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 부산점, 2025년 7월 20일까지 개최, 같은 시기 美 피바디에식스박물관에서도 개인전 열려

국내 대표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가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을 열고 있다. 17년 만의 국제갤러리 개인전이자, 부산에서 오랜만에 선보이는 대규모 신작 개인전이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 국제갤러리 제공

사진, 영상, 설치,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일상의 파편을 유머와 염원의 감각으로 되살려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도 독창적인 접근으로 삶의 불완전함과 조화를 탐색한다.
 
이번 전시는 블루스 음악과 발효의 리듬이라는 두 이질적인 소재를 중심축으로 삼아,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자조적이고도 따뜻한 시선을 유쾌하게 펼쳐 보인다. 전시장을 채우는 블루스 선율과, 바실러스균이 피어난 메줏덩이의 사진이 어색하게 공존하면서도 묘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정연두는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발효되어 살아나는 것”이라는 작가적 통찰을 매개로, 다성적 하모니를 일상의 리듬으로 치환한다.


 
연주와 발효의 은유, 그리고 ‘피치 못할 블루스’

전시의 핵심 작품인 영상 설치 <피치 못할 블루스>(2025)는 세계 각지에서 녹화된 다섯 명의 연주자—보컬, 콘트라베이스, 색소폰, 오르간, 드럼—의 개별 퍼포먼스를 하나의 느슨한 앙상블로 엮은 실험적 협연이다. 모든 연주는 67bpm의 느린 박자와 단순한 코드만 주어진 상태에서 연주자들이 각자의 삶의 리듬에 따라 연주한 결과물로, 완벽하지 않지만 묘하게 어우러지는 서사적 리듬을 만들어낸다.
 
밀가루 반죽이 부푸는 모습, 막걸리 기포가 터지는 소리, 항아리의 빛 이 모든 것이 시각과 청각의 리듬으로 번역되며, 연주자들의 몸짓과 교감한다. 연주는 실제지만 동시에 비실제의 영역이며, 삶의 즉흥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은유적 장치로 작용한다.


정연두의 <바실러스 초상 #5>. / 국제갤러리 제공

‘우주’로 확장된 일상, 바실러스의 초상

정연두는 이번 전시에서 메주 발효 과정에서 피어난 바실러스균을 포착한 사진 연작 ‘바실러스 초상’도 함께 선보인다. 흰 거품이 피어오른 발효의 흔적은 도깨비 같은 형상으로, 생물학적 현상이자 은유로 기능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다름과 닮음, 보이지 않는 것의 힘, 그리고 생명의 미스터리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친근하게 드러낸다.


정연두의 <은하수>. / 국제갤러리 제공

정연두의 <창조자의 손> 스틸 이미지. / 국제갤러리 제공

이와 함께 전시된 ‘우주 이미지’는 흑색 대리석 위에 밀가루를 뿌려 만든 것으로, 우연한 입자들의 배열이 은하수와 성단을 연상케 한다. 타지에서 배양한 효모 ‘사무엘’을 오랜 시간 직접 키우고, 이를 빵 반죽과 연결하며 만든 이 작업은 발효를 통해 삶의 신비와 창조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확장된다.


 
고려인의 사연과 블루스—지층 같은 시간의 레이어

또 다른 중심축은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는 고려인 후손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든 노래다. 작가는 이들의 사연을 바틱 천에 러시아어로 새기고, 블루스 리듬에 담아 하헌진의 목소리로 불러냈다. 한국, 인도네시아, 러시아라는 다층적 배경 속에서 ‘삶은 계속된다’는 메시지는 현실의 불완전함을 품은 채 관객에게 울림을 전한다.
 
이 노래와 음악들은 단순히 배경음이 아니라, 밀가루를 뿌리고 막걸리를 빚는 동작, 기포의 리듬, 항아리의 빛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다성적 리듬으로 통합시킨다.


피바디에섹스뮤지엄 입구, ©2020 Peabody Essex Museum. Photography by Kathy Tarantola

정연두 작가, <싱코페이션 #15>. / 미국 피바디에식스박물관 제공. 

미국 전시—유길준의 편지에서 싱코페이션으로
 
이번 전시와 병행하여, 작가는 미국 세일럼의 피바디에식스박물관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조선 개화기 인물 유길준과의 인연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작가는 그가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배 위에서 쓴 편지를 모티브 삼아 <싱코페이션 #15>라는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유길준의 흔들리는 마음과 펜글씨의 곡선을 리듬화하여, 시간과 감정의 ‘불협’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조화를 시도한다.
 
이 전시에는 과거 MoMA에 소장되며 화제가 된 <상록타워> 슬라이드 연작도 포함되었다. 이는 과거 JGS(Joy of Giving Something) 재단이 구입해 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이번 전시가 이 작품과 작가의 인연을 다시금 연결시켰다.


정연두 작가 프로필 이미지. 안천호(사진). / 국제갤러리 제공

정연두, 불협 속의 공감과 유머

1969년생 정연두는 서울대 조소과와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2007), MoMA 작품 소장(2008) 등 국내외에서 폭넓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에게 있어 작업은 늘 직접 부딪치고 몸으로 체험하는 과정이다.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사교댄스를 배우고, 발효를 익히며 만들어낸 작품은 늘 유쾌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이번 부산 전시는 그간의 궤적과 새로운 시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유머와 관조, 발효와 음악이 섞여 만들어낸 다성적 리듬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뜻대로 되지 않지만 그래도 살아지는 삶”, 이 전시는 바로 그 마음의 리듬을 기록하고 있다.
 
전시는 2025년 7월 20일까지 부산 수영구 F1963 내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진행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