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b. 1963)은 역사,
문화적 맥락을 함축한 회화, 설치, 조각, 퍼포먼스, 영상,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작업을 이어왔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현실과 비현실,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개인과 타인, 사회와 제도, 문화적
차이 안에서 발생하는 근원적인 질문들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이처럼 작가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존재해온 다양한
근원적 차이들을 여러 매체를 통해 번역해오며 폭넓은 스펙트럼을 이루어 왔다. 아울러, 작가는 예술을 통한 치유와 재생의 기능을 더한 작업들을 선보이며 관객들과 소통해 오고 있다.
1990년대
초반, 이수경은 주로 모더니즘의 순수성과 독창성, 그리고
자기 지시성(self-reference)을 비판하는 맥락에서의 키치,
레디메이드, 혼성모방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방법론을 활용한 작업들을 제작했다. 또한 작가는 대량생산된 상품이나 매스미디어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변조하여 대중매체 및 사회 제도가 만들어내는
관습화된 것들을 비트는 작업 등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0년에
선보였던 퍼포먼스 작업 〈예술가의 제복 2000〉은 해체되어 재조합된 경찰복, 의사 진료복 등의 레디메이드
제복을 통해 사회 제도 안에서 개인의 행동 양식에 대한 실험이었다. 작가는 6가지 한국의 제복들을 부분으로 해체하여 소매, 바지 모양, 옷감 종류, 색상에 따라 분류한 설문지를 약 200명의 작가들로 하여금 〈예술가의 제복 2000〉에 적합한 부분들을
선택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70개의 제복이 탄생했으며, 이 제복을 착용한 70명의 사람들은 미술관의 오프닝에 참석해 그
제복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행동들을 보여주었다.
이수경, 〈불꽃〉, 2005-ongoing ©이수경
2004년경
이수경은 심리치료 상담을 받으며 매일 하나의 원 안에 이미지를 그려 넣는 ‘만다라 미술 치료법’을 알게 된다. 작가는 이를 자신의 작업에 반영하며 치유의 과정으로서의
드로잉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 중, 〈불꽃〉(2005-) 시리즈는
불교의 스님들이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한 가지에 몰두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불꽃이란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질문만을 끊임없이 해가며 그려낸 작품이다.
이수경은 한국, 일본, 중국에서
부적이나 불화에 주로 쓰이던 경면주사를 이용해 한지 위에 반복적인 패턴을 명상에 가까운 자세로 매일 같은 시간에 그렸다. 작가는 〈불꽃〉 시리즈를 마치 수련을 하듯 그려내던 어느 날 붓이 자동으로 움직여 스스로 그린 듯 한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생성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2012년에는 〈불꽃〉 드로잉의 일부분을 선택해 그 이미지를 디지털 프로그램을 통해 좌우 대칭이 되도록 하여 엄격한 규칙하에 제작되는 불교 탱화의 제작 방식으로 〈불꽃 변주〉 시리즈를 제작하기도 했다.
2014년
최면 치료를 통한 전생으로의 회귀를 경험하게 된 이수경은, 윤회와 전생이라는 동아시아 철학의 주요 소재에
대한 작가 개인의 경험을 〈전생 역행 그림〉(2014-) 시리즈로 표현해내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생 역행 그림〉 시리즈는 작가 자신의 무의식으로의 여정이자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담아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수경의 작업에서 현실과 비현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여행’이라는
소재는 1997년 작가가 집필한 동화 「먼길 이야기」부터 다루어져 왔다.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여행의 공통점은 주체가 여행을 다니며 만나는 타자를 통해 나를 새롭게 인식하며 내면을
치유하고 성장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수경, 〈번역된 도자기 알비솔라〉, 2001 ©이수경
이수경의 대표작 〈번역된 도자기〉 시리즈는 2001년 이탈리아 알비솔라 비엔날레 참여를 계기로〈번역된 도자기 알비솔라〉(2001)를
제작하며 시작되었다. 작가는 이탈리아의 도자산지로 유명한 알비솔라(Albisola)에 거주하는 도예가에게 조선 백자에
대한 시를 읽게 하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18세기 조선백자 스타일의 도자기 12개를 제작해달라 요청했다. 이를 통해 조선백자는 한 이탈리아 도예가에
의해 새롭게 번역되었다.
