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동시대미술의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날 세계미술이 어떠한 구조와 기준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현대미술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서구에서 형성된 미술의 형식과 개념, 제도를
받아들이고 이를 한국의 역사와 사회적 조건 속에서 변형하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이전과
다르다.
서구에서 시작된 현대미술의 여러 형식과 제도는 이미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중동, 남미와 아프리카의 미술 역시 국제적인 동시대미술의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문제를 더 이상 ‘서구미술을 받아들일 것인가, 한국적인 미술을 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구도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서울과 런던, 뉴욕과 베를린, 베이징과
자카르타, 상파울루의 작가들은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적 배경 속에서 작업한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비엔날레와 미술관, 미술대학과 레지던시, 갤러리와 아트페어, 비평과 출판,
미디어와 아카이브로 연결된 국제적인 미술 시스템 안에서 생산되고 해석되며 유통된다.
설치, 영상, 퍼포먼스, 사운드, 아카이브와 리서치 기반 작업은 이제 특정 국가의 미술 형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체성, 기억, 젠더, 이주, 경계, 탈식민, 생태, 공동체와
같은 개념 역시 세계 여러 지역의 동시대미술에서 공유되고 있다.
서로 다른 세계의 미술이 하나의 국제적인 장에서 만나기 위한 공통의 형식과 제도, 담론과 언어가 형성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공통의 체계를 ‘동시대미술의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이야기하는 목적은 국제 미술계가 만들어 놓은 기준을 다시 배우고 따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을 서구의 기준으로 규정하고 거부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세계화된 동시대미술의 구조
안에서 한국미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새롭게 생산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조건을 논의하는 것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다음
시대의 미술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의 컨템퍼러리를 가능하게 만든 조건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란 무엇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는 특정한 미술 양식이나 하나의 미학적 기준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작가가 설치미술을 해야 한다거나 특정한 철학과 이론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미술을 하나의
국제적인 동시대미술 시스템 안에서 생산하고, 해석하고, 전시하고, 기록하고, 유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공통의 구조와 언어에 가깝다.
작가는 작품을 생산하고 자신의 작업을 개념화한다. 큐레이터와 비평가는
작품에 맥락과 해석을 부여한다. 미술관은 작품을 전시하고 수집하며 보존하고, 아카이브는 그 과정의 기록을 축적한다. 갤러리와 아트페어는 작품을
시장과 연결하고, 출판과 미디어는 이를 다른 지역으로 전달한다. 미술대학과
연구기관은 이러한 지식과 방법을 연구하고 교육한다.
이 모든 과정이 연결되면서 하나의 국제적인 미술 생태계를 구성한다.
따라서 동시대미술의 세계화는 작품만의 세계화가 아니었다.
작품을 둘러싼 시스템 전체의 세계화였다.
ZKM이 2006년 시작한
‘Global Art and the Museum(GAM)’ 프로젝트 역시 세계화가 미술 생산뿐 아니라
미술관과 비엔날레 네트워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art worlds’를 형성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이런 의미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하나의 규칙이라기보다 세계화된
동시대미술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공통의 문법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서구의 미술언어에서 세계의 공통언어로
현재 우리가 동시대미술이라고 부르는 주요 형식과 제도적 언어의 상당 부분은
20세기 서구 현대미술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
모더니즘 이후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퍼포먼스, 비디오 아트, 장소특정적 미술과 제도비판
등이 등장하면서 미술의 영역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통적인 매체를 넘어 확장되었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과 젠더, 정체성, 관계와 참여, 생태와 사회적 실천 등 새로운 문제들이 미술의 중요한
담론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변화는 작품의 형식뿐 아니라 작품을 생산하고 전시하고 해석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 형식과 제도가 서구의 경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국제적 이동과 정보통신의 발달, 비엔날레와
레지던시의 확산, 새로운 미술관과 미술시장의 성장은 세계미술의 지리적 구조를 변화시켰다.
파리와 뉴욕, 런던과 베를린 같은 기존의 중심도시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미술은 더 이상 몇 개의 서구 도시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서울과 베이징, 상하이, 홍콩, 자카르타, 샤르자, 상파울루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국제 동시대미술의 새로운
생산과 전시, 유통의 거점으로 등장했다.
서구에서 형성된 미술언어가 세계로 확산되는 동시에, 세계 각 지역의 미술이 국제 동시대미술의 생산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9, 세계미술의 지도가 바뀌다
1989년은 이러한 변화의 상징적인 전환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해 파리 퐁피두센터와 그랑드 알 드 라 빌레트에서 열린 《Magiciens
de la Terre》는 서구권과 비서구권의 참여자 100명을 하나의 국제전 안에 제시했다. 이 전시는 이후 서구의 큐레이터가 비서구의 미술과 문화를 어떠한 기준으로 선택하고 재현했는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앞선 「아시아 동시대미술과 오리엔탈리즘」에서 살펴본 문제도 이 지점에 있었다.
그러나 그 논쟁과 별개로 세계미술의 지리적 범위는 빠르게 확대되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비엔날레와 국제전이 증가하고 아시아와 중동, 남미와
아프리카의 작가들이 국제 미술관과 갤러리, 미술시장에 등장하면서 동시대미술은 서구 중심의 미술에서 글로벌
컨템퍼러리(global contemporary)로 확장되었다.
세계 주요 미술기관도 이러한 변화에 대응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2009년
C-MAP(Contemporary and Modern Art Perspectives)을 시작해 북미와 서유럽 밖의 근현대미술에 대한
연구를 확대하고 이를 소장품과 전시, 출판과 교육에 연결해 왔다.
