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 무대에서
사라진 대중예술
여성국극(Yeoseong Gukgeuk)은 여성 배우들이 여성과 남성
배역을 모두 연기했던 한국의 음악극이다. 1940년대 후반 등장해
1950년대 전성기를 누렸으며, 판소리(Pansori)와
창극(Changgeuk)을 바탕으로 노래와 연기, 무용, 의상과 무대장치를 결합했다.

여성국극 전성기 시절 '귀향가' 공연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가 왕자 역의 최고스타 임춘앵, 가운데 앉은 이가 조영숙 선생이다. / 사진: 여성국극제작소
여성국극의 배우들은 여성 인물뿐 아니라 왕과 장군, 무사와 연인 같은
남성 역할도 맡았다. 남성 역할을 전문적으로 연기한 배우들은 낮은 발성과 절제된 걸음걸이, 시선과 몸짓, 의상과 분장법을 익히며 무대 위에 독자적인 남성 인물을
만들어냈다.
여성국극의 대표적인 남성 배역 유형으로는 용맹함과 낭만적 남성성을 함께 보여주는 영웅 역의 니마이(Nimai), 익살스러운 인물인 산마이(Sanmai), 악역인 가다키(Kadaki)가 있었다. 여성 배우들이 이러한 배역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특성이 서로 겹쳐졌고, 성별이 고정된 속성이라기보다 반복되는 연기와 행위를 통해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관객들은 이들의 공연에 열광했으며, 인기 배우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팬 공동체도 형성됐다. 그러나 여성국극은 영화와 텔레비전의 성장, 공연
환경과 사회문화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빠르게 쇠퇴했다. 국가가 보존하고 계승하는 전통예술로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했으며, 한국 현대 공연예술사에서도 주변적인 장르로 남았다.
공연 자료와 대본, 사진, 배우들의
기록이 충분히 보존되지 않으면서 여성국극은 대중의 기억에서도 점차 멀어졌다.
여성국극을 연구해온 정은영
정은영은 2008년부터 장기 프로젝트인《여성국극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여성국극 배우들을 만나고 공연 자료와 사진, 문서, 구술
기록을 수집해왔다.
그의 관심은 과거의 여성국극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거나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한때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여성국극이 왜 국가가 인정하는 전통과 공식적인 역사에서 배제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 있다.

정은영,〈분장의 시간(The Masquerading Moment)〉의 한 장면, 2009 / 사진: 두산갤러리
문서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배우들의 몸은 중요한 아카이브가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배우들의 목소리와 자세, 몸짓과 노래, 움직임과
분장 방식에는 무대에서 축적된 경험이 남아 있다.
정은영은 이러한 신체적 기억을 문서와 사진으로 남겨진 자료와 함께 여성국극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기록으로 다룬다.
작가는 이러한 조사와 만남을 영상과 공연, 그래픽, 콜라주, 설치와 아카이브로 구성해왔다. 그의 작업에서 여성국극은 하나의 역사적 대상인 동시에 전통과 역사, 아카이브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제도는 무엇을 보존하거나 배제해왔는지를 살펴보는 출발점이 된다.
여성국극에서 퀴어 퍼포먼스로
정은영의 작업은 여성국극 배우들의 경험에서 출발해 동시대 LGBTQIA+ 예술가와
공연자들의 실천으로 범위를 넓혀왔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선보인〈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A
Performing by Flash, Afterimage, Velocity and Noise)〉에는 여성국극 2세대 남역 배우 이등우, 전자음악가 KIRARA, 배우 이리, 장애예술가 서지원, 드랙킹 아장맨이 참여했다.
정은영은 서로 다른 세대와 장르, 사회적 위치에서 활동해온 이들을
하나의 다채널 영상 설치 안에 배치하며 여성국극에서 동시대 퀴어 퍼포먼스로 이어질 수 있는 새로운 공연의 계보를 제안했다.

