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슬기의 개인전 《GORU GORU》가 2026년 10월 9일부터 2027년 4월 25일까지 프랑스 보르도의 프락 누벨아키텐 메카 (Frac Nouvelle-Aquitaine MÉCA)에서 열린다.
 
전시 제목 《GORU GORU》는 한국어 ‘고루고루’에서 가져왔다. 주최 측은 이를 다양한 음식을 함께 맛보는 식사에 비유한다. 서로 다른 맛과 질감, 온도와 재료가 하나의 식탁에 놓이듯, 전시는 여러 성질의 작업이 공존하는 경험으로 구상된다.
 
이슬기의 작업은 생활 속 사물과 언어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이 덮는 이불, 손으로 엮는 바구니, 빛을 통과시키는 문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속담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감각과 지식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러한 요소를 색면과 기하학적 구조, 재료와 몸짓의 관계로 옮기며, 일상의 제작 문화가 동시대미술의 형식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해 왔다.


(참고사진) 김해자 장인이 만든 누비 한복. / 사진: 한겨레

속담을 이불로 만드는 작업
 
이슬기의 〈BLANKET PROJECT U〉는 한국 속담을 누비 이불로 옮기는 연작이다. 작가는 속담을 글자로 수놓거나 그 장면을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말에서 떠오르는 움직임과 관계를 색면과 기하학적 형태로 구성한다. 통영의 누비 장인 조성연은 그 구성을 비단 위에 구현한다. 천을 겹치고 한 줄씩 촘촘히 바느질하는 과정에서 색의 경계와 바느질 방향까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이슬기, 〈U: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이불 프로젝트(부분). / © ADAGP, Paris, 2026.

이를테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슬기의 작품에서는 원숭이나 나무를 찾아보기보다, 먼저 색과 형태의 구성을 보게 된다. 작품의 제목을 읽는 순간 그 추상적인 화면은 익숙한 속담과 연결된다.
 
그림을 먼저 보고 말을 나중에 떠올리는 순서가 이 연작을 감상하는 재미다. 이불이라는 형태도 중요하다.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던 말이 일상에서 몸을 덮는 물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청의 색채에서 전시 공간으로
 
《GORU GORU》에서 새롭게 주목할 부분은 한국 단청 장인들의 참여다.
 
단청은 궁궐과 사찰 등의 목조 건축에 여러 색의 안료로 무늬를 그리는 한국의 전통 채색 기법이다. 건축물을 장식하는 동시에 목재를 보호하며, 건물의 위계와 종교적 의미를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참고사진) 단청 /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와 엘피 튀르팽의 초청으로 한국의 단청 장인들이 전시장 벽에 대형 벽화를 제작할 예정이다.
 
이 작업들을 통해 단청과 문살은 공간을 조직하고 지각을 변화시키는 조형적 원리로 읽힌다. 선의 반복과 색의 간격, 구조물 사이의 빈 공간은 관객의 시선과 움직임에 관여한다. 보르도에서 계획된 현장 제작 역시 이러한 탐구의 연장선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러 지역의 손기술과 언어
 
이슬기의 협업은 한국의 제작 문화를 출발점으로 여러 지역에 걸쳐 이루어져 왔다. 멕시코에서는 바구니를 엮는 여성 장인들과, 모로코에서는 리프 지역의 도예가와 작업하며 언어와 제작 방식의 관계를 탐구했다. 2023년 일본 빌라 쿠조야마 레지던시에서는 여성들이 부르던 민요 ‘아키타 온도’를 조사하고, 대나무 발인 ‘스다레’ 제작자들과 협업했다.
 
이슬기는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그 관계에 접근하고, 이를 새로운 조형적 구성으로 발전시킨다. 작업의 기하학적 간결함 안에는 여러 사람의 손과 지역의 시간이 함께 자리한다.


이슬기, 〈DAL DARI〉 프로젝트(부분), 기메박물관. 사진: 니콜라 퓌슬레르(Nicolas Fussler). / © ADAGP, Paris, 2026.

파리와 보르도, 서울로 이어지는 전시
 
지금 현재 파리 기메박물관에서는 이슬기의 《DAL DARI. La Lune et les Jambes》가 진행 중이다. 2027년 2월 8일까지 이어지는 이 프로젝트는 정월대보름에 다리를 건너며 다리의 건강을 기원하는 한국의 풍습에서 출발했다.
 
박물관 외벽에는 문살을 연상시키는 반원형 목조 구조가 설치되었고, 내부에는 색색의 리본과 청동 방울로 구성한 작업이 펼쳐진다. 외벽 구조의 한쪽 면에 칠한 색은 관객의 이동에 따라 다르게 지각되며, 내부 설치는 빛과 소리, 공간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
 
Frac에 따르면 《GORU GORU》는 11월 26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할 개인전 《YOMO JOMO》와 상호보완적으로 구상되었다. 또한 이 전시를 계기로 2027년 JRP | Éditions에서 작가 모노그래프가 출간될 예정이다.
 
이슬기의 작업에서 지역의 문화는 구체적인 재료와 언어, 손의 움직임을 통해 새로운 형식을 얻는다. 속담은 누비의 색면으로, 문살은 관객의 이동에 반응하는 구조로, 단청은 전시 공간을 구성하는 회화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추상적인 형태와 생활의 경험은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슬기 작가 / © Frac Nouvelle-Aquitaine MÉCA 웹사이트

작가소개
 
이슬기는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92년부터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속담과 민요, 생활용품과 공예 기술을 바탕으로 조각과 설치 작업을 해 왔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과 SBS가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Frac Nouvelle-Aquitaine MÉCA
 
프락 누벨아키텐 메카(Frac Nouvelle-Aquitaine MÉCA)는 프랑스 보르도에 위치한 공공 현대미술 기관이다. 1982년 설립되어 작품 수집과 전시, 작가의 제작 지원, 지역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2019년 복합문화시설 MÉCA로 이전했으며, 현대미술을 지역사회와 연결하고 국내외에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Frac’은 프랑스어로 ‘지역현대미술기금(Fonds régional d’art contemporain)’을 뜻한다.
 
 
 
전시 정보
 
전시: 이슬기 《GORU GORU》
기간: 2026년 10월 9일–2027년 4월 25일
장소: Frac Nouvelle-Aquitaine MÉCA, 프랑스 보르도
기획: 엘피 튀르팽(Elfi Turpin)
웹사이트: Frac Nouvelle-Aquitaine MÉ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