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아(b. 1967)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쉽게 흩어져 가는 일상의 장면이나 사물들의 특성을 포착하여 평범함의 시적인 측면을 일깨우는 작업으로 국제 무대에서 꾸준한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작업은 시, 소설, 설치, 조각, 회화, 무빙 이미지, 음악, 건축 프로젝트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현실과 비현실, 또는 존재와 비존재 간의 경계 너머를 지향한다.
구정아는 일상적인 공간에 사소한 요소들을 섬세한 구조로 배치하고 연결하여 시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왔다. 예를 들어, 1998년에 선보였던
〈Oslo〉의
경우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하얀 가루만으로도 공간의 분위기를 미묘하게 변화시킨다.
그가 사용하는 소재들은 주로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이다. 〈Oslo〉의 하얀 가루 또한 가장 많이 복용되는 약 중 하나인 아스피린을 으깨어 만든 것이었다. 이 외에도 작가는 구겨진 종이, 버려진 장난감, 담배 등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하고 연약한 소재들을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끌어와 작품화한다.
한편 구정아는 소리나 빛과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를
사용하여 일상적인 장소에 뜻밖의 연출을 조성하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가령,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야외 공원에서 선보였던 고목나무 작품은 주변 환경에 동화되어 눈에 띄지 않지만 관객이
가까이 다가가면 부르르 떨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2010년에
선보인 〈Dr. Vogt〉는
분홍색 플로어를 통해 공간 전체를 형광 분홍색 빛으로 연출한 설치 작업으로, 사진 인화지에 파란색 펜으로
그려진 드로잉들을 함께 설치하여 전시장의 빛과 바닥의 형광 분홍색에 의해 시야가 산란되는 경험을 만들어낸다. 구정아는
이처럼 특수한 기계 장치 없이 단순히 빛과 색, 종이의 조합으로 낯선 시지각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
2012년
구정아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스케이트 파크’ 시리즈를 처음
선보이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작가는 프랑스 정부와 함께 낙후된 도시였던 프랑스 남부 바시비에르를
젊은이들이 찾는 곳으로 변모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첫 번째 ‘스케이트 파크’를 제작하게 된다.
구정아는 아이들이 바시비에르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견학을 왔을 때 지루해 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스케이트 파크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작가는 낙후된 유휴공간을 인광 안료가 칠해진 스케이트 파크로 변모시켰다. 구정아의 스케이트 파크는
밤이 되면 낮에 태양으로부터 흡수한 빛을 내뿜으며 일상적인 공간에서 비일상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이 프로젝트는 이후 10여 년간 세계 각국에 설치되어 확장되었다. 2015년 리버풀 비엔날레, 2016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그리고 2019년에는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선보여졌으며 장소마다 갖는 특성에 맞춰 조금씩 다르게 제작되어 설치되었다.
구정아, 〈Density〉, 2019 ©Acute Art
구정아는 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해 기존의 드로잉을 비물질적인 형태로 변모시키는 작업 〈Density〉(2019)를 선보이기도 했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매일의 드로잉에서 출발한 〈Density〉는 스마트폰 AR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현실 공간에 부유하는 얼음 조각을 띄우는 작업이었다. 이는 일상 속 평범함을 낯설게 만드는 기존 작업의 연장선으로, 현실에서 불가능한 상황을 AR 기술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새로운 공간으로 초대한다.
〈Density〉는 이후 2023년 PKM 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서 손에 잡히는 물질 조각으로 재탄생되기도 하였다. 스크린 안에서 공중부양하던 얼음조각은 자석의 힘을 통해 현실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며 현실과 비현실, 물질과 비물질 간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구정아 – 오도라마 시티” 2024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 전경. 사진: Mark Blower ©필라 코리아스 런던, PKM 갤러리 서울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작가로 선정된 구정아는 ‘향’을 통해 고향에 얽힌 기억을 소환하는 조각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향은
작가가 1996년부터 반복적으로 사용해 왔던 소재 중 하나로,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의 기억과 정서를 건드리는 매체이다.
작가는 남한과 북한 사람을 포함한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국의 도시, 고향에 얽힌 향의 기억’에 대한 설문을 수집했고, 그렇게 모인 600편의 사적인 글 중 16편을 선별하여 이를 토대로 16개의 향을 만들었다. 도시 향기,
밤 공기, 사람 향기, 짠내, 공중목욕탕 등 다양한 사람들의 기억의 향들은 디퓨저 조각을 통해 한국관과 관객의 신체에 침투한다.
동시에 디퓨저 조각 〈KANGSE SpSt〉는 작가가
1990년대부터 확장해 온 ‘우스(OUSSS)’라는 개념을 상기시키는 메아리로서 작용한다. ‘우스’란 수수께끼 같은 우주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단어나 형태소, 물질이나 마음의 상태, 물질과 비물질의 영역을 뛰어넘어 원하는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는 만능 존재이다. 이러한 다종다양한 ‘우스’의 세계는 종종 태아를 연상시키는 중성의 생물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구정아, 〈MYSTERIOUSSS〉, 2017 ©구정아
이처럼 구정아는 향, 빛, 온도, 사운드 등 눈에 보이지 않고 명확한 경계가 없는 요소들을 활용함으로써 일상의 평범함을 낯설고 시적인 것으로 변모시키며 소소하고 내밀한 경험을 이끌어 낸다. 그의 작업 안에서 관객은 자신의 신체를 통해 우리를 둘러싼 경계를 너머 현실 이면의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된다.
“예술은 공생과 공동의 미래를 창조하죠. 다양한 감각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조각, 빛, 공간으로 구현된 저의 스케이트 파크 작품이 시사한 작품의 공공성도 빛의 발산이라는 현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요.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은 과거
경험에만 기반해서는 쉽게 예측되지 않기 때문에 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고가 필요합니다. 많은 허구는
어쩌면 사실을 둘러싼 다중 우주로도 이해할 수 있겠죠.” (보그, 구정아 인터뷰, 2024.02.20)
구정아 작가. 사진: 김제원 ©PKM 갤러리
구정아는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2012), 디아파운데이션 및
디아비콘(2010), 파리 퐁피두센터(2004)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으며, 이외 베니스비엔날레(2014,
2009, 2003, 2001, 1995), 리버풀비엔날레(2010), 부산 및 광주비엔날레(2020; 2014, 2002, 1997)와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2010, 2004, 2002), 루이비통 파운데이션(2015), 국립현대미술관(2015) 등의 유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2년 휴고보스상 최종 후보, 2005년 에르메스 미술상 수상, 2016년 주영한국문화원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구정아는
말뫼 쿤스트홀(2024), 신국립 미술관(2024), 하우스
데 쿤스트(2025), 아스펜 뮤지엄(2026) 등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