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 시장은 1970년대부터 약 10년 주기로 네 차례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거쳐왔다. 이번 글에서는 첫 번째 파도가 일었던 1970년대의 한국 미술 시장을 살펴본다.

Kiaf SEOUL 2023. Photos by Kiaf SEOUL Operating Committee. Courtesy of Kiaf SEOUL.

최근 몇 년 사이에 미술 시장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미술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지만 대중의 관심은 오히려 높아진 듯 하다. 일례로 지난 9월 초에 개최된 키아프 서울에는 지난해 7만 명보다 15% 늘어난 8만여 명이 방문했다.

이는 미술품 투자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투자를 위한 시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가격 지수와 더불어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 미술 시장의 흐름을 파악해 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한국 미술 시장은 나름대로의 역사를 쓰며 어떠한 패턴을 그려왔다. 따라서 과거 미술 시장에 대한 지식을 통해 앞으로의 시장을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미술 시장은 1970년대부터 약 10년 주기로 네 차례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거쳐왔다. 첫 번째 파도는 1970년대, 두 번째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세 번째는 2007년 전후였다. 가장 최근인 파도는 2021년에 정점을 찍었다. 


The sign in front of the relocated Ministry of Culture and Communications building in 1986, Seoul. ⓒeHistory.

1970년대는 매우 기초적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 시장의 기본 구조가 형성되고 미술품이 상품으로 인식된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1970년대 전후로는 한국 경제가 크게 확장되던 시기였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한국은 고도성장을 경험했고 당시 문화예술은 독재 정부의 체제유지, 민족사관 정립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정치 전술로 이용되기는 했지만 한국 문화예술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정부적 차원에서 1968년에는 문화공보부가 발족되었고, 1972년 8월에는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었다. 또 1974년에는 제1차  문예중흥 5개년 계획(1974~1978)이 수립돼 250억 원의 예산이 문화예술 분야에 책정되었다. 이중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투자가 70% 이상을 차지하긴 했지만 현대미술, 음악, 영화, 출판, 문학 등에 대한 지원이 이뤄졌고, 이와 함께 전 국민의 문화생활을 위해 문화시설을 확충하는 등 창작자와 향유자를 모두 포함한 문화예술 인구가 확대되었다.

특히 1970년대 초에는 현대적 의미의 갤러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반도화랑 직원이었던 박명자와 한용구가 인사동에 문을 연 현대화랑(현 갤러리 현대)은 본격적으로 근현대 미술품을 중개한 갤러리였다. 이 당시 경제적 성장은 신흥 부르주아 계층을 성장시켰으며, 돈이 몰리자 현대화랑을 필두로 인사동에 화랑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Exterior view of Hyundai Hwarang (current Gallery Hyundai), Seoul. Courtesy of the gallery.

그런데 현대적인 의미의 미술 시장은 단순히 갤러리와 컬렉터라는 공급과 수요의 구조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미술 작품을 만드는 작가, 이를 향유할 수 있는 컬렉터뿐만 아니라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미술 기관, 갤러리, 평론가, 기획자 등 다양한 역할도 있어야 제대로 작동한다. 

1970년대는 그중에서 비평가의 역할이 크게 성장한 시기였다. 이때 미술과 관련한 다양한 출판물이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계간 미술”, “미술과 생활”, “디자인”, “미술 춘추” 등의 잡지를 통해 비평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비록 단선적이기는 하지만 작가, 갤러리, 비평가를 포함한 한국 미술 시장의 구조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현대화랑이 개관한 후 명동화랑(1970), 서울화랑(1970), 조선화랑(1971), 진화랑(1972), 동산방화랑(1976), 선화랑(1976), 송원화랑(1977) 등이 등장했다. 1976년에는 12개의 화랑을 중심으로 한국 화랑 협회가 발족했고 1978년에는 협회 회원 화랑이 26개로 늘었다. 1970년대 이후부터 1990년대 초까지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는 5~6만 건으로 공공기관을 포함해 개최된 총 전시의 거의 90%를 차지했을 만큼 갤러리가 크게 성장했다.


Park Soo Geun, ‘Tree and Two Women (나무와 두 여인),’ 1962, Oil on canvas, 130 x 89 cm. Leeum Museum of Art Collection.

하지만 화랑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저렴했던 작품 가격이 1970년대부터는 급등했고, 이러한 변화로 인해 사람들은 미술품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당시 일반 회사원의 월급이 40~50만 원이었고, 197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 해 작품 구입비가 1,000만 원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인기 동양화 작가였던 이상범의 산수화 대작이 2,000만 원까지 올랐을 만큼 당시 미술 시장은 과열 상태였다.

미술품 가격 급상승이 일어나자 경제발전으로 나타난 신흥 부자들이 미술품을 사재기하는 현상이 생겼다. 이 당시만 해도 미술계 주류는 동양화였으며, 근대 미술 또는 서양화에 대한 선호도는 비교적 낮았다. 하지만 유화인 구상화 또는 반추상 작품을 중심으로 서양화 판매도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증가했다. 

특히 당시에는 대체로 한국적 요소를 담은 추상화가 주목을 받으며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변종하, 권옥연 등과 같은 작가들이 인기를 끌었다. 박수근의 작품은 1978년에는 호당 100만 원 이상, 이중섭은 호당 200만 원, 김환기는 호당 30만 원에 가격이 형성되어 있었다.


Lee Jung-Seob, ‘White Ox,’ 1954, Oil painting on wooden panel, 30cm × 41.7cm, Hongik University Museum Collection, Seoul, Korea.

미술 시장에 많은 돈이 몰리면서 1970년대 후반 한국은 단군 이래 처음 겪는 미술 호황기를 맞이한다. 당시 다방이나 옷 가게에서도 작품을 거래할 정도로 활발하게 작품 거래가 이뤄졌다. 하지만 1979년 갤러리에 대한 세무 조사가 실시되면서 1970년대 한국 미술 시장의 호황기는 막을 내렸다. 

1970년대 한국 미술 시장은 단선적이지만 근대적인 구조의 미술 시장이 형성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 체계적으로 미술품 가격을 형성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작가들이 갤러리를 거치지 않고 컬렉터와 직거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직 국내에는 작품 가격을 형성할 수 있는 경매 회사가 부재했으며,  크기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관행이 생겼다. 또한 작가가 스스로 자기 작품 가격을 결정하고 갤러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작품을 판매하면서 한국 미술 시장의 올바른 구조를 잡는 데 혼란이 생겼던 시기이기도 했다.

References
  • 국사편찬위원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두산동아 (2008), p. 238-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