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b. 1974)는 우리의 일상 속 수많은 찰나의 순간들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회화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전시를 준비하는 미술관의 모습, 공항에서의 낯선 사람들의 모습, 촬영장의 백스테이지 등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일상적인 장소들에 주목한다.

박진아, 〈안부를 전하며〉, 2002 ©박진아

박진아의 작업은 일상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우연한 찰나의 순간들을 스냅사진으로 기록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초기작들은 스냅사진이나 엽서, 혹은 여권 사진과 같이 작가 주변에 있는 파운드 이미지를 활용해 짧은 이야기를 담는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다.


박진아, 〈정원〉, 2005 ©박진아

그 중, 4개의 프레임으로 화면이 나누어져 있는 〈로모그래피〉(2004-2007) 시리즈는 토이 카메라 형태의 작은 필름 카메라를 보조 도구로 활용하여 제작한 회화 작업이다. 당시 작가가 사용한 카메라는 대충 감으로만 피사체를 찍을 수 있는 저렴한 기종으로, 4개의 렌즈가 달려 있어 1초 동안 총 네 컷을 찍을 수 있는 제품이었다.

〈로모그래피〉(2004-2007) 시리즈는 한번에 네 컷을 연달아 촬영하는 카메라의 순간성과 형식에 대한 작가의 실험이 녹아 든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이후의 작업들에 연속 장면들이 등장하는 등 회화로써 시간을 담는 방법에 대한 실험이 본격적으로 구체화된다.

박진아, 〈사다리 02〉, 2010 ©성곡미술관

그의 초기 작업들은 주로 작가의 주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2010년 무렵부터는 전시장의 장면들을 그리기 시작하며 그의 회화에 사적인 기억과 기록의 목적이 교차하기 시작한다. 박진아는 주로 자신이 참여한 전시의 준비 과정을 관찰하고 촬영했다. 특정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작업은 이후에도 계속되며 낯선 이들의 모습이 그의 화폭에 주로 담기기 시작했다.

박진아, 〈두 층〉, 2011 ©박진아

박진아의 회화는 현실의 순간을 기록하는 리얼리티적인 성격을 가지지만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다소 함축적이고 느슨하다. 불분명한 윤곽선과 자세하지 않은 묘사는 오히려 작가가 담아내고자 했던 ‘순간성’을 극대화하곤 한다.

박진아는 이러한 자신의 표현 방식에 대해 “흐릿하고 느슨한 그리기는 이 순간이 금방 변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고 말하며, “겹겹이 칠하는 붓질을 통해 그림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박진아, 〈활주로가 보이는 창〉, 2013 ©캔 파운데이션

2013년부터 박진아는 공항에서 마주한 익명의 사람들을 그림으로 담기 시작했다. 이는 주변인이 아닌 낯선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그의 그림에 등장하기 시작한 작업이다. 작가는 아는 이를 그릴 때와 달리 모르는 사람들을 그릴 때 더욱 거리감을 가지고 관찰하게 된다고 말한다. 특히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항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으로 인해, 작가는 그 순간의 인상만으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림을 그렸다.


박진아, 〈크루〉, 2015 ©캔 파운데이션

지난 작업에서 작가는 자신의 주변 환경이었던 미술관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작가나 스태프들을 그림으로 그렸더라면, 이후 그의 관심사는 공연 리허설이나 영화 촬영 현장 등으로 확장되었다. 공연과 영화 현장을 담은 그림들은 장르 특성상 미술관의 그림들보다 인물의 수가 많고 복잡한 구성을 갖게 되었다.

그로 인해 당시 그의 작업에는 부감 시점(높은 위치에서 피사체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진 것들이 많다. 작가는 이에 대해 다수의 인물들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하기 위한 장치로서 사용한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박진아, 〈의논〉, 2016 ©캔 파운데이션

화면 속 인물들의 배치와 구도에는 작가의 의도가 다분하게 반영된다. 예를 들어, 작가는 여러 장의 사진을 촬영한 다음 그림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원하는 구도를 만들기 위해 여러 사진을 겹쳐 그림에 반영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같은 인물이 두 번 등장하기도 하며 다른 날 찍은 사진이 한 화면에 합쳐져 그려 지기도 한다.

또한 박진아는 중앙으로 집중되거나 한쪽으로 쏠린 구도를 화면에 넣지 않는다. 이에 대해 그는 “하이어라키(hierarchy)가 없는 수평적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박진아, 〈여름 촬영〉, 2015 ©박진아

이러한 구도와 배치를 다룸에 있어서, 인물들의 제스처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박진아는 손을 들어 올리거나 고개를 숙이는 반복해서 하는 단순한 동작, 즉 특별한 의미나 상징이 부과되지 않은 평범한 동작들에 주목한다. 작가는 이러한 의도되지 않은 무심코 나온 동작들, 또는 무엇을 하는 행동인지 알 수 없는 ‘사이에 낀 동작들’을 골라 내어 화면을 구성한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어떠한 내러티브를 가지지 않고 다소 단순하고 납작하게 그려진다. 그는 인물을 그리지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초상화처럼 그리기 보다는 오히려 풍경화처럼 인물을 다루고 있다.

