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웹아트의 선구자적인 작가 노재운(b. 1971)은 인터넷을 통해 영화가 복제되고 빠른 속도로 유통되는, 디지털 매체 환경의 변화에 따른 이미지 생산과 수용의 조건에 대해 성찰한다. 작가는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인터넷 상에서 부유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재편집한 자신의 영화를 웹사이트에 업로드 함으로써 일종의 ‘웹-무비’(web-movie)라는 형식을 구축해 왔다.


노재운, 〈비말라키넷〉, 2001- ©C12 픽처스

1998년 노재운은 자신이 수집한 데이터들을 업로드하고 익명의 다수와 공유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웹사이트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 일종의 극장으로서의 웹사이트 ‘비말라키넷(vimalaki.net)’를 개설했다. 작가는 인터넷 상에서 돌아다니는 영화의 장면들이나 다큐멘터리의 이미지 등을 채집하였고 이를 재조합한 결과물을 ‘비말라키넷’에 업로드했다.

노재운, 〈시퀀스 온 더 넷〉, 2000 ©C12 픽처스  

‘비말라키넷’에는 하이퍼링크를 통해 두개의 시퀀스를 드러내는 〈시퀀스 온 더 넷〉을 시작으로 영화의 오프닝과 크레딧 이미지들로만 이루어진 〈신세계〉, 미디어 속의 북한 여성 응원단을 클로즈업한 〈치명적인 아름다움〉 등이 상영되었다.
 
노재운은 영화를 제작하는 것 뿐만 아니라 웹-극장 ‘비말라키넷’의 배급과 운영까지 담당하는 1인 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비물질적인 데이터로써 세계를 접하고 인식하는 디지털 시대의 현대인의 인식구조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노재운, 〈버려진〉, 2009 ©국립현대미술관

웹사이트에 개재된 노재운의 영화들은 기존 영화의 형식과 유통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극장이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정해진 상영 시간에 맞춰야만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소비 방식과 달리, 오늘날 스마트폰을 통해 OTT 서비스를 경험하는 방식처럼 그의 웹무비는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동시 상영되며 시공간의 제약 없이 원하는 영상을 클릭만 하면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출처의 불연속적인 이미지들의 몽타주로 이루어진 그의 영화는 선형적인 시간성에 따라 전개되는 기존 영화의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거스른다.
 
가령, 비말라키넷에 상영된 바 있는 웹 기반의 영화 〈버려진〉(2009)은 클래식 느와르 영화들에서 발췌된 장면들이 재편집된 14개의 영상들로 구성된다. 우선 관객은 형형색색의 직사각형 도형들이 그리드를 이루고 있는 화면을 마주하게 되고, 이들 중 하나를 클릭하게 되면 각 영상들이 재생된다. 그리고 모든 영상들은 불안과 분열, 분노, 환상, 꿈, 공포와 같은 인간의 심리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노재운, 〈3개의 개방〉, 2001 ©국립현대미술관

이처럼 노재운은 웹의 영화적 가능성과 디지털 환경 안에서 우리의 감각과 인식의 문제에 대해 탐구하는 동시에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이와 연결하여 새롭게 성찰한다. 예를 들어, 〈3개의 개방〉(2001)은 작가가 DMZ에 방문한 후 시각과 인식의 문제를 웹으로 작업한 결과물로, 총 3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첫 번째 영상은 인터넷에서 찾은 핵공장을 연상시키는 위성사진과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 방문 뉴스를 오버랩하여 제작되었다. 두 번째 영상은 DMZ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산불에 관한 것이었으며, 세 번째 영상은 일본에 기지를 두고 있는 미군의 최첨단정보수집기계 AWACS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습과 앵커의 목소리를 오버랩한 것이었다.


노재운, 〈총알을 물어라!〉, 2008 ©C12 픽처스

나아가 노재운은 이러한 재편집된 영상들을 책의 챕터 형식을 빌려 구성한 ‘웹 퍼블리싱’ 작업 〈총알을 물어라!〉(2008)를 선보였다. 마치 책처럼 여러 챕터로 구성되고,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의 몽타주로 이루어진 이 작업은 영화 이미지에 대한 시청각적 요소들을 세밀하게 해체하고 변형하여 지각의 틈을 만들어 낸다.


노재운, 〈수퍼 인터페이스〉, 2001-2004 ©C12 픽처스

2004년 인사미술공간에서 개최된 노재운의 개인전 “스킨 오브 사우스 코리아(Skins of S_Kr)”에서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해왔던 그의 작업들이 오프라인 공간으로 확장되어 나타났다. 전시는 인사미술공간이라는 오프라인 공간에서 펼쳐진 동시에 온라인(www.time-image.co.kr)에서도 함께 진행되었다.
 
