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의 야외 데크에서 거대한 조각이 사라지고 정원이 들어섰다. 리움미술관은 2026년 4월 3일부터
멕시코 출신 작가 가브리엘 오로즈코(Gabriel Orozco, b.1962)가 구상한 장소특정적 설치
작품〈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을 공개하고 있다.

리움미술관의〈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전경 / 사진: 리움미술관
약 1,650㎡ 규모의 야외 데크 전체를 정원으로 바꾼 이번 프로젝트는
리움미술관이 2004년 개관한 이후 처음 시도한 프로젝트이다. 미술관
개관 시간 동안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수직적 기념비에서 수평적 환경으로
리움미술관의 야외 데크는 지난 20여 년 동안 미술관을 상징하는 대형
야외조각이 자리해온 공간이었다. 알렉산더 칼더의〈거대한 주름〉이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루이즈 부르주아의〈엄마〉가 2005년부터 2012년까지, 아니쉬
카푸어의〈큰 나무와 눈〉이 2012년부터 2023년까지 이곳에
설치되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마망〉(앞),〈스파이더〉(뒤). / 사진: 리움미술관

애니시 카푸어의 작품〈큰 나무와 눈〉/ 사진: 리움미술관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은 하나의 거대한 오브제를 세우는 대신 바닥과 길, 돌과
식물, 벤치와 건축, 관람객의 움직임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끌어들인다. 시선은 위로 솟은 조각에서 발밑의 돌과 식물, 수평으로
이어지는 길과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내려온다. 조각이 하나의 물체에서 신체와 시간, 공간을 조직하는 수평적 환경으로 확장된 것이다.

리움미술관의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 전경 / 사진: 리움미술관
열 개의 원이 만드는 공간의 리듬
정원은 오로즈코의 작업에서 지속해서 나타나는 원의 모티프를 바탕으로 설계되었다.
하나의 원에서 출발한 기하학적 배열이 데크 전체로 확장되고, 크고 작은 원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플라자 1’부터 ‘플라자 10’까지 열 개의 연속된 공간을 만든다. 각 플라자는 바닥 패턴과
식재, 벤치의 형태와 배치를 달리해 하나의 정원 안에서도 서로 다른 공간적 리듬을 형성한다.
정원의 바닥에는 충남 보령에서 채석한 보령석이 사용되었다. 기존 데크
바닥에 깔려 있던 자라목 목재는 폐기하지 않고 인접한 건축물의 외벽 마감재로 재활용했다. 새로운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기존 공간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기보다, 장소가 축적해온 물질을 새로운 구조 안에 다시
포함한 선택이다.
세한삼우가 만드는 살아 있는 조각
정원의 식물학적 골격은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나무로 구성된다. 소나무 17주와 매화나무 11주, 대나무 약 1,500주가 식재되었으며, 백당나무와 설유화, 찔레나무, 물매화
등 흰 꽃이 피는 식물들이 더해졌다.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는 추운 겨울을 견디거나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는
점에서 ‘세한삼우(歲寒三友)’,
즉 ‘추운 계절의 세 벗’으로 불린다. 오로즈코는 이를 자신의 정원 작업에 도입해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를
식물학적 골격이자 개념적 구조로 삼았다.

리움미술관의〈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전경 / 사진: 리움미술관
런던과 멕시코시티에서 서울로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은 작가가 지난 10여 년 동안 진행해온
장소특정적 정원 프로젝트의 세 번째 작업이다. 첫 번째는 2016년
완성된 영국 사우스 런던 갤러리의 영구 정원이다.
오로즈코는 6a 아키텍츠와 영국 왕립식물원 큐의 원예 전문가들과 협업해
갤러리 뒤편의 접근하기 어려웠던 포장 공간을 정원으로 바꾸었다.

2016년 완성된 영국 사우스 런던 갤러리의 〈영구 정원〉 / 사진: 사우스런던갤러리
벽돌과 요크석으로 만든 원형 구조는 여러 개의 작은 공간과 통로를 형성했고, 인근
공공주택 단지인 소 가든스(Sceaux Gardens)의 주민들이 갤러리로 접근할 수 있는 식재 보행로도
포함했다. 정원은 조각 작품인 동시에 앉고, 먹고, 놀고, 다른 작가의 작업을 선보일 수 있는 공동체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두 번째는 멕시코시티의 차풀테펙 자연·문화 프로젝트다. 오로즈코는 2019년부터 프로젝트의 크리에이티브 코디네이터로서 약 5년에 걸친 장기 계획을 이끌었다.
거의 800헥타르에 이르는 차풀테펙 공원의 네 구역을 연결하고, 자연환경과 기존 문화시설을 복원하는 한편 새로운 문화 공간과 보행 연결 체계를 조성한 대규모 프로젝트다.

(왼쪽) 가브리엘 오로즈코, (오른쪽) 멕시코시티 차풀테펙 공원 / 출처: 화이트 큐브 페이스북 캡처. 가브리엘 오로즈코 초상 © 작가. 사진: 빅토르 베니테스. 작가 제공. 차풀테펙 공원 전경 © 마르가리타 고르베아, 차풀테펙 CDMX. 작가 제공.
오브제보다 관계에 주목해온 작가
가브리엘 오로즈코는 1990년대 초부터 사진과 조각, 드로잉, 회화, 설치를
넘나들며 활동해왔다. 그는 특별한 미술 재료나 거대한 제작시설보다 거리와 작업실, 여행지에서 발견한 사물과 흔적, 우연한 상황과 일상적인 움직임에
주목해왔다.
오로즈코의 작품은 익숙한 사물을 완전히 새로운 대상으로 바꾸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사물과 환경을 약간 이동시키거나 절단하고 배열함으로써 관람자가 그것을 다시 보게 만든다.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독립적인 오브제의 완결성보다 사물과 신체, 장소와 시간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다.

《Gabriel Orozco》전시 전경. 가브리엘 오로즈코, 〈Working Tables, 2000–2005〉, 2005. 뉴욕 현대미술관(MoMA), 2009년 12월 13일–2010년 3월 1일. / 사진: Jonathan Muzikar.

《Gabriel Orozco》전시 전경, 뉴욕 현대미술관(MoMA), 2009년 12월 13일–2010년 3월 1일. / 사진: Jonathan Muzikar.

가브리엘 오로즈코,〈Penske Works〉,〈Dent de Lion〉,〈Pinched Star〉, 모두 1998. 설치 전경. / 사진: Sculpture 매거진
미술관은 왜 조각 대신 정원을 만들었는가
과거 리움 야외 데크의 조각들은 거대한 물체를 통해 미술관의 존재와 상징성을 드러냈다. 칼더와 부르주아, 카푸어의 작품은 멀리에서도 인식할 수 있는 강력한
시각적 중심이었다. 반면 오로즈코의 정원에는 한눈에 전체를 지배하는 중심적 오브제가 없다. 그 자리는 길과 식물, 벤치와 사람, 계절과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기념비적 조각이 사라진 자리에 만들어진 것은 조각이 없는 정원이 아니다. 정원
전체가 하나의 수평적 조각이다. 바닥의 기하학과 식물의 생장, 관람객의
움직임과 공간을 유지하는 관리의 과정까지 작품의 조건 안에 포함된다.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은 조각의 소멸이 아니라 조각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체로서의 조각이 사라진 자리에는 길과 식물, 사람과 시간이 새로운
조각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 Gabriel Orozco Garden〉
- 기간: 2026년 4월 3일–
- 장소: 리움미술관 야외 데크
- 형식: 장소특정적 상설 설치
- 관람료: 무료
- 이용 시간: 리움미술관 개관 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