정은영,〈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오디오비주얼 설치, 다채널 영상(부분), 스테레오, 5.1채널 서라운드, 가변설치. / 사진: 정은영
이후 구성된 ‘theatre trilogy’는 정은영의 연구와 작업이
변화해온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작품인〈trans theatre〉는 여성국극 초기 세대의
남역 배우들과 그들의 경험, 기억과 아카이브를 다룬다.
두 번째 작품인〈deferral theatre〉는 동시대 LGBTQIA+ 예술가들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젠더 수행성과 재현, 전통의
재해석을 탐구한다. 정은영은 여성국극을 가부장적 해석에서 분리해 한국 퀴어 문화 실천의 상상적 기원으로
다시 바라본다.
마지막 작품인〈resistant theatre〉는 공연의 범위를 실제
도시의 거리와 광장, 정치적 행동의 현장으로 확장한다.
시민 시위를 다룬 신작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2024년과 2025년 한국에서 이어진 대규모 시민 집회와 행진을 주요하게 다룬다.
작품에는 실제 시위 현장에서 기록한 영상과 이를 양식화해 다시 구성한 장면이 교차해 등장한다. 시민들의 몸과 도시 공간, 권력이 작동하는 장소와 불안정한 장소, 음악과 소음이 다층적인 영상과 사운드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
거리의 노래와 구호, 깃발과 촛불,
응원봉과 타악기, 주먹을 들고 춤추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정은영이 2016년부터 협업해 온 전자음악가 KIRARA의 비트와 결합한다.
정은영은 시민들이 광장과 도로를 점유하고 함께 노래하고 외치며 움직이는 모습을 정치적 행동인 동시에 집단적 공연으로
바라본다.

정은영,〈아직 이곳에 없는 사람들(People, Not-Yet Here)〉, 2026 / 사진: 슈투트가르트 뷔르템베르크 미술협회
〈아직 이곳에 없는 사람들〉에서는 한 인물이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거대한 프로그레스 프라이드 플래그를 춤을
추듯 흔든다. 이 깃발은 기존 무지개 깃발에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흑인과 유색인 공동체를 상징하는 색을 더한 것이다.
깃발의 화살표 형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변화와 진전을 가리킨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이루어진 이 퍼포먼스는 현재의 정치 제도 안에서 충분히 대표되지 못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환기한다.
여기에서 극장은 건물이나 정해진 무대로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공공장소에 모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공동의 행동을 만들어가는 거리와 광장이 새로운 극장이 된다.
배우와 관객의 구분도 흐려진다.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정치적 행동의
주체인 동시에 몸짓과 목소리, 움직임을 통해 집단적 장면을 만들어내는 수행자가 된다.
정은영은 오랫동안 사회가 부여한 역할과 위치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왔다.
여성국극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당시 사회의 성별 규범과 다른 남성 인물을 만들어냈다면, 에 등장하는 시민들은 거리에서 새로운 집단적 존재 방식과 정치적 행동을 형성한다.
전시 제목의 ‘저항’은
사람들이 기존 질서가 부여한 위치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몸과 목소리로 공적 공간에 등장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전시장에 만들어진 또 하나의 광장
이번 전시는 ‘theatre trilogy’의 세 작품을 각각 분리된
영상으로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커튼과 무대 구조, 영상
장치와 관람 공간을 연결해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공간 설치로 구성했다.
전시 중앙에는 광장을 연상시키는 열린 공간이 마련됐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잠재적인 집회 장소로 계획된 이 공간은 영상 속 거리와 실제 전시장을 연결한다.
커튼과 무대 구조는 정은영 작업의 공연적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도시가
지닌 연극성과 공공장소가 무대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시장은 도시와 극장, 관람 공간과 만남의 장소 사이에 놓인다.
이곳은 작품을 감상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고 공연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플랫폼으로 사용됐다.
전시와 연계해 2026년 7월 6일부터 12일까지 열린《queering
resistance》에는 강연과 토론, 상영, 공연, 콘서트와 워크숍이 포함됐다. 한국과 독일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예술가와
활동가들이 참여해 퀴어 문화와 정치적 저항, 비규범적 시민권과 공동체의 실천을 논의했다.

