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파(b. 1981)는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회화의 영역에서 타자화된 감각들에 주목하고, 젠더 편향적으로 형성된 시각 언어에 의문을 가져왔다. 그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정상성’과 ‘비정상성’이라는 부조리한 폭력적 관계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신만의 회화 언어로 재맥락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장파, 〈폭력의 순환〉, 2008 ©장파

그의 초기작 ‘식물들의 밀실’ 시리즈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작업들은 ‘구조적 폭력’과 ‘타자화된 존재’ 사이의 매커니즘, 즉 타자성(otherness)이라는 주제로 수렴된다. ‘식물들의 밀실’은 폭력성을 답습한 식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장파는 이 연작에서 ‘붉은 벽돌집’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시나리오를 쓰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장면들을 그려 나갔다. 시나리오의 내용은 식물과 동물을 통해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그 폭력이 순환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장파, 〈식물들의 밀실〉, 2009 ©장파

이 작업은 사회로부터 ‘비정상인’으로 취급 받는 작가의 측근을 수년간 가까이서 지켜본 사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다. 작가는 이 연작을 통해 그가 받는 사회적 고통과 구조적 폭력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작품 속 ‘붉은 벽돌집’은 현대 사회의 조직화된 욕망이 작동하는 공간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개’는 동물적 본능과 폭력성이 복합된 존재로서 문명의 폭력에 대응하는 개체로 작동한다. 한편 ‘식물’은 그러한 욕망이 투영된 적 없는 개체였으나 동물에 의해 폭력을 ‘학습’ 당하는 존재로 표상된다.

작가는 이러한 은유적인 요소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폭력의 순환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욕망, 그리고 폭력성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장파, 〈세상의 끝〉, 2011 ©장파

한편 ‘세상의 끝’ 시리즈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자기 반성적 시각을 담고 있다. 그림 속에는 뿜어져 나오는 물에 비해 텅 비어 있는 듯 고요한 검은 웅덩이, 그리고 화면 중심 상단에 깊게 자리한 블랙홀과 같은 네모진 소실점이 그려져 있다. 또는 한 남자가 도망치며 외치지만 목소리가 발화되지 않는 스토리로 그려지기도 한다.

심리적 불안을 유발하는 화면의 공간 구성 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없는 아우성은 세상의 폭력성을 묵인하거나 혹은 그것이 내성화되어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공포와 무력감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작가의 윤리적 죄의식을 반영한다.

장파, 〈나의 작은 폭도 소녀들〉, 2015 ©장파

2015년에 발표한 작가의 작업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Lady-X’ 시리즈에서는 본격적으로 ‘타자로서의 여성’, ‘여성적 그로테스크’의 시각적 재현 방식을 회화로써 탐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시도가 엿보인다.

작가에 따르면 이 시리즈의 시작은 “여성의 주체적인 성적 욕망은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가?” 그리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성적 응시’로부터 벗어나 여성이 응시와 재현의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페미니즘의 고전적 질문이었다고 한다.


장파, 〈Lady-X〉, 2015 ©장파

장파는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해 남성 중심적 시선과 언어에서 배제되거나 은폐되어 온 ‘여성-타자의 감각’을 회화적 언어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성’의 재맥락화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젠더 편향적인 감각 체계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했다.


장파, 〈Lady-X No.07〉, 2015 ©장파

‘Lady-X’ 시리즈는 나무를 사랑하는 덴드로필리아(dendrophilia)라는 페티시를 가진 Lady-X라는 소녀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펼쳐 나간다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다. 장파는 소녀의 판타지를 통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찾아 나가는 여정을 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했다.

Lady-X의 탐험기는 ‘숲’이라는 공간에서 사랑의 대상이 타인이 아닌 ‘나무’로 대상을 치환시키며 시작된다. 여기서 ‘숲’은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존재들이 활성화되는 공간으로, 그 안에서 소녀는 낯선 존재들과의 조우를 통해 자신의 판타지를 실행한다.

장파, 〈Lady-X〉, 2015 ©장파

이 시리즈에서는 소녀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여로를 통해 그녀만이 바라볼 수 있는 내밀한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일종의 관음증을 가진 탐욕스러운 목격자로서, 혹은 판타지의 주체로서 회화의 장면에 끊임없이 개입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자기 안에만 머물러 있는 대상에 대한 매혹과 불안을 넘어서 타자를 품을 수 있는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고자 하는 시도와 과정을 이미지화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설명한다.

장파, 〈Fluid Neon〉, 2016 ©장파

‘Lady-X’ 시리즈에서부터 엿볼 수 있었던 ‘여성적 그로테스크’에 대한 회화적 감각은 이후의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그의 회화에서 여성의 신체는 일그러지거나 녹아 내리는 듯한 비정형의 형태로 묘사되곤 한다.

작가는 ‘여성적 그로테스크’를 새로운 여성 주체의 형성 과정에서 주체의 경계에 대해 의심을 품고 넘나들며 발생하는 심미적 감각으로 보았다. 그리고 작가는 남성적 응시에 따라 규범화된 여성 신체로부터 벗어난 미적 범주가 기존 보편화된 사회적 감각 체계에 균열을 내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감각으로 여겼다.

대상화로부터 극복하는 과정에서 유발되는 이러한 감각은 누군가를 타자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주체’가 되는 특징을 가진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 감각을 통해 젠더 편향적 시각 체계를 벗어나 새로운 여성 주체를 구현할 수 있는 시각 언어를 정교화해오고 있다.