노재운은 남한의 표면에 흐르는 보편적인 데이터들을 이용하여 전시를 구성했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인터넷에서 찾은 이미지들을 자신이 고안한 디지털 프로세싱 방식인 ‘범용 디스플레이 이미지(universal display images)’를 통해 편집한 다음 출력하여 전시공간에 설치했다.
 
범용 디스플레이 이미지는 오프라인에 가변적으로 디스플레이될 수 있는 이미지들로 형식과 재료, 크기에 제한 받지 않는 이미지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출력된 결과물들은 다양한 미술의 형식들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기존의 매체 형식과는 또 다른 차이점을 만들어내며 관객이 다양한 내러티브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노재운, 〈본생경〉, 2011, “목련아 목련아” 전시 전경(아뜰리에 에르메스, 2011) ©C12 픽처스

이처럼 노재운은 오프라인 전시 공간을 유연하고 파편적인 이미지들로 현실의 문제를 재구성하는 인터페이스의 일부분으로 연출한다. 작가는 2011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의 개인전 “목련아 목련아”에서는 불교 경전 중 하나인 『목련경』의 주인공 목건련의 이야기를 현대 사회와 연계시켜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선보였다.


 “목련아 목련아” 전시 전경(아뜰리에 에르메스, 2011) ©C12 픽처스

『목련경』은 부처의 10대 제자 중 한명인 목건련이 죽어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출한다는 ‘구원’에 대한 인류보편의 원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노재운은 목건련의 이야기를 오늘날 세계에 만연한 빈곤과 질병, 그리고 지옥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예술적 실험을 연결시켜 제시했다. 이에 따라, 작가는 전시공간을 하나의 ‘지옥’으로 설정했다.
 
여기서 지옥은 전통적인 형상 대신 영화와 CG, 인터넷 그리고 증강현실 등이 지배적 환경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현실과 연결되는 인터페이스로 재설정된다. 전시는 영화의 장면을 재편집해 출력한 평면 작업과 설치 작업 등 물질적인 작업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서로를 연결하고 현실을 필터링하는 하나의 인터페이스로 작동한다.  

노재운, 〈보편영화 2019〉, 2019, “미디어펑크: 믿음, 소망, 사랑” 전시 전경(아르코미술관, 2019) ©아르코미술관

노재운은 2019년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최된 “미디어펑크: 믿음, 소망, 사랑”전에서 광범위한 미디어 환경에서 시작된 영상과 오브제, 이미지들이 원래의 맥락을 넘어 전시 공간 안에서 연결되고 호환되는 인터페이스 설치 작업 〈보편영화 2019〉을 선보였다.
 
이 작업은 관객이 동선에 따라 변화하는 이미지들을 각자 체험하면서 그 풍경을 휴대폰으로 촬영하거나 개인 플랫폼에 공유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보편영화 2019〉는 오늘날 이미지를 활용하고 소비하는 양태들을 실현하고 관찰하는 일종의 증강현실의 공간이자 움직이는 극장이라 할 수 있다.


노재운, 〈보편영화〉, 2017 ©C12 픽처스

이처럼 노재운은 오늘날 미디어 환경 속 각종 시각 정보들이 우리의 지각체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 왔는지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영화’로서의 웹아트와 ‘인터페이스’로서의 설치 작업들을 선보여 왔다. 작가는 여기에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들을 연계시키며, 기존의 시각 정보를 지각하는 방식에 균열을 내어 새롭게 현실을 감각하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호모 시네마티쿠스’, 인간이 영화적 존재라고 종종 말하죠. 지금 우리가 극장에서 보는 영화들이 그렇듯이, 영화가 ‘현실의 반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애초에 영화란 것은 더 풍요로운 가능성과 잠재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굳어버린 것이죠. 뭔가 새로운 전환을 해야지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겠어요? 그런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죠.”


노재운 작가 ©NEMAF

노재운은 1997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2004년 인사미술공간에서의 개인전 “스킨 오브 사우스 코리아”를 시작으로, “스위스의 검은 황금”(아트스페이스 풀, 2006), “목련아 목련아”(아뜰리에 에르메스, 2011), “코스믹 조크”(아트스페이스 풀, 2018) 등의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광주비엔날레(2006), “접점으로서의 미술관”(뉴뮤지엄, 뉴욕, 2008), 제1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전시(아뜰리에 에르메스, 2009), “스페이스스터디”(플라토 미술관, 2011), 부산비엔날레(2012), “노코멘트”(서울대학교미술관, 2013), 미디어시티서울(2014), “WEB-RETRO”(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19)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기획, 제작하고 전시, 상영, 배포하는 C12픽처스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