정은영,〈병든 서울(Sick Seoul)〉, 2026 / 사진: 슈투트가르트 뷔르템베르크 미술협회
이를 통해《resistant theatre》는 완성된 작품을 제시하는
전시를 넘어 실제 만남과 논의, 공연과 정치적 사유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확장됐다.
정은영의 작업은 여성국극 배우들의 무대에서 동시대 퀴어 공연자들의 몸으로, 다시
시민들이 모인 거리로 이동한다. 전시장 역시 서로 다른 참여자와 목소리가 관계를 형성하는 임시적인 광장이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작업의 중심에는 누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보이고 들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resistant theatre》는 과거의 아카이브와 현재의 정치적
장면을 연결하며, 공연이 제도화된 극장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은영 작가 /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작가 소개
정은영은 1974년 인천에서 태어나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조형예술과 여성주의 이론을 공부해 학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리즈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예술 연구를 가르치고 있다.
정은영은 주변화된 개인과 집단의 욕망과 열망이 특정한 사건과 만나 저항의 실천,
역사와 정치로 변화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주요 장기 프로젝트로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한《동두천 프로젝트》와 2008년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여성국극 프로젝트》가 있다.
정은영은《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통해 여성국극 남역 배우들의 삶과 기억, 무대
안팎의 경험과 개인 아카이브를 추적해왔다.
여성국극은 일본 식민 통치에서 해방된 지 3년 뒤인 1948년 등장해 1950년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에서 근대 한국의 국가적·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정책이 강화되던 1960년대의 사회정치적 변화 속에서 점차 사라졌다.
정은영은 영상과 공연, 설치, 그래픽과
아카이브 연구를 통해 기존의 성별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통과 역사, 문화적 기억이 구성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그의 작업은 역사적 자료와 아카이브를 퀴어한 관점에서 다시 읽으며, 한국
근대사회의 가부장적이고 이성애 규범적이며 국가주의적인 서사에 대응하는 다층적인 대항 서사를 만들어낸다.
정은영은 2013년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2015년 신도리코 미술상,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2019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참여했다.
아시아퍼시픽 트리엔날레(2015), 광주비엔날레(2016), 타이베이비엔날레(2016–2017), 상하이비엔날레(2018) 등 다수의 국제 전시와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싱가포르 NTU 현대미술센터, 뒤셀도르프
라인란트·베스트팔렌 미술협회, 몬트리올 레너드 & 비나 엘런 아트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뷔르템베르크 미술협회(Württembergischer Kunstverein Stuttgart) / 사진: 뷔르템베르크 미술협회
뷔르템베르크 미술협회
뷔르템베르크 미술협회(Württembergischer Kunstverein
Stuttgart)는 1827년 설립된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비영리 현대미술기관이다.
독일의 쿤스트페어라인(Kunstverein) 전통을 이어오며 전시와
연구, 출판, 강연, 퍼포먼스와
공공 프로그램을 통해 동시대미술의 새로운 담론을 소개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역사와 기억,
사회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국제적인 전시와 프로젝트를 꾸준히 개최해 왔으며, 실험적이고 비판적인
동시대미술을 위한 주요 플랫폼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시 정보
전시명: siren eun young jung《resistant theatre》
전시 기간: 2026년 4월 18일–8월 2일
개막: 2026년 4월 17일 오후 7시
전시장: 뷔르템베르크 미술협회, 슈투트가르트, 독일
영문 기관명: Württembergischer Kunstverein Stuttgart
주소: Schlossplatz 2, 70173 Stuttgart, Germany
큐레이터: Nathalie Boseul Shin
협력: Hans D. Christ, Iris Dressler
주요 구성: 다채널 영상 및 사운드 설치, 아카이브
설치, 연계 공공 프로그램
웹사이트: https://www.wkv-stuttgart.de/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