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소정(b. 1982)은 자신 주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역사와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개인의 목소리, 그리고 물리적 경계의 전환이 개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인터뷰, 역사적 자료 및 고전 텍스트에서 차용한 내러티브를 영상언어와 글쓰기를 통해 새롭게 재구축한다.

특히 작가는 모더니티의 폐허 속에서 경계에 선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가치, 풍경에 주목하여 자신의 경험과 교차시키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의 언어로써 구축된 내러티브는 비선형적 시공간을 형성하며 개인의 삶에 내재한 미학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요소들을 드러낸다.


전소정, 〈노인과 바다〉, 2009 ©전소정

전소정의 초기작은 작가가 만난 주변인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가령, 〈Three Ways to Elis〉(2010)은 약 50년 동안 혼자 집을 짓고 본인이 선택한 삶을 살았던 한 무용수의 삶을 주변 인물들을 통해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업을 계기로,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 예술가의 태도, 예술과 대중이 맺는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로 시작된 〈일상의 전문가들〉 시리즈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일상의 전문가들’을 만나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총 12편의 영상 작업이다.   

이 연작의 첫 번째 작업인 〈노인과 바다〉(2009)는 작가가 핀란드에 머무를 당시 그에게 낚시하는 법을 알려준 노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작가는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단편을 조명하며 그 인물의 확고한 내면 세계를 비춘다.


전소정, 〈마지막 기쁨〉, 2012 ©전소정

작가는 어부, 피아노 조율사, 해녀, 기계 자수사 등 여러 ‘일상의 전문가’들을 만나며 비록 그들의 직업이 일반적으로 예술가의 범주에 속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만들어 낸 이상향에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모습에서 예술가적 태도를 발견했다.

작가는 확고한 내면 세계와 삶의 철학을 지닌 ‘일상의 전문가’들이 예술과 일상의 경계에 서 있다고 여겼다. 2012년에 제작한 〈마지막 기쁨〉은 그러한 경계에 선 삶이 확연히 드러나는 줄광대를 주인공으로 한다. 줄광대의 삶에서 땅 위의 현실과 공중의 이상이 줄이라는 가는 선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평생을 줄 위에서 산 주인공은 현실에선 광대로 손가락질 받지만, 줄 위에 서면 무한한 환희와 기쁨을 느낀다.


전소정, 〈예술하는 습관〉, 2012, “제11회 광주비엔날레” 전시 전경(2016) ©전소정

전소정은 이들의 삶을 통해 예술가로서 예술을 한다는 행위와 태도에 대한 성찰을 이어가게 되었고, 이는 〈예술하는 습관〉(2012)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예술하는 습관〉은 단순한 에피소드를 반복하는 일곱 개의 영상작업과 그 영상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들의 사진작업으로 구성된다.  

까맣게 타버린 재에서 다시 불꽃이 살아나 활활 타오르며 드러나는 새의 형상을 담은 영상을 시작으로 밑 빠진 독에 힘겹게 물 채워 넣기, 성냥개비로 탑 쌓기, 물 위에 비친 달의 모습을 떠내기 또는 유리 구슬 묘기로 보는 이의 눈을 현혹하고, 불이 붙은 링을 거침 없이 뛰어넘고, 좁은 평균대 위를 아슬아슬 걸어가는 누군가의 모습을 간결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전소정, 〈예술하는 습관 VI〉, 2012 ©전소정

그러나 시각적으로 간결하고 단순하게 반복되는 이러한 행위들을 가능케 하는 누군가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 무한 반복되는 이 영상은 다소 복잡한 이야기의 층위를 들추어내기 시작한다. 영상 속 무모하고 우직한 행위들은 작가가 만난 평범한 ‘일상의 전문가’들의 삶을 떠올리게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영상으로 연결시킨다.

이처럼 전소정은 미시적으로 인물의 삶에 접근하여 예술과 삶이 만나는 지점에 대해 관찰하거나, 거대한 사회 구조 이면에 존재하는 작고 사소한 개인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새롭게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후 작가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놓아버린 바깥의 영역에 존재하는 사람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근대는 국가 정체성, 합리성, 가속성,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공간이다. 작가는 이러한 근대적 시공간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들을 들여다 본다.


전소정, 〈광인들의 배〉, 2016 ©전소정

그러한 작업 중 〈광인들의 배〉(2016)는 우루과이 출신의 망명 문학가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Christina Peri Rossi)의 소설 『광인들의 배』(1984)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망명자이자 여성, 동성애자인 페리 로시의 소설이 망명 경험을 통한 자신의 중간자적 존재에 대한 자각에 기인한다면, 전소정의 영상은 소설의 이야기를 현재의 맥락으로 이동하려는 시도를 담아낸다.

영상은 페리 로시에게 보내는 가상의 편지 형식으로 쓴 텍스트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난민과 같이 비자발적인 이유로 이동해야 하는 인물들을 소환한다. 이와 함께 작가는 이방인으로서 경험한 낯선 도시에 대한 감각, 경계와 이동에 관한 자신의 경험담을 엮어낸다.

전소정, 〈광인들의 배〉, 2016, “Kiss me Quick” 전시 전경(송은, 2017) ©전소정

전소정은 이 작업을 제작하던 해에 바르셀로나에 머물며 시각장애인 무용수 후안 카사올리바를 만나게 되었다. 후안은 그에게 시각장애 체험을 제안하였고, 이에 응한 작가는 지팡이를 짚고 눈을 가린 채 촉각에 의존하며 도시를 감각하고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광인들의 배〉을 비롯한 그의 작업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우회적으로 감각하고 공유하는 감각 실험으로 이어졌다. 〈광인들의 배〉에서는 젊은이가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도심 위를 지나는 소리와 파도 소리를 결합해 지중해를 떠다니는 난민이라는 경계적 존재를 감각할 수 있도록 한다.