세계 미술의 지도가 바뀌고 있었다.
형식의 세계화와 내용의 지역화
그 결과는 오늘날 세계 여러 지역의 전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의 작가도 영상을 사용하고 베를린의 작가도 영상을 사용한다. 인도네시아의
작가도 아카이브를 활용하고 브라질의 작가도 리서치 기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설치, 영상, 사진, 퍼포먼스, 사운드, 아카이브, 리서치 기반 작업, 장소특정적 작업과 참여형 프로젝트는 더 이상
특정 국가나 지역에 속하는 미술 형식이 아니다.
작가들의 국제적 이동과 해외 유학, 레지던시가 확대되고 비엔날레와
미술관, 미술대학과 갤러리, 아트페어와 미디어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미술의 형식과 담론 역시 국제화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작가들이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시대미술의 세계화는 과거 서구 중심의 국제 미술사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각 지역의 역사와 경험을
가시화했다.
한국에서는 식민지 경험과 전쟁, 분단, 압축적인 산업화와 도시화, 민주화와 급격한 사회 변화가 중요한 역사적
배경으로 작동한다.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체제와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이후의 변화가 중요한 경험으로 등장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식민주의와 탈식민의 역사, 종교와 민족, 국가 형성의 문제가, 남미에서는 식민주의의 유산과 군사독재, 정치적 폭력과 기억이 각 지역의 미술과 연결되어 왔다.
세계화는 지역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각 지역의 역사와 기억, 사회와 개인의 경험을 국제 동시대미술의 중요한 내용으로 끌어들였다.
여기에서 글로벌 컨템퍼러리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형식은 세계화되고, 내용은 지역화되었다.
세계 각 지역의 작가들은 국제적으로 공유되는 미술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안에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사회적 경험을 담아내고 있다.
서로 다른 세계가 하나의 미술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 안의 한국 동시대미술
한국 현대미술 역시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발전해 왔다.
근대 이후 서구의 미술제도와 미술언어를 받아들였고, 해방 이후 앵포르멜과
추상미술, 실험미술과 개념적 경향 등 국제 미술의 여러 흐름을 한국의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수용하고 변형했다.
1990년대 이후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전의 등장, 해외 유학과 레지던시의 확대, 한국 작가들의 국제 비엔날레와 미술관
진출 등을 거치면서 한국미술은 글로벌 컨템퍼러리의 네트워크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오늘날 한국 작가가 사용하는 매체와 개념, 작품을 전시하고 설명하는
방식 역시 국제 동시대미술의 공통언어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한국 동시대미술은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 안에
있다.
따라서 이제 질문은 ‘서구미술을 받아들일 것인가, 한국적인 미술을 할 것인가’가 아니다.
또한 한국성을 한지와 먹, 도자와 전통 문양 같은 재료와 이미지에서만
찾을 수도 없다. 반대로 영상과 설치, 퍼포먼스와 아카이브를
사용한다고 그것이 서구적인 미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재료의 국적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축적된 역사와 경험, 감각과 사고가 어떠한 미학과 조형언어로 전환되는가이다.
한국성은 무엇을 소재로 사용하는가의 문제를 넘어 어떠한
미술을 생산하는가의 문제로 이동해야 한다.
수용에서 생산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서로 다른 문화권의 미술을 하나의 국제적인 장으로 연결했다. 세계미술의 지리적 범위는 확대되었고, 과거 주변부로 취급되었던 수많은
지역의 역사와 경험이 동시대미술의 중요한 내용으로 들어왔다.
한국 역시 그 과정에서 국제 동시대미술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글로벌 스탠더드 안에 들어가는 것과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국의 역사와 경험을 이미 존재하는 국제 동시대미술의 문법으로 표현하는 것과,
한국에서 새로운 미학과 조형언어를 만들어 세계미술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역시 다르다.
따라서 한국 동시대미술의 다음 과제는 분명하다.
수용에서 생산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를 거부하거나 국제적인 미술언어에서 벗어나자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세계화된 공통언어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한국에서 새로운 작품과 미학, 담론과 가치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생산은 작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내는 작가, 그것을 해석하는 비평과 연구, 새로운 맥락을 만드는 큐레이팅과 미술관, 기록을 축적하는 아카이브, 세계에 전달하는 출판과 미디어, 지속적으로 유통시키는 갤러리와 시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한국이 세계미술의 생산지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생산의 생태계를 갖는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다시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문제가 시작된다.
포스트 컨템퍼러리는 현재의 컨템퍼러리를 부정하거나 그 이후의 새로운 양식을 미리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동시대미술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을 이해하고, 그 성취와 한계를
바탕으로 그 다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그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세계미술이 충분히 글로벌해진 지금, 그 글로벌 스탠더드 자체를
다시 질문할 시점에 와 있다.
형식은 세계화되고 내용은 지역화되었다. 그렇다면 세계의 미술은 실제로 다양해진 것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세계가 하나의 국제적 문법으로 말하게 된 것인가.
이 질문은 글로벌 스탠더드의 성취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성취 위에서 그 다음의 미술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를 묻기 위한 것이다.
한국 동시대미술에도 같은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얼마나 잘 따라가고
있는가가 아니라, 세계미술에 무엇을 새롭게 만들어 더할 수 있는가.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조건과 한국 동시대미술의 미래는 바로 이 질문에서 다시 시작된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