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 동시대미술은 다양한 문화와 역사, 사회적 경험을 폭넓게 아우르고 있다. 아시아와 중동, 남미와 아프리카의 작가들은 국제 비엔날레와 미술관, 갤러리와 미술시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과거 서구 중심의 미술사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지역의 역사와 문화도 동시대미술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곧 미술의 다양성 확대로 이어지는지는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여하는 지역과 작가가 다양해지는 것과 미술의 형식과 언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다양해지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로벌 스탠더드(I)」에서는 세계 동시대미술이 공유하는 형식과 제도, 담론과 유통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특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형식의 세계화와 내용의 지역화’였다.
 
여기서 글로벌 스탠더드란 단일하게 명문화된 규칙이 아니라, 국제 미술계의 주요 기관과 네트워크에서 반복적으로 공유되는 전시·해석·평가의 관행을 뜻한다. 이러한 관행은 서로 다른 지역의 미술을 연결하는 기반이 되지만, 어떤 작품과 담론이 국제적으로 가시성과 정당성을 얻는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가 국제 미술계에서 가시성을 얻은 것은 분명한 성취다. 다만 세계미술의 지리적 다양성이 곧 미학적 다양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각 지역의 미술이 서로 다른 역사와 경험을 다루더라도, 이를 표현하고 해석하며 전시하는 방식은 공통된 틀을 따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양성과 표준화가 동시에 진행될 가능성이다. 미술이 다루는 내용과 참여하는 지역은 확대되는 가운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형식과 언어는 일정한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은 글로벌 스탠더드가 열어 놓은 가능성과 그 한계를 함께 검토하는 출발점이 된다.
 
 
 
다양성은 어떻게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었는가
 
20세기 후반 이후 국제 동시대미술에서 다양성(diversity)은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기존 서구 중심의 미술사가 배제하거나 주변화했던 지역과 문화, 인종과 젠더, 계급과 정체성의 문제들이 미술사적 연구와 전시에서 새롭게 조명되었다.
 
포스트식민주의와 페미니즘, 다문화주의는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뿐 아니라 미술관의 수집과 전시, 비평과 교육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구 모더니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미술사적 서술은 여러 지역의 서로 다른 근현대미술사를 함께 검토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1989년 파리 퐁피두센터와 라 빌레트에서 열린 《Magiciens de la Terre》는 서구와 비서구의 작가들을 하나의 전시 안에 함께 제시하며, 비서구 미술의 동시대적 존재를 국제 미술계에 드러낸 중요한 사례였다. 서로 다른 지역의 작품을 공통의 선정 기준으로 다루려 했다는 점은 이 글의 문제의식과도 연결된다. 서로 다른 미술을 함께 전시하는 것과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다양화하는 것은 같은 일인가라는 질문이다.
 
1990년대 이후 국제 비엔날레의 확산 역시 다양한 지역의 작가들이 국제 미술계에 참여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2002년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가 예술감독을 맡은 도큐멘타 11은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에서 국제전의 지리적·담론적 범위를 확장한 대표적인 사례다. 여러 대륙에서 진행된 민주주의, 진실과 화해, 크레올화, 아프리카 도시 등에 관한 논의가 전시와 연결되었으며, 카셀 전시는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플랫폼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의미는 참여 작가의 국적이 다양해졌다는 데만 있지 않다. 무엇을 동시대미술로 이해할 것인지, 미술의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지, 미술관과 큐레이터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다시 검토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성취였다.
 
그러나 다양성이 국제 미술계의 핵심적인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방식 자체도 전시와 평가의 관행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다양성의 확대와 그 제도화 사이의 긴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양성의 제도화와 새로운 권위
 
오늘날 국제 비엔날레와 미술관에서 정체성, 이주, 탈식민, 생태, 공동체, 사회적 실천과 같은 주제는 낯설지 않다. 이러한 의제들은 세계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이며, 동시대미술이 사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확장해 왔다.
 
다만 특정한 의제가 반복적으로 선택되고 작품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주요한 근거로 작동한다면, 그 담론은 새로운 제도적 권위를 형성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의제의 정당성뿐 아니라, 서로 다른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가이다.
 
국제적인 전시와 비평의 맥락에서 작가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다른 지역의 관객과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게 된다. 지역의 경험은 국제적인 담론으로 번역되고, 작품의 의미는 그 담론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된다.
 
이러한 번역은 교류를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공통의 언어는 서로 다른 경험을 연결하고, 이전까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던 미술을 이해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새로운 지역과 작가의 참여가 기존의 언어와 해석의 틀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공통의 언어가 작품을 이해하는 통로를 넘어, 무엇을 다양성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기존 담론으로 쉽게 설명되는 경험은 주목받는 반면, 그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 감각과 사고, 조형적 실험은 충분히 해석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다양성의 제도화에서 살펴봐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은 차이를 포함하는가와 함께, 그 차이가 기존의 해석과 평가 기준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이다. 다양성을 수용하는 제도 자체도 새로운 경험과 표현에 의해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형식의 공유와 미학적 동질화의 가능성
 
글로벌 스탠더드의 또 다른 쟁점은 미술의 형식과 표현 방식이다. 세계 여러 지역의 비엔날레와 국제전에서는 설치와 영상, 사운드와 퍼포먼스, 아카이브와 리서치 기반 작업, 사회참여적 프로젝트를 폭넓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은 회화와 조각을 중심으로 이해되던 미술의 범위를 확장하고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열었다. 국제적인 미술교육과 전시, 레지던시와 큐레토리얼 네트워크의 확대는 작업 방식과 지식의 교류를 촉진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연결은 특정한 작업 방식과 전시 언어의 반복을 강화할 가능성도 가진다.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이 자료와 기록, 영상과 텍스트, 설치와 참여형 프로젝트로 제시되고, 공통된 이론과 사회적 담론을 통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매체와 의제를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 미학적 동질화를 판단할 수는 없다. 회화라는 매체 안에서도 서로 다른 미학이 형성되듯, 설치와 영상, 아카이브 작업 역시 각기 다른 감각과 시간성, 공간적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공유된 형식은 새로운 차이를 생산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 형식은 매체의 종류뿐 아니라 자료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방식, 작품과 관객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 경험을 개념과 조형으로 조직하는 방식을 포함한다. 표준화의 문제는 이러한 구성 방식과 해석의 기준이 특정한 관행에 의존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좁히는지에 있다.
 
