉴욕, 1993년 2월 24일–6월 20일).아이더 애플브룩, ‘Marginalia 시리즈’(1992);
아이더 애플브룩, 〈Jack F: Forced to Eat His Own Excrement〉(1992);
아이더 애플브룩, 〈Kathy W.: Is Told that If She Tells Mommy Will Get Sick and Die〉(1992). / 사진: 제프리 클레멘츠.
이 설치 작업은 흑인 인종캐릭처, 민속적 이미지, 역사적 고정관념을 소재로 삼아 미국 사회에 내재한 인종주의적 시각문화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벽면의 대형 페인팅과 바닥에 흩어진 패널들은 만화적·민속적 이미지, 인종적 스테레오타입, 과거의 우스꽝스럽게 왜곡된 흑인 재현을 반복적으로 배치해 관람자가 그 사이를 걸어 다니며 이 시각적 폭력의 구조를 직접 마주하게 만든다. 작품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흑인 정체성이 어떻게 왜곡·재현·소비되어 왔는지를 공간 전체의 구성으로 체험하게 하는 비판적 설치다.
미국의 제도와 비평계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인종, 도시 폭력, 빈곤, 계급
분열,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핵심 의제로 삼아왔으며,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그러한 문제를 전면화한 대표적 사례였다. 이 시기 다수의 작가들은 사회적 구성과 폭력의 구조를 추상·도식·기호·물질적 흔적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실험했다.

데이비드 해먼스, 〈Oh Say Can You See〉, 2017 / 출처: 피노 컬렉션
이 작품은 미국 국기의 색을 흑인 해방운동의 색으로 치환하며 미국적 정체성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다. 빨강은 흑인 공동체가 겪어온 피와 폭력의 역사, 검정은 흑인의 몸·정체성·존재의 정치성, 초록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미래·희망·생명성을 의미한다. 찢기고 훼손된 표면은 이러한 역사적 상흔을 물질적으로 드러내며, 이 작업은 흑인 개념미술이 국가 상징을 전복한 가장 강력한 장면으로 평가된다.
특히 데이비드
해먼스(David Hammons), 베티 사(Betye Saar) 같은
흑인 작가들은 브래드포드보다 훨씬 이전부터, 구조적 인종주의·도시의
균열·흑인 커뮤니티의 기억과 폭력을 회화적·조각적·콜라주적 언어로 재구성하는 전략을 구축해왔다.
예를 들어 해먼스는 도시의 폐기물, 신체의 흔적, 거리의 사물을 정치적 기호로 전환하며, 제도 비판과 흑인 정체성의 감각성을 전면화했으며, 베티 사는 흑인
여성의 역사·가족·민권운동을 어셈블리지로 구성하며 인종주의적
상징의 전복을 일찍이 시도했다. 이들의 작업은 단순히 특정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힘과 폭력, 공동체의 기억을 구조적
형식으로 변환하는 조형 언어를 이미 완성해 놓은 선례였다.

마크 브래드포드 개인전 전시 광경 ⓒAPMP
이런 계보를 고려하면, 브래드포드의
작업이 다루는 주제—도시의 균열, 인종정치, 흑인 커뮤니티의 역사적 잔여—는 새로운 제안이라기보다 이미 제도적으로 승인된 담론의 재가공에
가깝다. 그의 작업은 추상과 사회적 현실을 결합하지만, 그것은
수십 년 동안 축적된 흑인 예술 실천의 언어적·물질적 장치를 반복하는 형태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브래드포드는 혁신의 전위라기보다, 이미 형성된 계보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시장적·정치적 재맥락화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정치성의 안전화와 제도적 편의성
흔히 Bradford의
작업은 인종과 계급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정치적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실제로 수행하는 정치성은
제도적 요구에 충실하게 조정된 형태다. 갈등은 구조적 흔적으로 약화되고, 폭력은 추상적 패턴 속에 흡수되며, 메시지는 모호한 은유로 분산된다.

〈명백한 운명〉, 2023, 캔버스에 혼합재료 ⓒMark Bradford
미국 도시 개발의 현실과 그 속에 작동하는 자본권력의 구조를 드러낸 작품이다.
이러한 방식은 정치적 급진성을 제도미술관이 수용하기 쉬운 ‘미적 신호’로 변환한다. 이는
오늘날 글로벌 미술 제도가 선호하는 방식—정치적 내용을 품고 있지만,
실제 비판성은 제거된 형태—과 정확히 겹친다. 따라서
Bradford의 작업은 그 속에서 ‘위험하지 않은 정치성’, 즉 소비 가능한 급진성을 제공한다.

마크 브래드포드,《Keep Walking》전시 전경 ⓒAPMP
경계에 머물러 있는 작가
Bradford는 흔히
추상과 정치의 경계를 확장했다고 평가받지만, 실제로 그의 작업은 그 경계를 넘어서기보다 그 경계에 머물며
안전하게 균형을 유지한다. 추상의 개념과 충돌하는 사회적 흔적, 조형적
완성도의 불균형, 선행된 담론의 반복, 제도적 소비에 최적화된
정치성—이 네 가지 요소는 그의 작업이 ‘새로운 언어’가 아니라 제도적 요구에 의해 조율된 언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이번 브래드포드의 전시를 비평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그의 작업 자체를 넘어서, 오늘날
미술 제도가 ‘정치적’이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소비하고 무엇을
제거하는지, 그 구조를 드러내는 행위의 이면에 존재하는 맥락이 무엇인지 엿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며, 이것이야 말로 이번 전시를 통해서 우리가 던지고 고민해 봐야 할 본질적 질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 정보
전시 제목 :《Mark
Bradford: Keep Walking》
전시 기간 : 2025.08.01.(금) – 2026.1.25.(일)
전시 장소 : Amorepacific Museum of Art,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100
관람 시간 : 휴관일: 화–일 10:00–18:00, 월요일 및 1월 1일, 설·추석 연휴 휴관
전시 구성 : 회화, 설치, 영상작품
포함 약 40점. 대표작으로는 2005년작〈Blue〉,〈Niagara〉, 2019년 설치작〈Float〉등이 포함되며, 미술관을 위해 제작된 신작 시리즈 포함.
입장료 : 성인 16,000원
(청소년·대학생 등 할인 요금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