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현(b. 1980)은 동아시아 전통 회화의 양식을 동시대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해 왔다. 전통 회화에는 자연에 대한 관심이 녹아 들어 있다면, 손동현의 회화에는 현대인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전통 회화의 주제, 소재, 화론을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로 해석하여 새로운 동양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손동현, 〈문자도-나이키〉, 2006 ©손동현

손동현의 초기작 ‘문자도’ 시리즈는 전통 회화 중 하나인 민화에 속하는 문자도를 재해석하고 있다. 조선 후기 지배계급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도는 손동현의 회화에서 오늘날 자본주의 소비문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글씨와 그림을 오가는 문자도의 양식을 가져와 나이키, 코카콜라와 같은 동시대의 글로벌 기업 로고들을 차용한 다음, 그 안에 관련된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현대 사회의 모습을 반영했다.


손동현, 〈왕의 초상〉, 2008 ©손동현

이와 더불어, 손동현은 헐리우드 영화,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의 전신사조(傳神寫照)를 그리기도 하였다. ‘전신(傳神)’이란 대상이 가진 정신을 그 형상을 통해 표현해내는 것을 의미하며, ‘사조(寫照)’란 화가가 관조한 대상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손동현은 이와 같은 전신사조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동시대를 상징하는 대상들의 초상을 그렸다. 초반 전신사조 작업들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상 인물의 모습을 담았다면, 2008년부터 제작한 초상화 연작 ‘왕의 초상’은 대중문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팝의 황제’라 불린 마이클 잭슨의 모습을 전통적인 어진의 형식으로 담고 있다.


손동현, 〈왕의 초상〉, 2008 ©손동현

손동현은 마이클 잭슨이라는 인물은 하나의 형상으로 규정될 수 없다고 생각해 미주 시장에서의 싱글 앨범으로 별도 발매된 40곡의 노래를 기준점 삼아 연대기적 초상 40점을 그리기로 했다. 작가는 각 싱글별로 잭슨의 전신을 포착하기 위해 뮤직비디오를 면밀히 관찰하였고, 뮤직비디오가 제작되지 않은 경우에는 앨범 커버 사진을 탐구하였으며, 앨범 사진이 없는 경우에는 해당 음반이 발매된 시기의 프로모션 사진을 찾아 보았다.
 
작가는 마이클 잭슨의 활동 시기에 따른 관상을 포착하는 것과 더불어, ‘팝의 황제’라는 칭호를 얻기 시작한 1989년을 기점으로 인물의 좌대를 다르게 표현했다. 1989년 이전의 초상들은 호피가 깔린 나무 의자에 앉아 화문석 족좌대에 발을 얹은 모습인데, 이는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 초상화에 기초한 도상이다. 반면 1989년 이후의 모습을 담은 초상들은 조선시대 왕이 사용했던 어좌 위에 앉아 있다.


손동현, 〈Master Bone Method〉, 2015 ©송은문화재단

2014년 이후로 작가는 특정한 인물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전통 초상화의 형식을 통해 전통적인 동아시아 문인화의 주제, 소재, 화론 등을 인물의 성격이나 외형으로 치환하여 새로운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 기점이 된 2014년 개인전 《PINE TREE》에서는 전통 회화에 주된 소재로 등장해온 ‘소나무’의 상징적 의미와 특성을 바탕으로 이를 의인화한 캐릭터의 인물화를 선보였다.  
 
이듬해 손동현은 제15회 송은미술대상전에 참여하며 중국의 사혁이 주장한 그림을 제작하는 여섯 가지의 요체인 ‘육법(六法)’이라는 화론을 인물로 탄생시키는 작업을 선보였다. 육법의 각 요체는 협객이 갖는 ‘무공’의 특성으로 재해석되고 동시대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외모로 묘사되었다.
 
예를 들어, ‘골법용필(骨法用筆)’을 의인화한 〈Master Bone Method〉(2015)의 경우에는 ‘붓을 사용할 때 뼈가 있는 것처럼 붓을 사용하라’는 의미에 따라 ‘골법용’이라고 쓰인 갑주를 입고 있는 무사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이 인물은 ‘필’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는 칼자루에서 먹이 뿜어져 나오는 무공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다.