전소정, 〈Interval. Recess. Pause.〉, 2017 ©전소정

후안과의 만남을 계기로 작가는 청각, 후각, 촉각 등의 감각이 비가시화된 영역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에 관심을 가져왔다. 시각 중심의 근대적 문화 속에서 축소되고 희미해진 다양한 비시각적인 감각은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 이면의 실재를 감각하도록 하는, 비가시적-가시적인 영역의 경계를 오가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영상 작업 〈Interval. Recess. Pause.〉(2017)는 프랑스 빌라 바실라프-페르노리카 펠로우쉽 레지던시 기간 중 작가가 만난 세 명의 한국계 입양인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영상은 해외 입양인들의 기억에 관한 진술과, 차학경의 저서 『딕테(Dictée)』(1982)의 일부분을 안무가 올리비아 리오테(Olivia Lioret)가 해석한 움직임이 번갈아 가며 전개된다.


전소정, 〈Interval. Recess. Pause.〉, 2017 ©전소정

입양인들의 어린 시절 기억은 분명한 이미지로 남아있기보다는 소리, 맛, 냄새, 촉감 등의 비시각적 감각들의 파편으로 존재했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그들의 여러 감각이 뒤얽힌 불완전한 기억을 시공간의 차이가 있는 집단적/개인적 이미지와 사운드의 비선형적인 배치를 통해 구축한다.

이로써 〈Interval. Recess. Pause.〉는 그들의 기억이 구성된 비정형적인 형태처럼 다양한 감각의 집합체로 다가오며 그들의 온전히 재현 불가능한 기억의 틈새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전소정, 〈이클립스 I〉, 2020 ©전소정

한편 2020년에 제작된 영상 작업 〈이클립스 I, II〉는 한반도의 분단과 경계의 경험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감각들에 대해 질문한다. 견우와 직녀의 설화를 통해 남북 관계를 비유한 작곡가 윤이상의 곡 〈더블 콘체르토〉를 모티프로 하는 이 작업은 여전히 분단의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심리적, 물리적 경계들을 소리와 이미지로 살핀다.


전소정, 〈이클립스 II〉, 2020 ©전소정

〈이클립스 I, II〉는 21현으로 된 북한의 가야금과 하프를 위해 작곡된 두 곡의 연주를 바탕으로 제작된 2채널 영상으로, 가야금 연주자 박순아, 하피스트 방준경, 작곡가 신수정, 김지영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영상은 현을 울려 소리를 내는 북한 가야금과 하프 주위에서 수평과 수직의 어지러운 교차로 직조된 카메라의 시선과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파편화되는 이미지의 몽타주를 보여준다. 이들은 경계에 관한 관점을 감추거나 드러내고 변화시키며 찰나와도 같은 일시적인 합의를 포착한다.

전소정, 〈싱코피〉, 2023, “올해의 작가상 2023” 전시 전경(국립현대미술관, 2023)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올해의 작가상 2023”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영상 작업 〈싱코피〉(2023)에서는 가속화된 현대 사회 안에서 물리적 경계를 오가는 디아스포라의 여정을 복합적인 감각의 형태로 보여준다. 영상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진동음, 서로 다른 언어들의 소리, 기보를 넘는 악보의 파열음 등 소리의 궤적을 따라 움직인다.

이 영상은 전작들에 등장한 바 있는 여성 연주자 셀리아와 박순아의 디아스포라 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상에 깔린 열차의 진동음은 근대의 가속주의를 소환하지만 정신적, 물리적 경계를 종횡하는 디아스포라들의 비선형적인 연주 소리의 개입으로 인해 곧 전복된다.

전소정, 〈싱코피〉, 2023 ©전소정

이 작업에서 전소정은 아시아와 유럽을 가로지르던 기차의 근대적 속도, 국경을 넘는 신체의 물리적 속도, 데이터의 속도, 이동하는 식물의 생태적 속도 등을 겹쳐보면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가속의 세계와 이를 파열시키는 존재들의 실천을 소리의 이동으로 가늠해 본다.

작가는 이들의 실천을 횡단하는 가운데 변신과 변형이라는 유목적 정체성에 주목하며, 기존 분류나 제도적 규범의 틀 안에서 묶일 수 없는 모든 경계적 존재들을 위한 플랫폼을 상상하고 선형적인 모더니티의 경로로부터 탈선한다.  

이처럼 전소정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누락된 개인의 목소리와 풍경 등에 주목해 오며, 그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누락시키지 않는 역사 쓰기의 방식을 자신만의 언어로써 탐색해 왔다. 이를 위해 그는 다양한 분야의 협업자들과 자신의 질문을 공유해오며 이에 대한 사유를 복합적인 감각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역사와 현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환기시킨다.

“제가 관심을 가져온 것은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 모호함인데, (…) 도시의 속도감 가운데 누락된 개인들의 이야기, 시간, 풍경 등을 다시 쓰기 하는데 애정을 두죠.”

전소정 작가 ©바라캇 컨템포러리

전소정은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스위스 베른 미술관, 백남준 아트센터, 아뜰리에 에르메스, 아르코미술관, 파리 팔레드도쿄 미술관, 파리 빌라 바실리에프, 제 11회 광주 비엔날레, 삼성미술관 리움, 오사카 국립 미술관 등 다수의 개인전 및 그룹전에 참여했다.

또한 전소정은 빌라 바실리프-페르노리카 펠로우쉽,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광주비엔날레 눈 예술상, 송은미술대상 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그의 작품은 한네프켄 파운데이션, 울리 지그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삼성 리움미술관, 오사카 현대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경기도 미술관, 두산아트센터, 송은미술재단 등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및 기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