이후에는 직접 작가가 도예 명인들의 작업실에 방문하여 버려지고 깨진 도자기 파편들을 조각조각 이어 붙이고, 틈새에 금을 입혀 새로운 도자기 조각으로 재탄생하는 작업으로 발전시켰다. 이때
도자기 파편들은 북한의 도자기를 포함해, 한국의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에서 비롯되었으며, 작가의 작업을 통해 파편들 안에 담긴 다양한 시대와 장소의 맥락들은 하나의 새로운 조형물로 뒤얽히게 된다.
이수경은 자신만의 번역의 과정을 거쳐 버려진 도자기 파편들에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내고, 더 이상 취약하지 않은 무한한 증식을 형성한다. 가령, 마법의 기능을 가진 용의 아홉 아들에 대한 중국 신화를 모티프로 한 〈이상한 나라의 아홉 용〉은 한국 문화에서도 숭고한 존재로 여겨져 온 용을 도자기 파편들로 제작해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어진 고리를 연결시키고자 재해석한 작업이다.
이처럼 이수경은 전통과 현대, 동양성을 담아내는 동시에 치유와 재생의 의미를 미술 작품으로 제시해 왔다. 이수경은
도자기 파편을 연결해 새로운 형태로 되살리는 〈번역된 도자기〉 시리즈에 이어, 다양한 수공예 재료들의
파편을 수직 구조의 왕관 형태로 재탄생시키는 〈달빛 왕관〉(2017-) 시리즈를 선보였다.
신라 금관과 백제의 금동대향로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권력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 위가 아닌 받침대로 두고, 이 위로 여러 파편들을 이어 붙인
조형물을 마치 탑처럼 쌓아 올렸다. 그리고 〈달빛 왕관〉을 이루는 철,
놋쇠, 유리, 진주, 자개, 원석, 거울 파편
등의 파편들은 천사, 기도하는 손, 십자가, 용, 식물, 만화 주인공과
요술봉 등 다양한 상징의 무늬와 형상들로 드러나게 된다.
〈번역된 도자기〉에서 서로 다른 깨진 파편들이
이어져 새로운 형태, 새로운 존재로 재생되었듯이, 〈달빛
왕관〉 또한 조각난 재료들과 기존의 신화적, 종교적 맥락에서 이탈한 상징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이수경의 이러한 작업은 비단 유약한 파편들을 다시 새로운 형태로 온전하게 이어 붙이는 일 뿐만 아니라,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작가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고 그 경험을 타자들과 공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업을 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환희에 자주 휩싸였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작업에 집중하는 동안은 늘 지독한 사랑에 빠진 것처럼 저의 유약함을 온전히 드러내고 싶어요. 부서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과 작업 태도를 지켜나가고 싶습니다.” (노블레스, 이수경 인터뷰, 2022.09.08)
이수경은 한국 서울의 더페이지갤러리(2022), 영국 런던의 마시모 데 칼로 갤러리(2020), 이탈리아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미술관(2019), 미국 휴스턴의 아시아 소사이어티 텍사스 센터(2015), 한국 서울의 아뜰리에 에르메스(2015), 대구의 대구미술관에서(2015), 대만 타이베이현대미술관(2015), 한국 서울의 아르코미술관(2010)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또한 이수경은 브리스톨 박물관 및 미술관(2019), 이탈리아 우디네의 카사 카바치니(2018),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2017), 아랍에미레이트 샤르자의 마라야 아트센터(2015) 등에서 개최된 다수의 국제 주요 전시에 참여하였다.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보스톤 순수미술 박물관, 스펜서 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의 이페마 아르코 컬렉션, 일본의 에치코 츠마리 시티
컬렉션, 런던의 영국박물관, 홍콩의 M+ 등 다수의 기관에서 이수경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