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욱(b. 1987)은 자전적인 경험을 통해 수집한 기억의 조각들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 그리고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환상적인 풍경을 그린다. 작가는 전통 산수화의 기법과 서양화에서 볼 수 있는 회화적 태도를 절묘하게 결합하며 독창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해 오고 있다.

한국화를 전공한 차현욱은 전통회화를 그대로 답습하기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재구성하는 실험들을 선보여
왔다. 이를 테면, 그의 첫 번째 개인전 《회상된 습작》(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15)에서는 전통 재료와 주제를 다루되 전통
산수화의 언어를 해체하여 재해석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한지에 먹으로 그려진 차현욱의 산수화를 살펴보면 몇 군데 옛 그림을 차용하거나 학습한 흔적, 또는 먹을 다루는 기법 등 전통회화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먹색을 따라가다 보면, 전통적인 산수화로부터 미끄러지는 탈전통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그의 회화 속에서 산수는 뭉개지고 먹흔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기존 산수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앙시나 부감, 평원법 등의
구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차현욱의 산수화는 실제로 존재하는 산과 강 등 자연의 풍경, 즉 실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대로 옮기는 전통 산수화의 태도로부터 빗겨 나 있다.
대신 차현욱은 산수화를 실경을 통해 이해하기보다는 산수를 언어로 습득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강선학 평론가는 이에 대해 “산수라는 공간이 아니라 관념적인 유추로서
산수를 해체하거나 재구성하는 데에 근접해 있다”고 설명한다.

차현욱은 전통 재료의 특성을 활용해 번지고 뭉개지는 표현을 실험하거나, 종이를
콜라주하여 요철과 이음새를 남기는 방법 등을 화면에 뒤섞으며, 우연성에 기댄 형상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즉 그는 산수화의 언어를 차용해 특정한 산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재현하는 기존의 방법을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먹이라는 재료가 가진 새로운 시각적 가능성을 동시대적 맥락 안에서 실험해 왔다.

차현욱, 〈가득한 밤〉, 2018, 한지에 먹, 200x145cm ©차현욱
먹의 특성을 실험하며 추상적이면서도 구상적인 산수화를 주로 그리던 차현욱은 2017년을
기점으로 작품에 자신의 일상적인 요소들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018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개인전 《밤에 핀 꽃》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산수만을 담았던 과거 작품들과
달리 그 안에 인물이 조화롭게 등장하며 일상적인 서사를 품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2016년 천문대를 방문했던 경험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당시 천체 망원경 너머로 본 우주의 신비로운 풍경이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가령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주신 과학 전집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던 우주 이야기의 한 페이지 등 사소한 일상적인 기억 조각들이 하나 둘 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차현욱은 이와 같은 유년기의 기억 조각들을 바탕으로, 작품 속 인물들에
자전적인 서사를 투영하여 그렸다. 〈가득한 밤〉, 〈소년의
시간〉, 그리고 〈Annapurna〉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친구들과 놀던 계곡에서의 자신, 네팔을 여행하던 순간 속의 자신 등 그에게 각인된 특별한 순간 속 자신에
대한 기억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는 먹으로 가득 그려낸 산수의 배경으로 우주적인 이미지가 깔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김남수 평론가는 “확장되는 기억, 천체로 대표되는 우주적 상상력, 한국화 전통으로부터 이질적인 공간
등등 차현욱 작가는 ‘SF산수’의 밑돌들을 깔고 있었다”고 평했다.
이처럼 차현욱은 우연한 기회로 관측하게 된 우주 공간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유년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산수화에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작가의 오래되고 잊혀진 기억들은 이 경험을 통해 다시 현재로 새롭게 돌아와 자신의 현재 이후를 상상하게 만드는 요소들로 작품에 자리하게
된다.

2020년작 〈끝없는 밤〉은 과거 자신이 기억하던 밤하늘이 그 이후에
경험된 장소 또는 사건들과 뒤섞이며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를 담고 있다. 장면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은
한 사람의 사실적인 경험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것이 모여 만들어진 장면은 비현실적인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스며들어 번지도록 하는 수묵기법을 활용해 ‘중첩’을 드러낸다. 이는 두께로 나타나는 부피감의 쌓임과는 다른 중첩으로, 사라진 것 같지만 사라지지 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렇게 그려진
장면들은 낮과 밤, 그리고 자신을 연결하는 어떠한 경계를 관통하며 만들어진 또 하나의 ‘자기’이며, 이 관계를
통해 뒤섞이고 연결되는 교차성을 가지며 전개된다.

차현욱, 〈이방인〉, 2023, 한지에 안채, 호분, 34.8x27.3cm ©차현욱
또한 그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상과 대상, 장면과 장면 사이의
얇은 여백, 또는 두꺼운 장지에 깊게 홈을 내어 만든 빈 공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 속 여백은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보이는 것 너머를 상상하는 통로가 되며, 어떤 의미가 발생하고 확장할 수 있는 중간지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차현욱, 〈Enter Night〉, 2022, 한지에 안채, 41x31.8cm ©차현욱
2020년 이후 차현욱의 작업에는 흑백의 수묵화에서 나아가 전통적인
채색기법을 재해석한 오색빛깔의 채색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차현욱은 한지에 압을 주어 자국을 내어 표면에
입체감을 만든 다음, 먹을 운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마르고 짧은 붓질을 겹겹이 쌓아가며 채색한다.

