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시 클리먼, 《Kamiit Walking》, 2026.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칼라알리트 일루타트 파빌리온, 희경루 설치 전경. 제공: 작가 및 칼라알리트 일루타트 파빌리온.
몸 없는 신발
광주 희경루에 커피 가루로 만든 길이 놓이고, 그 위에 다채로운 색의
부츠가 배치된다. 신발을 신은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그
모습은 누군가가 길을 따라 걸어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린란드 출신 작가 제시 클리먼(Jessie Kleemann)이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칼라알릿 일루우타트(Kalaallit Illuutaat) 파빌리온에서 선보이는 《카미트 워킹(Kamiit
Walking)》이다. 전시는 2026년 11월 15일까지 열린다.
1959년 그린란드 북서부 우페르나비크(Upernavik)에서 태어난 클리먼은 퍼포먼스와 영상, 설치, 시를 넘나들며 활동해 왔다. 그린란드와 덴마크를 오간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적 정체성과 전통, 신체와 땅, 언어가 변화하는 양상을
탐구한다. 그의 작업에서 몸은 개인의 경험을 표현하는 매체이자, 공동체의
역사와 식민주의의 영향이 드러나는 장소다.

제시 클리먼, 《Kamiit Walking》, 2026.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칼라알리트 일루타트 파빌리온, 희경루 설치 전경. 제공: 작가 및 칼라알리트 일루타트 파빌리온. © Jaeseo Lee
이번 작업은 작가가 가족에게 물려받은 이누이트의 전통 부츠 ‘카미트(kamiit)’에서 출발한다. 물개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은 오랫동안
사용되며 그것을 신었던 사람의 삶과 움직임을 간직하게 된다. 클리먼은 이 신발을 3D 스캔하고 출력해 새로운 설치 오브제로 전환했다. 광주 전시 제작에
참여한 3D Print & Scan 관계자에 따르면, 원래
부츠의 세부를 디지털로 기록한 뒤 출력 과정에서 색이 달라지는 필라멘트를 사용해 여러 개의 복제물을 제작했다. 생활
속에서 사용되던 신발의 형태가 새로운 재료와 색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환은 물려받은 사물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어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부츠의 형태는 남아 있지만 재료와 쓰임은 달라진다. 몸을 보호하고
이동을 가능하게 했던 신발은 이제 그 안에 부재하는 몸을 상상하게 하는 조형물이 된다. 원본에 남아
있던 생활의 흔적이 복제와 반복을 거치면서, 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 여러 사람의 삶과 이동을 떠올리게
한다고 읽을 수 있다.

제시 클리먼, 《Kamiit Walking》, 2026.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칼라알리트 일루타트 파빌리온, 희경루 설치 전경. 제공: 작가 및 칼라알리트 일루타트 파빌리온. © Jaeseo Lee
물려받은 역사,
보이지 않는 노동
작가는 K-ARTNOW에 전한 서면 인터뷰 답변에서, 우리가 물려받는 것은 사물뿐 아니라 역사이며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작업을 이누이트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 안에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담겨 있음을 강조했다. 앞선 세대의 여성들이 걸었던 길을 오늘의 여성들이 이어 걷고, 그들이 했던 일을 현재의 세계에서 계속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작품 속 신발을 보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부츠는
문화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면서, 일하고 이동하며 일상을 유지해 온 몸과 연결된 사물이다. 따라서 이 작업에서 계승되는 유산에는 전통적인 형상뿐 아니라 삶을 지속하기 위해 반복해 온 행위와 노동도 포함된다. 다채로운 색으로 재현된 신발은 이러한 역사를 현재의 시각언어로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
작품의 제작 방식에서도 계승과 변화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클리먼은
전통 신발의 형태를 디지털 기술로 기록하고, 새로운 재료로 다시 구현한다. 이는 문화유산을 현재의 기술과 감각 속에서 해석하는 과정이다.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관한 선택을 통해, 물려받은 문화가 오늘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묻는다.
누구의 유산,
누구의 목소리인가
이러한 질문은 이누이트 공동체가 자신의 문화를 스스로 해석하고 표현할 권리와도 연결된다. 파빌리온 소개 역시 작품을 이누이트의 주권과 변화하는 칼라알릿(Kalaallit)
정체성의 문제로 설명한다. 문화적 자기결정의 관점에서 볼 때, 카미트의 재해석은 공동체 구성원이 자신의 유산을 현재의 언어로 표현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희경루의 길 위에 놓인 신발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앞으로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한다. 그 안에 몸은 없지만, 신발을 만들고 신으며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존재는 남아 있다. 《카미트 워킹》은 가족에게 물려받은 한 켤레의 부츠에서 출발해, 역사와 노동이 오늘의 몸과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 묻는다. 그
길을 따라 관람자는 자신이 물려받은 것과 앞으로 이어갈 것을 함께 생각하게 된다.

제시 클리먼, 《Running Time》 스틸. 제공: 작가. © Christian Brems
작가 소개
제시 클리먼(Jessie Kleemann, b. 1959)은 그린란드
우페르나비크에서 태어나 현재 덴마크 코펜하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이자 시인이다. 퍼포먼스, 영상, 설치, 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누이트의 문화적 유산과 정체성, 여성의 경험, 신체와
자연, 식민주의의 영향을 탐구해 왔다. 2023년 덴마크
국립미술관(SMK)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2024년 덴마크
왕립미술아카데미의 에커스베르 메달(Eckersberg Medal)을 수상했다.
전시 정보
광주비엔날레: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비엔날레 기간: 2026년 9월 5일–11월 15일
파빌리온: 칼라알릿 일루우타트(Kalaallit Illuutaat)
전시명: 제시 클리먼 《카미트 워킹(Kamiit Walking)》
전시 기간: 2026년 9월 5일–11월 15일
전시 장소: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희경루
관람료: 무료
웹사이트: www.gwangjubiennale.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