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실험 미술 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작가들이 무수히 많다. 이번 글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실험 미술 지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몇몇 작가들을 소개한다.
Sung Neung Kyung, 'Smoking,' 1976 (detail), gelatin silver print, 17 prints, 25.4 × 20.3 cm (each).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 London.
서구와 일본의 다양한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과 격동적인 사회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실험 미술은 기성 세대의 형식주의에 반기를 들고 탈회화적 경향을 보였다. 당시의 젊은 예술가들은 소규모 그룹을 결성하여 전시회를 개최하고 협회지를 발간하며 전위 예술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에 참여했던 작가들에는 누가 있을까?
한국 실험 미술 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작가들이 무수히 많다. 이번 글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실험 미술 지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몇몇 작가들을 소개한다.
‘A Happening with a Vinyl Umbrella and a Candle,’ (1967). Performed by Mudongin (Zero Group) and Sinjeon dongin (New Exhibition Group). Photograph. Courtesy of the artists and the Asia Culture Center.
강국진 (1939-1992) 작가는 실험 미술을 하는 청년 작가 그룹 ‘논꼴’의 동인이었다. 196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기들과 서울 논꼴 마을의 외딴 2층집을 빌려 ‘논꼴’ 동인을 만들어 활동했다. 이들은 세 번의 전시를 열고 동인지 ‘논꼴 아트’를 펴냈다. 1967년 강국진은 정찬승, 정강자 등과 함께 신전동인을 결성하고 ‘청년작가연립전’에 참가했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한국 최초의 그룹 퍼포먼스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벌였다.
이듬해인 1968년에 그는 “종합미술대전”에 참여해 한국 최초의 테크놀로지 작품 ‘시각 I, II’를 발표해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새로운 시각적 지각의 경험을 선보였다. 그는 다른 작가들과 다양한 협업을 통해 퍼포먼스를 벌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집단 퍼포먼스 ‘색 비닐의 향연’을 공동 기획했으며, 6월에는 ‘투명풍선과 누드 해프닝’과 ‘화투놀이’를 서울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시연했다. 또한 10월에는 제 1한강교 아래 모래 사장에서 정강자, 정찬승과 함께 문명 비판과 현실 비판의 내용을 담은 ‘한강변의 타살’을 벌였다.
작가는 1973년부터 입체와 설치 작업에 전념하여 천, 노끈, 밧줄, 골판지 등의 오브제로 물질의 특성과 인식의 현상을 탐구하는 개인전 ‘형(形)의 상관’을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었다. 1975년부터는 선 긋기를 중심으로 회화작업을 재개했다.
Kim Kulim, Leaflet image for ‘The Meaning of 1/24 Second’ (1969). Off-set print. Courtesy the artist.
김구림(b. 1936) 작가는 대구에서 학업을 하다가 우연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잡지 “라이프”지를 보고 충격을 받아 전업 전위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1969),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한국 최초의 메일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1970),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공간구조 69’(1969) 등을 선보여 다양한 전위 예술 형식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A.G.(Avant-garde의 약자,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의 주요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으며, 1970년에는 다양한 분야의 젊은 예술인과 지식인들로 구성된 전위 예술 집단인 ‘제4집단’을 결성하여 미술, 연극, 영화, 패션, 음악 등을 종합한 총체 예술을 추구했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한국 미술계에 실험 미술에 대한 이론적, 논리적 토대를 갖춘 작가가 없다는 것을 느낀 그는 197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작가는 일본 미술전문지인 “미술수첩”에 실린 작품들로부터 이론적 배경이 잘 정립되어 있다고 느끼며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975년까지 일본에 머물며 오브제, 설치, 판화 등의 작품을 통해 사물과 시간의 관계를 탐구했다. 1984년 미국 유학 후 자연으로 시선을 옮겨 상반된 요소들을 대조하고 결합하는 ‘음과 양’ 시리즈를 시작했다. 작가는 2000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초대전 “현존과 흔적”의 개최를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성능경(b. 1944)은 S.T.(Space & Time, 시간과 공간)의 멤버로 미술에서 물성을 최소화하는 개념적인 작업을 해온 작가이다. 성능경 작가는 “예술 중 미술만 유독 물질이 있다. 시, 소설, 영화, 음악 모두 물질이 없다. 물질성 때문에 재산 가치로 평가된다. 미술에서 물질성을 제거하는 작업이 (나의) 개념미술이었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지금까지 신문 기사 오려내기, 스트레칭하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신체 촬영하기 등 일상을 예술로 수용해 왔다.
작가는 특히 특히 신문 매체를 활용한 작업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군 복무를 마친 후 1973년부터 당시 영향력 있는 신문 매체를 해체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는 신문 기사와 사진을 오려내고 재편집하는 작업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언론의 메시지를 재해석했다. ‘신문 : 1974. 6. 1 이후’는 S.T.의 세 번째 전시에 발표된 작품으로 매일 신문을 읽고 오려내는 행위 자체가 작업이었다. 해당 작품으로 성능경 작가는 S.T. 멤버 중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전시 기간 동안 작품이 완성 되어가는 작업을 선보였다. 신문을 읽고 스크랩하는 그의 작업은 현재까지도 계속 진화하며 지속되고 있다.
정강자(1942-2017) 작가는 몇 안 되는 여성 실험 미술 작가였다. 신전동인의 멤버로 활동을 시작한 작는 1967년 12월 한국 최초의 행위예술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에 참여했다. 촛불로 상징되는 순수한 인간 정신과 동학의 정신을 결합한 이 작품은 사회 개혁 정신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집단 해프닝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당시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1968년 6월에 열린 국내 최초의 누드 퍼포먼스인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작품은 국내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해당 작품은 강국진과 정찬승 작가가 정강자 작가의 옷을 찢고 관람객들이 벗은 작가의 상반신에 부착된 투명 풍선을 터트리는 퍼포먼스로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도전하는 작품이었다. 작품은 여성의 몸을 왜곡하고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비판하는 작품이었지만 언론은 오직 작품의 자극성에만 집중했고 정강자 작가를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노출을 한 ‘광녀’라 칭했다. 정강자 작가는 해당 작품으로 인해 이후에 예정된 개인전이 취소되었다. 같은 해에 참여한 퍼포먼스 ‘한강변의 타살’ 해프닝은 당대 미술 문화를 비롯한 기성 문화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던 저명한 집단 퍼포먼스였다.
정강자 작가는 한국 실험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청년작가연립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여기서 여성의 입술을 거대 조각 작품으로 형상화한 ‘키스 미’를 선보여 여성의 신체 부위를 강조함으로써 사회 내에서 억압 당하는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작업을 펼쳤다. 1970년대 후반부터 작가는 회화 작업에 집중하며 자신의 삶을 다양한 여성상과 자연물을 기하학적 형태에 투영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