차현욱, 〈가득한 밤〉, 2023, 한지에 안채, 호분, 145.5x112.1cm ©차현욱
그리고 작가는 한국적 산수화의 준법에서 비롯된 ‘선’을 주요 요소로 활용함과 동시에, 한국화 안료인 분채를 아교 및 천연
전분과 혼합하여 만든 수성물감인 ‘안채’와 조개 껍질 등
천연 석회를 재료로 하는 ‘호분’을 사용하면서도 색과 대상의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배합과 배치, 기법의 변용에 있어 서양 회화의 자세를 취한다.
이러한 작업의 특성은 차현욱으로 하여금 한국적 산수화와 서구적 풍경화 사이 경계를 허묾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차현욱의 최근 작업은 주변 세계와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을 수집하고, 이를 예술적 이미지로 재구성하여 끊임없이 연속하고 연결되어 교차하는 세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과거의 기억을 선명하고 온전하게 현재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장소와 상황에서 비롯된 기억의
조각으로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장면을 그려낸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될 때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생략되거나 왜곡되기도 하며, 과장되기도 한다. 한 지역에 오래 정착하지 않고 여러 곳을 옮겨
지냈던 작가의 배경은 이러한 기억의 불완전성을 탐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2019년 대구에서
서울로 이주한 이후 작가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여기며 작업의 전환점을 개척해 나갔다.

차현욱은 여러 낯선 장소에서 관계를 맺으며 수집한 기억의 조각들을 조합하며 환상적인 풍경을 직조했다. 작품 속 기억의 조각들은 한 곳에 모여 있지만 가느다란 여백을 사이에 두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즉 기억의 조각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불완전한 전체를 이룬다. 작가는 이러한 불완전함으로부터 “질문이 생겨나고, 어떤 것으로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탄생한다”고 보았다.

차현욱, 〈유랑 나무〉, 2024, 한지에 안채, 호분, 65.1x53cm ©아라리오갤러리
그리고 작가는 전통적인 수집가와 달리 평범한 사물이나 개념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창의적 접근을 통해 형성된
기억의 조각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대상과 장면을 만들어 낸다. 특히,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와 구름은 기억과 감정을 구체화하는 상징으로, 작가 스스로 여러 지역을 거쳐
형성된 이방인의 자아를 반영한다.

차현욱, 〈류화운〉, 2024, 한지에 안채, 호분, 53x45.7cm ©아라리오갤러리
버드나무는 고향의 기억을 은유하고, 향나무는 낯선 땅에서 마주하는
어색하고 이질적인 타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낯과 밤의 경계에서 발견되는 ‘낮달’, 몽환적으로 흩어지는 구름은 기억과 시간의 흐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에게 기억이란 단순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현재와 다시 관계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구성하는 살아 있는 조각들이다.

차현욱, 〈체이싱〉, 2024, 한지에 안채, 호분, 73x117cm ©아라리오갤러리
이처럼 차현욱은 한국적 산수화를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재해석하여 과거-현재-미래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개인적 정체성을 탐구해 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동양과 서양, 선형적인 시간성의 경계,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자유롭고 실험적인 예술적 태도를 보이며 전통회화의 새 지평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수많은 허상과
사실이 뒤섞인 것이 이야기이다. 이렇게 불완전한 이야기들이 어떤 중력에 의해 사로잡히듯이 모여드는 것이
개인의 삶이고, 이것이 또 모이면 사회 그리고 우리의 연결된 부분과 전체로 나아간다. 나의 작업은 이와 닮은 불완전한 이야기 중 하나이다.” (차현욱, 작가 노트)

차현욱 작가 ©Aisan Art Contemporary
차현욱은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한국화를 전공하였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전문사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저공비행》(아라리오갤러리, 서울, 2024), 《이방인의 난제들》(갤러리 플레이리스트, 부산,
2023), 《조금 더 가까이》(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2022), 《그림자밟기》(갤러리175,
서울, 2020), 《밤에 핀 꽃》(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 2018)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인천아트플랫폼(인천,
2025), 별관(서울, 2023), 금호미술관(서울, 2022), 대구예술발전소(대구, 2020),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진도, 2018) 자하미술관(서울, 2018),
대구미술관(대구, 2017), 포스코갤러리(포항, 2016),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청주, 2016, 2014) 등에서 열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차현욱은 2018년 ‘올해의
청년작가상’(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 2020년 ‘제4회
광주화루 10인의 작가’ 우수상(광주은행, 광주)을 수상하였고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대구미술관, 대구문화예술회관과 서울대학교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
- 차현욱, Cha Hyeonwook (Artist Website)
- 아라리오갤러리, 차현욱 (Arario Gallery, Cha Hyeonwook)
- 네오룩, [서문] 청주창작스튜디오 – 회상된 습작 (Neolook, [Preface] Cheongju Creative Art Studio - Works from Reminiscence)
- 대구문화원연합회, <문화를 잇는 사람들? – 올해의 청년작가 한국화 차현욱 작가, 2018.07.26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차현욱 – 끝없는 밤 (MMCA Art Bank, Cha Hyeonwook - Endless Night)
- 금호미술관, 어떤 삶, 어떤 순간 – 차현욱 작가 소개글 (Kumho Museum of Art, Our Lives, Our Momnets – Cha Hyeonwook)
- 아라리오갤러리, 저공비행 (Arario Gallery, Low Glide)
- 아트인컬처, [New Look] 차현욱, 2024.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