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실험 미술을 발전시켰던 소그룹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실험 미술은 다양한 단체들의 활동을 통해 전개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대표적으로 ‘무동인’, ‘오리진’, ‘신전동인’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중반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한국 실험 미술은 장르 간 경계를 허물며 미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일상에 예술을 접목하며 관객과의 소통을 꾀하였다.
앵포르멜 시기와 단색조 회화 시기 사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중반의 한국 미술계는 오랫동안 ‘혼란기’로 불렸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그만큼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지며 우리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이때 등장한 다양한 실험적 미술 활동을 통해, 이전까지 회화와 조각으로만 전개되었던 한국 미술계는 오브제 미술과 행위예술, 개념미술, 환경예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당시 펼쳐졌던 미술을 이제 한국의 실험 미술로 구분하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 글로벌 미술사라는 맥락에서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여기에 동참했던 작가들은 여러 그룹을 만들어 기성 미술계와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변화의 조짐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57년이다.
1957년은 한국 현대미술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이다. 이때부터 다수의 작가들이 기성 세대 미술계와 다른 방향을 추구하며 다양한 새로운 미술 단체와 협회를 결성했기 때문이다. 1957년 한 해 동안 ‘모던아트협회’(1957~1960), ‘창작미술협회(1957), ‘신조형파’(1957~1959), ‘현대미술가협회’(1957~1960)와 같은 단체들이 한꺼번에 출범했다.
한 해 동안 왜 이렇게 많은 단체들이 갑자기 만들어졌을까? 발단은 1956년 국전을 놓고 빚어진 기성 작가와 젊은 작가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젊은 세대는 기성 미술계의 권위주의적이고 획일적인 분위기에 피로감을 느끼고 예술의 본질을 강조하며 혼란스러운 시대정신에서 벗어나고자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Left to right: artists Yang Deok Su, Jung Kangja, Chung Chan-seung, Kim Inhwan, Shim Sun Hee, and Kukjin Kang standing in front of Jung Kangja’s artwork ‘Kiss me’ (1967), “The Young Artists Coalition Exhibition” at the National Information Center, Seoul. ⓒ National Information Center.
오광수는 그의 저서 “한국현대미술의 미의식”에서 당시 이렇게 많은 단체들이 생겨난 이유는 시대적 분위기와 미술 내적 움직임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당대 젊은 세대들은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었다. 이들에게 미술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존재 자체에 대해 고민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62년부터 1964년까지 활동한 그룹 ‘악뛰엘’은 실험적 미술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30대 전위미술 작가들 중심으로 구성된 ‘악뛰엘’은 추상 미술을 벗어나 오브제를 도입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실험 미술 단체라고 하면 ‘악뛰엘’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무동인’(無同人, 1962~1967)을 들 수 있겠다. ‘무동인’은 오브제 미술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던 그룹으로, 홍익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재학생 9인이 모여 결성한 단체였다.
이들은 활동 초기에 앵포르멜 경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룹에서 개최한 두 번째 전시인 “현대미술실험전”(1967)에서는 폐기물, 수술용 응급 의료기구, 깨진 그릇, 고무장갑, 해골 마스크, 구두, 방독면 등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했고, 네오다다, 누보레알리즘, 구타이 그룹의 활동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비록 오브제 미학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무동인’은 당시 젊은 작가 세대 사이에서 일어났던 변화를 적극 반영한 활동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1967년 ‘무동인’은 한국 실험 미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시로 평가 받는 “청년작가연립전”(1967.12.11~1967.12.16, 이하 연립전)에 참여한다. 함께 참여했던 그룹으로는 ‘오리진’과 ‘신전동인(新展同人)’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세 그룹은 한국 실험 미술에 영향을 끼쳤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팝아트, 네오다다, 옵티컬 아트, 환경미술, 해프닝 등 1960년대에 전개된 세계 현대미술의 경향을 전체적으로 포괄하였다. 전시는 비록 작품에 대한 이론적 바탕을 구축하지는 못했지만, 젊은 작가들의 적극적인 도전 정신을 보여주었다.
‘오리진’(1963 설립)은 초기에 앵포르멜 경향의 활동을 주로 펼쳤다. 그러나 이들은 “연립전”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활동 경향을 전환했다. 이때부터 ‘오리진’의 모든 멤버들은 앵포르멜에 반(反)하는, 이성적이고 논리 정연한 기하학적 형태와 구조의 조형언어를 추구하는 기하학적 추상을 전개했다. 이러한 ‘오리진’의 활동은 이후 한국 추상 미술의 지형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 ‘신전동인’은 ‘무동인’과 함께 설치 작품에 오브제를 활용하고 해프닝이나 퍼포먼스를 통해 사회 현실을 다루는 접근 방식을 추구했다. 이들은 환경을 재인식하며 시각을 중심으로 한 2차원의 캔버스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적 체험을 요하는 3차원의 해프닝으로 작품의 범위를 확장했다. 이러한 변화는 작품과 관객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예술가들이 관람객과 소통하는 작업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무동인’과 ‘신전동인’의 활동은 특히 이후에 등장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vant-Garde의 약자, A.G)’와 ‘조형예술학회(Space와 Time의 약자, S.T)’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연립전” 이후 ‘무동인’은 ‘오리진’과는 A.G의 결성을 논의했고 신전동인과는 해프닝 예술을 소개하거나 시연하는 데 앞장섰다.
“연립전”에 참여한 그룹의 활동은 이후에 한국 실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던 ‘A.G’(1969–1975)와 ‘S.T’(1969–1981) 그룹뿐만 아니라 ‘제4집단’(1970), ‘신체제’(1970~1974), ‘에스프리’(1972~1974) 등이 등장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해당 시리즈는 다음 주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References
- 국립현대미술관(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 구겐하임 재단(The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의 미의식”, 재원,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