국제적으로 공유되는 표현 방식이 새로운 경험을 만나 변형된다면, 형식의 세계화는 미학적 다양성을 확장할 수 있다. 반대로 이미 인정받은 구성과 설명의 방식을 반복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면, 서로 다른 내용도 유사한 틀 안에서 제시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것이 형식의 세계화가 가진 역설이다. 표현의 가능성을 넓힌 공통의 언어가, 특정한 방식만을 국제적으로 이해 가능한 미술로 인정하는 관행이 될 경우 그 가능성을 제한할 수도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와 미술의 권력구조
 
이러한 가능성은 작가 개인의 선택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국제 동시대미술은 비엔날레와 미술관, 대학과 연구기관, 갤러리와 아트페어, 출판과 미디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적인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국제전 참여와 미술관 수집, 비평과 연구, 갤러리의 전시와 시장에서의 유통은 작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여러 조건이 된다. 문화적·상징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는 이러한 기관과 시장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며, 때로는 서로를 강화하고 때로는 상충한다.
 
이 과정에서 특정한 작품과 담론이 반복적으로 선택되고 연구되면, 그것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기준도 교육과 출판, 전시와 유통을 통해 축적된다. 그렇게 형성된 기준은 이후의 작품 선택과 가치 판단에 다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각 영역이 동일한 기준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비엔날레의 기획과 미술관의 수집, 학술 연구와 시장의 수요는 서로 다른 목적과 조건을 가지며, 각 영역 내부에서도 관점이 경쟁한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이러한 차이와 갈등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한다.
 
그럼에도 국제적인 가시성과 자원, 해석과 평가의 권한이 어떻게 배분되는지는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여러 지역의 기관과 전문가가 참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권한이 충분히 분산되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계미술의 지리적 중심이 다변화되는 것과 새로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만들어지는 것은 구분해서 살펴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지역이 기존의 체계에 참여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체계의 기준을 형성하고 수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이다.
 
 
 
한국 동시대미술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가
 
한국 동시대미술 역시 이러한 국제적인 구조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작가들의 해외 전시와 국제적 교류, 국제 갤러리와 아트페어의 국내 활동은 한국미술이 세계미술과 연결되는 통로를 넓혀 왔다.
 
이러한 연결은 창작과 유통, 연구와 비평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만 국제적인 전시 참여와 시장 진출의 성과만으로 한국미술이 새로운 미학과 가치의 생산 주체가 되었는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역사와 사회적 경험이 기존의 국제적 담론을 뒷받침하는 사례로만 제시된다면, 한국미술은 그 기준을 재생산하는 역할에 머물 수 있다. 한국적인 재료나 전통적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작품의 사고와 구성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국제적인 미술언어를 사용하는가의 여부보다, 그 언어를 통해 무엇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는가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사회적 현실은 이미 정해진 형식에 담기는 소재를 넘어, 형식과 해석의 기준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동시대미술은 국제적인 형식과 담론을 수용하고 변형해 온 경험을 축적해 왔다. 이제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창작과 연구의 실천이 새로운 표현과 사고의 가능성을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작가의 창작과 함께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비평과 연구, 새로운 미술적 가치를 발굴하는 큐레이팅과 미술관, 그 성과를 기록하고 축적하는 아카이브와 출판이 발전해야 한다.
 
국제적인 인정은 중요한 평가의 한 축이다. 여기에 한국미술 내부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논의하며 축적하는 역량이 더해져야 한다. 그 역량이 있어야 한국미술은 외부의 선택에 대응하는 데서 나아가, 국제적인 가치 형성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다양성을 넘어 새로운 생산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는 세계 동시대미술의 지리적 범위를 넓히고, 서로 다른 문화가 국제적인 장에서 소통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 성취를 이어 가기 위해서는 참여의 확대와 함께, 미술적 사고와 표현, 해석과 평가의 다양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다양한 지역의 미술이 국제적인 장에 참여하는 것과 다양한 미학과 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앞으로의 과제는 공통의 언어와 제도를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경험과 표현이 기존의 형식과 판단 기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있다.
 
여기에서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이 연재에서 포스트 컨템퍼러리는 현재의 동시대미술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와 기준을 재검토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조건을 탐색하는 관점으로 사용된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질문은 누가 미술의 가치를 판단하는가, 어떤 경험과 표현이 충분히 해석되는가, 그리고 새로운 미술의 언어와 기준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이다. 한국 동시대미술의 미래 역시 이러한 질문과 연결된다.
 
세계미술의 생산지가 된다는 것은 작품을 제작하고 국제적으로 유통하는 데서 더 나아가, 새로운 미학과 조형언어, 담론과 평가의 기준을 형성하는 데 참여한다는 의미다.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역량과 그 가치를 해석·평가·축적하는 역량이 함께 발전할 때, 한국미술은 세계미술의 다양성을 실질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
 

다음 편 「글로벌 스탠더드(III) — 글로벌 스탠더드 이후, 한국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에서는 한국 동시대미술이 새로운 미학과 가치의 생산 주체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과 가능성을 살펴본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