손동현, 〈Mater Division Planning〉, 2015 ©송은문화재단

한편, 화면의 구도와 위치 설정을 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영위치(經營位置)’를 의인화한 〈Mater Division Planning〉(2015)에서는 인물의 신체를 여러 족자에 나누어 그림으로써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나 어디에서든 자유롭게 구도를 바꾸어 맞출 수 있도록 했다.  
 
작가는 ‘경영위치’가 인물이라면 시공간을 초월해 순간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그림의 세부적인 요소에서도 드러나는데, 가령 인물 주변에 그려진 모션 라인이나 구름으로 변하는 선 표현은 만화에서 순간이동을 묘사할 때 볼 수 있는 효과를 상기시킨다.


손동현, 〈Battlescape Z(The Cell Game)〉, 2013 ©손동현

한편 2013년에 선보인 〈Battlescape Z(The Cell Game)〉는 전통 산수화의 표현 기법과 미학을 따른다. 작가는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 ‘드래곤볼’ 전투 장면의 개별 컷마다 그려진 배경을 이어 그려 가로로 긴 화면에 모아 서사가 있는, 변화가 있는 산수화로 담았다. 이는 다양한 시공간을 한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 산수화와 연결된다.
 
이 작업은 2010년경 병풍에 블록버스터 영화 장면들을 모아 그렸던 ‘섬’ 시리즈와도 연결된다. ‘섬’은 펼치면 하나의 큰 화면이지만, 각 폭마다 개별적인 화면이 될 수도 있는 병풍의 특성을 고려한 작업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속성을 가진 다른 소재를 고민하다 나온 것이 두루마리에 그린 〈Battlescape Z(The Cell Game)〉이었다고 말한다.

손동현, 〈이른 봄〉, 2020-2021, 《이른 봄》 전시 전경(페리지갤러리, 2021) ©페리지갤러리

산수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탐구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2015년 개인전 《Paper in Ink》에서는 종이와 먹만 사용한 수묵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손동현은 2021년 페리지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이른 봄》에서 본격적으로 산수화의 틀을 가져온 대형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갤러리 벽면을 가득 채운 10개의 화폭으로 이루어진 대형 회화 〈이른 봄〉(2020-2021)은 11세기 중국 북송 화가 곽희의 〈조춘도〉를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동아시아 회화 특유의 산수화의 시점과 구도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어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조춘도〉를 자신만의 시선에서 바라보며 자신만의 방식대로 재해석했다.
 
이에 따라 손동현은 삼원법(三遠法)으로 구성된 공간을 10개의 화폭으로 나눠 담고, 정교한 필치의 준법(皴法)을 스텐실, 탁본 기법과 그래피티, 만화 형식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했다. 그 결과 하나의 화면에서 엄격한 위계를 구축하고 있던 산봉우리와 소나무는 분리된 화면 속에서 기하학적이고 유머러스한 동시대의 문양들로 대체된다.

손동현, 〈3PO6〉, 2021-2022 ©갤러리2

손동현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이른 봄〉을 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의 주제보다는 ‘재료’에 주목할 수 있게 되며, 전보다 자유롭고 즉흥적인 예술적 개입을 작품에 도입했다.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진행된 3부작의 전시 프로젝트 《Paper in Ink》는 이러한 그림의 재료에 대한 작가의 탐구와 실험을 잘 보여준다.
 
2015년 1부에서는 종이와 먹만 이용한 산수화 작품을, 2020년 2부에서는 먹과 다양한 잉크를 함께 사용한 작품을, 그리고 2022년 3부에서는 종이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을 선보였다. ‘종이’를 주제로 한 마지막 프로젝트에서는 한지의 특성을 살린 다양한 실험적인 수묵산수화를 선보였다.