장파, 〈Women Scrawled〉, 2016-2018 ©장파

이와 함께, 장파는 미투 운동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을 그림에서 은유적으로 언급하거나, ‘여성 괴물’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 문제를 직접적이되 감각적으로 표현해 왔다. 예를 들면, ‘Brutal Skins’ 시리즈는 그동안 입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던, 그리고 말할 수 없었던 여성의 경험과 감각을 그로테스크한 여성 신체의 액체적 질감과 자극적인 형광 색채로 풀어낸다.

장파, 〈여성/형상〉, 2020, 《Women/Figure》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창고갤러리, 2020) ©장파

2020년부터 시작된 ‘여성/형상’ 시리즈에서는 미술사 혹은 문화사에 내재한 여성 혐오(misogyny)’의 이미지를 수집해 이를 (재)배열/배치한다. 2011년부터 다양한 매체를 통해 모아온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는 이 작업은 남성 중심의 거대 서사에서 외면되고 억압된 ‘여자들의 세계’를 다룬다.

이를 위해, 작가는 고전 명화를 비롯하여 인터넷에 떠도는 여성, 소수자성, 남성성 그리고 페미니즘을 둘러싼 언어와 이미지들을 수천 장 수집한 다음, 몇 개의 키워드로 분류해 그것들을 페인팅의 고전적 어법에서부터 서브컬처의 이미지와 연결 지어 탐구한다.

장파, 〈입 싼 보석들〉, 2020, 《Tangible Error》 전시 전경(d/p, 2020) ©장파

특히 작가는 인터넷 환경 안에서 발전해온 대중문화가 여성의 신체를 둘러싼 여성 혐오를 어떻게 재생산하고 있는지 주목했다. 이를 위해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GIF 짤방이나 밈 혹은 가짜 뉴스를 비롯한 영상과 사진들을 수집하고 (재)배열/배치하여 여성 형상의 변모를 추적했다.  

작가는 이 작업에 대해 “여성 형상에 대한 이미지의 지층”을 보여주기 위한 프로젝트라고 설명한다. 다산을 상징하는 고대 여성 조각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시작해 오늘날 인터넷 상에서 빠르게 부유하며 재생산되고 있는 여성 형상의 이미지들까지 다양한 층이 혼재하는 지층을 만들어 냄으로써 여성 이미지에 대한 역사를 추적하고 그 역사를 다시 써내려 간다.


  장파, 〈여성/형상: Mama〉, 2023 ©장파

기존의 ‘여성/형상’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는 ‘여성/형상: Mama’(2023) 시리즈는 단군 신화 이전 한국의 여성 창세 신화인 ‘마고 할미’, 구체적으로는 제주도의 설문대 할망 설화를 주제로 한다. 마고 할미는 신화 속에서 때로는 악녀로, 때로는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로 묘사되며 구전되어 왔다.

작가는 이 인물을 그로테스크한 신체로 재구성한다. ‘마고 할미’는 그의 작업 속에서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신체로 나타나며, 그 신체에는 장기와 생식기, 촉수 같은 것들이 가득 얽힌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응시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여성의 신체는 여러 개의 눈을 통해 오히려 관객들을 응시하고 있다.

또한 화면 곳곳에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조각상 이미지가 스크린 프린팅 되어 있어, 작가가 형상화한 마마와 시각적, 의미적 충돌을 일으킨다.

장파, 〈여성/형상: 할망〉, 2023 ©송은문화재단 및 작가

이처럼 장파는 ‘정상성’ 혹은 ‘남성 중심’의 사회문화적 구조 안에서 배제된 타자들의 감각을 회화적 언어로 시각화하고 새로운 주체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가려져 있거나 축소되어 온 이들에 대한 감각을 재활성화하는 그의 작업은 우리 안팎의 타자를 발견하고 다시 감각하도록 한다.

” 제가 작업에서 말하는 여성성, 혹은 여성적이란 것이 단순히 생물학적 성에 닫힌 개념이 아니라, 신체의 다중성과 열림, 탈영토화된 육체를 기반으로 여성의 경계 확장을 추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장파, 비애티튜드 인터뷰) 


장파 작가 ©인천아트플랫폼

장파는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및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서양화과 석사를 졸업했다. 개인전은 유머감각 (2023, 서울), 기체 (2022, 서울), 전시공간 (2022, 서울), 인천아트 플랫폼 창고갤러리 (2020, 인천), 두산 갤러리 (2018, 서울), 두산 갤러리 (2017, 뉴욕), 소마 미술관 (2016, 서울), 메이크샵 아트스페이스 (2015, 파주), 갤러리 잔다리 (2015, 서울), Tv12 gallery (2013,서울), OCI미술관 (2011, 서울), 그리고 예술공간 HUT (2009, 서울)에서 열었다.

주요 그룹전으로는 ARAC (2024, 부쿠레슈티, 루마니아), 국립현대미술관 (2024, 서울),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4, 서울), 송은아트스페이스 (2023, 서울), 아르코미술관 (2023, 서울), 두산갤러리 (2023, 2015, 서울), 인천아트플랫폼 (2022, 인천), 펑크 갤러리 (2022, 상해),  D/P (2020, 서울), 탈영역 우정국 (2019, 서울), 아트스페이스 풀 (2017,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2015, 서울), OCI미술관 (2015, 서울),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대학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가의 주요 저서(공동저서)로는 『화가의 말』(2020)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