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부터 2007년 전까지 이뤄졌던 제3차 한국 미술 시장 호황기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화했다. 이 당시는 국내 미술 시장이 모든 면에서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었던 시기였다.
Seo Taiji and Boys (서태지와 아이들), a South Korean boy band active from 1992 to 1996. Image by Ilyo shinmun.
1990년대 말부터 2007년 전까지 이뤄졌던 제3차 한국 미술 시장 호황기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화했다.
1970년대 1차 호황기는 오늘날 미술 시장 구조가 형성되던 시기였으며, 1990년대 초까지 진행되었던 2차 호황기는 미술 시장이 조금씩 성장하던 시기였다. 3차 호황기는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국내 미술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었던 시기다.
국내 미술 시장 제 3차 호황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요약하자면 이렇다. 국내 미술계에 경매 시장 구조가 형성되고 갤러리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서울 특정 지역에만 집중되어 있던 갤러리 권역이 다양해졌다. 갤러리들은 해외 진출이 활발해졌고, 국내외에서 한국 미술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미술계에서 인정 받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 작가들은 국제 비엔날레와 아트 페어에 진출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국내 컬렉터와 미술 애호가들의 저변 또한 더욱 넓어졌다.
1990s in Seoul. Image by Yonhap News.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미술 시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하나 꼽자면 경매 제도의 도입이다. 가나아트는 1998년 서울옥션을 설립했다. 갤러리 현대는 2005년 케이옥션을 설립했다. 지금 이 두 경매 회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양대 경매 회사로 자리 잡았다.
현대 미술을 다루는 전문 경매 회사의 등장은 한국 미술 시장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한국 미술 시장은 불투명한 가격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경매 제도의 도입이 한국 미술계에 만연했던 이중 가격제와 호당 가격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공개 경매를 통해 미술품의 가격이 공개되면 작품 가격이 합리화되는 동시에 일원화되지 못한 복잡해진 시장의 질서를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의 등장이 한국 미술 시장에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한국 미술 시장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구조는 더욱 복잡해지기도 했다.
이상적인 미술 시장 구조는 갤러리와 경매 회사 간의 균형 있는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은 모두 국내 유명 갤러리들이 설립한 경매사다. 갤러리와 경매사의 분리가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가격 담합, 불투명한 가격 구조, 블루칩 작가에 대한 시장 집중, 신진 작가 작품의 급격한 가격 상승 등의 문제가 발생해 시장에 혼란을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경매 회사의 진입은 한국 미술 시장에 큰 역할을 했다. 두 경매 회사의 등장을 통해 한국 미술 시장의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고, 1차 시장과 2차 시장이라는 구조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 Seoul Auction.
미술 경매 시장의 등장은 미술에 대한 수요 증가를 의미하기도 했다. 작품을 구매하려는 컬렉터들이 늘면서 유명 작가의 작품에 중점을 둔 수요가 젊은 작가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수요는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국제 미술 시장도 급성장하면서 2000년대부터, 젊은 한국 작가들은 국제 미술 시장에 활발히 진출했다.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미술 시장이 급격한 성장을 이루면서 홍콩의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현대 미술의 참여도가 점차 증가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열렸던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는 한국 현대 미술 작품 8점이 경매되어 14만 3,000달러의 낙찰 총액을 올렸다. 이듬해인 2005년 가을에는 25점이 78만 9,000달러에 판매되어 한국 현대 미술품의 낙찰 총액이 5.5배 늘었다. 2006년 봄에는 32점 중 29점이 판매되었으며 대부분이 높은 추정가를 넘는 가격에 낙찰되었다. 당시 김동유, 백남준, 최소영 작가의 작품이 한국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해외에서 1억 원 이상에 낙찰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Hong Kyoungtack, 'Pens,' 2001-2010, Oil on linen, 102 x 305.5 in.
해외에서는 아트 페어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국내 작가들이 해외에 진출하는 경우도 증가했다. 1994년 신진 작가들을 주로 다루었던 뉴욕의 아모리쇼가 열리기 시작했고, 2003년에는 10만 불 이하의 작품을 중심으로 시작한 런던의 프리즈가 등장했으며 중국에는 국제 아트 페어들이 개최되었다.
국내 갤러리들은 이러한 국제 아트 페어에 참여하면서 국제 미술계 진출을 꾀했다. 국제 아트 페어의 참가 기준을 충족하는 국내 갤러리도 늘어나, 2003년 14개에서 2005년 29개로 증가했다. 당시 아트 페어나 경매 시장에서 인기를 누렸던 한국 작가로는 함섭, 전광영, 정광호, 함진, 김동유, 홍경택 등이 있다.
1990년대 말은 국내외 비엔날레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 당시 다양한 국가에서 비엔날레가 설립되기 시작했는데, 국내에서는 1995년 아시아 최초로 광주비엔날레가 출범했고 한국 밖에서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이 세워졌다. 국내외 비엔날레를 통해 글로벌 미술 무대에서 주목받는 국내 작가가 증가했는데 대표적으로 백남준, 이불, 서도호, 김수자, 이상남, 이기봉, 고영훈, 김홍주, 조덕현 작가가 있다.
© K Auction.
2000년대 초는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미술 시장이 호황기였다. 많은 작품이 거래되면서 미국 미술 시장은 규모 30조 원을 달성했다. 국내 미술 시장은 2007년 6,000억 원대까지 올라갔다. 2004년 국내 미술 시장의 규모가 2,800억 원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성장이었다. 하지만 미술 시장의 폭발적 성장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자, 사람들은 현금 확보를 위해 작품을 내다 팔기 시작했고, 이는 미술품 공급 과잉과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다.
미술 전문가들은 2008년 경제 위기로 인한 미술 시장 침체가 2020년에서야 회복세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2022년 한국 미술 시장 규모는 빠르게 성장하여 1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2022년 말부터는 국내외 미술 시장이 모두 조정기에 접어들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암호화 폐, 주식, 부동산으로 갑작스럽게 부를 모은 사람들이 급증했고, 이들이 미술품 사재기를 하면서 미술 시장은 활기를 보였다. 하지만 미술 시장은 다시 거품이 빠지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미술 시장은 지난 미술 시장의 흐름을 반복하지 않고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지난 세 차례의 호황기의 패턴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며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