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경(b. 1977)은 평면,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회화의 기본적인 조형 언어를 확장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작가는 이러한 시각적 실험의 과정에서 자신의 신체와 개인사에서 추출한 서사적 요소뿐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 개념과
방법론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다.

강서경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랜드마더타워〉(2011-2013)는 작가의 노쇠한 할머니의 모습을 탑의 형태로 형상화하고
있다. 노인의 모습처럼 넘어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오롯이 서있는 이 조형물은 작가가 주변에서 수집한 사물들로
이루어진 실제 할머니의 크기만한 탑의 모습을 띄고 있다.
철제 접시와 건조대 등 쓰임을 다 한 사물들은 금속 골조와 실,
가죽 등으로 연결되며 조각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내부적으로는 개별 요소들의 색과 형, 질감 등이 상충되며 이질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수직적으로 조응하며 작가의 개인적 서사를 하나의 오브제로써 담고
있다.

강서경, 〈매매종 邁邁鍾〉, 2013, 《제13회 송은미술대상전》 전시 전경 (송은, 2013-2014) ©강서경
이처럼 각자의 맥락과 용도가 상이한 버려진 물건들을 새롭게 조합해 조형적 균형을 만드는 그의 작업에는 개인의
마음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제13회 송은미술대상
전시에서 선보였던 〈매매종 邁邁鍾〉(2013) 또한 ‘종’이라는 작은 오브제에서부터 파생되는 감정의 서사를 조형적으로 풀어낸다.
이 작업은 작가가 우연히 발견한 사람 형상의 다이닝 벨과 문 앞에서 벨을 누르는 여인의 일러스트레이션에서 출발한다. 이때 작가는 종소리에 대해 “삶의 신호일수도 있으며 동시에 이 오브제가
그 소리 또는 신호를 듣고 싶어하는 기다림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작가는 자신을 떠나간 남자의 집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님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은 시경(詩經) 백화(白樺)의 시구와 함께 어우러지는 설치와 회화로 구성된 전시를 구상했다. 강서경은
이 작업에서 오브제와 시구를 어우러지게 한 이유에 대해 “‘추상화된 조형적 논리’를 구현해내기 위한 시도이며, 동시에 이러한 감성을 하나의 유기적인
호흡으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시장에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수직을 이루는 오브제 설치 전반은 기다림, 그리움, 초조함을 비롯해 종이 갖는 다양한 의미의 층위를 전달한다. 이와 함께 위태롭게 쌓인 오브제 겉면을 감싼 털실, 선의 패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페인팅 등 불안정한 틈새를 채운 작가의 흔적은 ‘균형’에 대한 조형적 제스처를 보여준다.

강서경, 〈하얀그물 (앞) 아래보라(뒤)〉, 2014 ©강서경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추상화된 조형적 논리에 맞추어 쌓아 올리면서 나름의 균형을 만들고 유기적으로
풀어내는 그의 작업은 회화와 설치의 경계가 모호한 형태로 제시된다. 이러한 작가의 방식은 회화를 의미하는
‘페인팅(painting)’과 설치를 의미하는 ‘인스톨레이션(installation)’의 합성어인 ‘페인톨레이션(paintallation)’이라 불린다.
그의 작품 속 회화적 요소들은 프레임 바깥 너머 공간 속에 위치한다. 각
단위의 회화들은 불안하게 바닥 위에 서있거나 기존 프레임에서 분리되어 다양한 형태로 위치하기도 하며, 텅
빈 프레임 자체만 벽에 설치되기도 한다.

강서경의 페인톨레이션은 ‘정(井)’과 ‘모라(Mora)’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언어학에서 음절 한 마디보다 짧은 단위를 칭하는 ‘모라(Mora)’는 그의 작업에서 서사가 축적될 수 있는 시간의 시각화된
단위를 의미한다.
회화 연작으로 진행되는 ‘모라’는
종이나 비단 위에 물감을 겹겹이 쌓아 스며들게 하는 과정을 거듭하며 제작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라’의 표면에는 오랜 시간동안 쌓아 올린 물감층의 흔적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5년여간 작업한 ‘모라’ 27점을 ‘검은 자리’ 위에
쌓아 올린 〈모라와 검은 자리〉에서는 공간성이 함께 결합되어 나타난다.
즉 강서경에게 있어서 회화는 하나의 완결된 형식으로서의 매체이기 보다는 작가만의 조형 논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단위로서 존재하며 다양한 맥락과 환경 안에서 변주되고 확장된다.

강서경, 〈정 (井)〉, 2014-2015 ©강서경
한편 사각 격자로 이루어진 구조물인 ‘정 (井)’ 시리즈는 조선 15세기
세종대왕이 한글과 함께 창안한 유량악보인 ‘정간보(井間譜)’의 기호를 참조한다. 작가는 사각의 그리드 안에 음의 길이와 높이를
표기하는 정간보에 착안하여 이 구조를 소리와 움직임을 담아내는 틀이자 시간과 서사의 작동방식을 제시하는 개념적인 구조로 바라보았다.
격자 형태의 ‘정’ 시리즈는
회화를 공간적으로 확장하는 틀로 활용되거나 사각의 형태와 함께 그 너머의 경치를 동시에 바라보게끔 하며 공간을 구획하는 기본적인 틀로도 작동한다.

제1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인 〈검은 자리
꾀꼬리〉(2016-2018)에서는 회화의 구성 요소들의 공간적 확장뿐 아니라 그 안에서 연속하는 몸의
움직임을 포함한다. 이 작업은 조선시대 1인 궁중무인 ‘춘앵무(春鶯舞)’에 개념적
기반을 둔다. 춘앵무는 약 2m 면적의 ‘화문석’이라는 자리 위에서 이루어지는 제한된 춤의 형식이다.