《Paper in Ink III》 전시 전경(갤러리2, 2022) ©갤러리2

작가는 오늘날의 종이와는 다르게 구겨졌더라도 물을 뿌리면 원래의 평평한 형태를 되찾고, 접었을 때 가장자리에 설 수 있는 물성을 가진 한지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지에 가장 잘 안착하는 먹만을 사용했다. 또한, 붓은 많은 회화 작품을 그릴 때 사용하는 필수적인 도구이지만 작품 정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붓을 제외한 다양한 도구와 기법을 사용했다.
 
작가는 한지를 마구 구긴 후 먹을 뿌려 산세를 표현해 잘 말린 다음 다시 물을 뿌려 그림을 판판하게 펴거나, 장난감 기차 레일을 올려 폭포를 그리거나, 화첩을 제작하여 그 안에 용이나 먹구름을 표현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했다.
 
이때 작가는 전통적인 산수화의 형식을 재해석하기 보다는 옛 화가들의 자유 정신을 반영하고자 했다. 산수화를 그리는 것이 문인들이 즐겼던 놀이였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작가는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으로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전시 곳곳에 나타났다. 폭포가 흘러내리는 풍경에 용이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을 여러 개의 표구 작품들로 표현한 것이 한 예이다.

《용 룡》 전시 전경(갤러리2, 2024) ©갤러리2

그리고 지난해 갤러리2에서 열린 개인전 《용 룡》에서는 손동현의 지난 예술적 탐구와 실험들을 종합적으로 나타났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그간 다뤘던 전통회화의 소재부터 대중적인 이미지들, 나아가 문자를 활용한 회화인 ‘문자도’의 방식에 집중했다.
 
특히 그는 하나의 문자 ‘용(龍)’을 중심으로 자전에 등장하는 여러 형태의 서체를 분석하고 분해해, 평면의 회화 안에 구성되는 다양한 공간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에 더해 전통적인 수묵 기법에 잉크, 아크릴릭 잉크 등의 현대적인 재료, 영문 타이포그래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래피티 방식, 일상적인 사물을 활용한 스텐실 등의 표현들이 화면 곳곳에서 독자적으로, 혹은 융합되어 나타나며 화폭의 공간을 더욱 복잡하게 분해한다.
 
또한 ‘용’의 이미지, ‘龍’의 형태를 해체해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어 붙인 화첩, 화폭 주변 벽과 부채에 펼친 구름(雲)은 ‘용’을 구성하는 부차적인 요소까지 결합한 화면으로서 확장된 공간을 만든다.

《용 룡》 전시 전경(갤러리2, 2024) ©갤러리2

이처럼 손동현은 동아시아 전통 회화의 방법론, 나아가 옛 문인들의 정신에 대한 탐구를 끊임없이 지속해오며 오늘날 회화가 점유할 수 있는 유효한 그리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왔다. 손동현의 작품은 문화사나 미술사적으로 유의미한 동아시아 회화의 개념과 매체를 현재 시점으로 소환하여 조명하고 실험하며 국내외 미술사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해가고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어떤 목표나 꿈보다는 그저 제가 다음에 흥미를 가지는 소재로 새로운 작품을 보여드릴 것 같아요. 그 옛날, 그림을 그리며 한없이 자유로웠던 과거의 화가들처럼 저도 제가 가진 생각을 그저 자유롭게 나타내고 싶습니다.” (손동현, 국가유산청 인터뷰, 2022.04.28)


손동현 작가 ©국가유산청

손동현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동양화과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5년 갤러리 세줄(서울, 한국)에서 열린 그룹전 《Funny Funny Ⅳ》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2006년 아트스페이스 휴(서울, 한국)에서 열린 개인전 《파압아익혼:波狎芽益混》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용 룡》(갤러리2, 서울, 2024), 《Paper in Ink III》(갤러리2, 서울, 2022), 《이른 봄》(페리지갤러리, 서울, 2021), 《PINE TREE》(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14)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서울, 한국),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한국), 호림미술관(서울, 한국), 두산갤러리(뉴욕, 미국), Aando Fine Art(베를린, 독일) 등 다수의 미술 기관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손동현은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시상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인상’을 받았으며, 2015년에는 ‘송은미술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송은문화재단 등 다수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