박진아, 〈공원의 새밤 09〉, 2020 ©국제갤러리

한편 〈공원의 새밤〉(2019-2020) 시리즈는 밤이 지닌 특유의 정서를 담고 있다. 이 시리즈는 독일에서 폭죽을 터트리며 새해를 맞이하는 장면을 그리는 데서 출발했다. 어두운 밤 시간대 불꽃이 이는 순간의 모습은 그림 안에 마치 오브제와 같은 하얀 덩어리로 표현되곤 한다.

박진아, 〈문탠 04〉, 2007 ©국제갤러리

작가가 밤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광욕’으로 번역할 수 있는 〈문탠〉(2007)이라는 이름의 작업은 한밤의 공원 나들이를 그린 연작이다. 작가는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 한밤의 장면들을 사진으로 기록한 다음 그림으로 옮겼다. 화폭 안에는 자연의 달빛보다 인공조명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표현되어, 그림 속 인물들은 마치 어두컴컴한 연극 무대 위 배우의 모습처럼 보인다.

박진아, 〈키친 01〉, 2022 ©국제갤러리

현재 국제갤러리 서울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박진아의 개인전 “돌과 연기와 피아노”에서 선보이고 있는 그의 최근작 〈키친〉(2022-2024) 시리즈는 레스토랑 주방의 현장을 담고 있다. 이 작업 또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에 몰두하고 있는 인물들을 담는 작업의 연장선으로, 분주한 주방 현장에서 관찰한 순간의 우연한 장면들이 재구성되어 나타난다.

〈키친〉에서 무언가에 열중하는 인물들 못지않게 화면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오히려 그 내부의 복잡한 조리대와 다양한 조리 도구들, 그리고 공중으로 피어 오르는 연기이다. 작가는 화면 내부에 위계가 없는 그림을 지향하듯 이 안에 나타나는 그 누구도, 무언가도 주인공으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박진아, 〈피아노 공장 06〉, 2024 ©국제갤러리

이처럼 박진아는 카메라를 활용해 연출되지 않은 일상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그에게 사진의 기능은 눈으로는 놓쳤을 우연한 순간들의 장면을 붙잡고 ‘전환의 상태’에 놓인 이미지를 기록하는 데에 그친다.

박진아는 ‘회화는 이미지이자 물질’이라 규정하며, 회화의 고유한 물질성에 집중해 왔다. 사진으로 기록된 우연의 찰나들은 이후 회화라는 물질을 통해 오랜 시간에 걸쳐 화면 위에 겹겹이 쌓아 올려지게 되고, 이로써 새로운 시간성과 물질성을 입게 된다.

“나는 회화가 이미지이면서 물질이기도 하다는 데 큰 매력을 느낀다. 회화는 현실을 기록하고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고 시각적 쾌감을 주는 등 이미지가 할 수 있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지지대 위에 발려진 물감 자체이기 때문에 특히 그리는 과정에서는 물질성을 크게 인지하게 된다.

어떤 화가에게는 이 두 가지 측면이 서로 모순되기에 이 중 한 쪽을 훨씬 강조해 주어야 할 수도 있겠다. 나에게는 이 두 측면을 팽팽하도록 균등하게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게 회화 매체의 장점으로 보이고 다루어 보고 싶은 동기가 된다.” (박진아, 작가 노트)

박진아 작가 ©노블레스

박진아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런던 첼시미술대학에서 순수미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휴먼라이트”(국제갤러리 부산점, 2021), “사람들이 조명 아래 모여 있다”(합정지구, 2018), “네온 그레이 터미널”(하이트컬렉션, 2014), “스냅라이프”(성곡미술관, 2010) 등이 있다.

또한 성곡미술관(2024), 부산시립미술관(2023), 서울대학교미술관(2023), 대구미술관(2022), 인천아트플랫폼(2021), 뮤지엄 산(2020), SeMA 창고(2019), 삼성미술관 플라토(2015), 뒤셀도르프 플란디 갤러리(plan.d. produzentengalerie e.V.)(2015), 국립현대미술관(2015), 아르코미술관(2014), 광주비엔날레(2008)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하였고, 2010년에는 에르메스 재단이 후원하는 에르메스 미술상 최종후보로 선정된 바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대구미술관, 금호미술관 등 다수의 주요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