강서경은 춘앵무라는 전통 춤을 그간 실험해온 페인톨레이션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이 작업에서 화문석은 전통 회화의 조형 요소이자 평면의 기본 논리인 ‘그리드’로 만들어진 ‘검은 자리’로
번안된다. 이는 작업에서 무용수에게 허락된 움직임을 위한 공간이자 동시에 그 움직임을 제한하고 규율하는
조건이 된다.
오브제, 천, 프레임, 회화 등으로 구성된 공간 설치를 배경으로 액티베이터(퍼포머)는 ‘검은 자리’ 위에서
정적인 안무를 이어간다. 이때 액티베이터의 움직임은 공간 속 다양한 요소들과 조응하며 새로운 공간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간다.

2018년 리버풀비엔날레와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서 선보인 〈땅 모래 지류(Land Sand Strand)〉(2018)는 〈검은 자리 꾀꼬리〉에서 파생된 작업이다. 〈검은 자리
꾀꼬리〉에서 화문석의 역할을 하던 ‘검은 자리’는 〈땅 모래
지류〉에서 전통 악보 체계인 정간보의 형식을 빌려 변주되었다.
정간보의 그리드 형식을 차용해 새롭게 만들어진 ‘검은 자리’는 무보(舞譜)로 제시되며
추상적인 움직임을 위한 토대가 된다. 이 작업에서 그리드는 무한히 변형되고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의
땅(Land)이 되고, 그 주변을 돌아다니는 관객들의 신체는
모래 알갱이(Sand)처럼 서로 충돌하고 교류하며 유동적인 지류(Strand)를
만들어낸다.

이후 ‘검은 자리’는 화문석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움직임을 담지한 조형 요소로서 강서경의 작업 안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검은 자리’에서 파생되어 보다 유동적인 땅으로서 기능하는 ‘자리 검은 자리’ 시리즈는 그림처럼 벽에 걸리거나 발처럼 공중에 매달리기도 하고, 반으로
접히거나 돌돌 말려 변형된 형태로 전시되곤 한다. 이처럼 ‘자리
검은 자리’는 여러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며 정간보의 그리드로 치환된 신체의 움직임과 리듬을 환기시키고
회화의 추상성을 확장시킨다.
한편 작가는 이를 제작하기 위해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강화도의 장인들과 협업한다. 남과 북이 마주하는 지역에서 자라는 천연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진 ‘자리
검은 자리’는 오랜 분단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의 시간과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한 수많은 개인들의
노력의 시간 또한 간직하고 있다.

한편 202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강서경의 근작 ‘산’ 시리즈는 진경산수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진경산수화는 상상과 이상에 기반한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화와 달리 직접 두 눈으로 보고 걸어본 실제 풍경을 그린
전통화다.
강서경은 사계절의 산이 가진 특유의 정취를 철, 금속체인, 실, 비단 등으로 구성된 조각 작품으로 재현했다. 관객은 작가가 그려낸 사계절의 산수 사이사이를 거닐며 사계의 시간과 풍경을 몸소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듯 강서경은 전통이라는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시점으로 소환해 새로운 시공간을 구축한다. 그 안에서는 각기 다른 모양새와 존재방식을 지닌 조형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호작용을 하며 연대의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 작가는 이를 통해 오늘날 사회 속 개인들이 서로의 존재와 ‘자리’를 인지하고 불균형과 갈등을 끊임없이 조율하며 관계를 맺는 “진정한 풍경”을 제시한다.
“이 아름다운 것들을 통해, 이 ‘사각의 공간이라는 순간’으로, 우리가
사는 현재를 이야기하는 작은 쉼표를 던지고 싶어요.” (강서경,
BAZAAR 인터뷰, 2019.05.10)

강서경 작가 ©작가 및 국제갤러리
강서경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이후 영국 왕립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으며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최근 작가의 개인전으로는 《마치(MARCH)》(국제갤러리, 서울, 2024), 《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리움미술관, 서울, 2023), 《사각 생각 삼각》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19), 《Black Mat Oriole》(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 2018), 《발 과 달》(시청각, 서울, 2015), 《치효치효鴟鴞鴟鴞》(갤러리팩토리, 서울, 2013), 《GRANDMOTHER TOWER》(오래된집, 서울, 2013) 등이 있다.
또한 강서경은 베니스 비엔날레(2019), 상하이 비엔날레(2018), 리버풀 비엔날레(2018), 광주비엔날레(2018, 2016),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6), 《Groupe Mobile》(빌라바실리프, 파리, 2016) 등의
전시에 참여하였다. 2018년에는 아트 바젤(Art Basel)에서 ‘발로아즈 예술상(Baloise Art Prize)’을, 2013년에는 제13회 송은미술대상 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References
- 강서경, Suki Seokyeong Kang (Artist Website)
- 스페이스 캔, Grandmother Tower (Space CAN, Grandmother Tower)
- 리움미술관, 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 (Leeum Museum of Art, Suki Seokyeong Kang: Willow Drum Oriole)
- 헬로! 아티스트, 강서경 (Hello! Artist, , Suki Seokyeong Kang)
- 송은, 제13회 송은미술대상전: 강서경 (SONGEUN, 13th SONGEUN Art Award Exhibition: Suki Seokyeong Kang)
- 아트조선, 한 개인의 좁다란 자리, 베니스비엔날레로 확장되기까지, 2019.05.08
- 국제갤러리, 마치 (Kukje Gallery, MARCH)
- BAZAAR, 강서경 작가의 전통과 미술사이, 2019.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