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b. 1981)은 새로운 미디어 기술의 가능성을 연구하며 애니메이션, 3D, 가상현실(VR) 등에 기반한 다양한 영상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접근할 수 없는 장소나, 마음속에만 살아 있는 기억, 또는 기록되지 못한 사건처럼 기록된 역사 뒤편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작가는 미디어 기술을 통해 가상의 공간을 구축함으로써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여 새로운 공동의 기억으로
확장한다.
권하윤의 초기 작업은 주로
정체성과 경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를 테면, 기록된 역사를
둘러싼 집단적 혹은 개인적 기억의 경계 그리고 온전히 서술되거나 재현될 수 없는 정체성에 주목했다.
그 예로, 2011년에 발표한 〈증거부족〉은 프랑스로 망명한 나이지리아 청년 오스카의 어린 시절 기억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재구성한 작업이다. 영상의 주인공인 오스카는 프랑스로 망명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진술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를 쉽게 믿지 않는다.
작가는 실증이 없는 불분명한
타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의 경로를 상상하여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였고, 이를 오스카가 그린 탈출 경로 그림과 겹쳐 보여준다. 현실이 되지
못한 기억과 경험은 작가의 주관적 해석을 통해 가상의 다큐멘터리로 기록됨으로써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놓인다.
그리고 2014년 영상 작업인 〈모델 빌리지〉는 북한의 선전용 거주지인 기정동 마을을 작가의 상상으로 재구축한 허구의
세계를 보여준다. 작업 당시 작가는 북한 개성에 위치한 기정동 마을을 남측 비무장지대(DMZ)에서 촬영하고자 2년간 허가를 요청했지만 결국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후 작가는 실재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오직 상상으로만 다가갈 수 있는 기정동을 실질적인 마을의 형태가 아닌 영화 세트장과 같은
허구적 공간으로 연출하기로 했다.
상상된 이미지로서의 기정동은
〈모델 빌리지〉 안에서 투명한 모형으로 지어졌다. 투명한 집들은 조명의 밝기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특히 빛이 강해지면 집은 사라지고 그림자만 길게 드리우게 되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물질이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겨진 것을 보여줌으로써 실재와 허상 사이에 놓여 있는 기정동의
존재성을 상기시킨다.
〈모델 빌리지〉를 계기로, 권하윤은 DMZ라는 중간 지대에 관심을 갖게 되며 전직 한국군 병사와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영상 작업 〈489년〉(2015/2016)은 그 과정에서 만난 DMZ에서 수색대원으로 근무했던
김씨의 기억을 따라가는 작업이다.
영상은 과거 김씨가 DMZ에서 조사 임무를 수행한 경험과 지도에 없는 광산이 펼쳐진 지대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한 증언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공간을 재현한다. 김씨의 이야기 속 장소는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그리하여
전적으로 자연이 지배하게 된 공간이다.
권하윤은 김씨의 이야기를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시공간에 대한 풍경과 그 안에서의 감각을 상상했다. 달빛 아래 실루엣을 드러내는
처음 보는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이미지, 그리고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북한군과 지뢰로 인해
생사를 오가는 감각이 섞여 든 김씨의 생생한 경험담은 작가의 상상을 거쳐 연출된다.
작가는 그의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VR이라는 매체를 선택했다. 온전히
개인의 시야 안에서 펼쳐지는 가상현실은 김씨의 기억 속으로 더욱 몰입감 있게 빠져들도록 한다. 김씨의
기억 속 DMZ는 작가가 만든 가상현실이라는 또 다른 중간 지대를 통해 관객과 사적인 방식으로 만나게
된다.
이처럼 〈모델 빌리지〉와
〈489년〉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공간 속으로 잠시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분단의 경계와
집단적 정체성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불분명한 경계와 불완전한 기억을 소환한다.
권하윤은 이어서 발표한 〈새
여인〉(2017)에서도 VR 기기를 현실과 가상을 이어주는
매체로 가져왔다. 전작들은 화자의 이야기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선형적 구조를 가졌다면, 〈새 여인〉에서는 이야기 구조에 관객의 참여가 개입된다.
작가의 스승인 다니엘의 기억을
재구성한 〈새 여인〉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VR 헤드셋를 쓰고 진입하게
되는 공간은 다니엘의 기억 속 새를 수집한다고 알려진 ‘새 여인’의
집안 풍경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관객은 직접 몸을 움직이며 새와 새장이 가득한 놀라운 광경 속을 돌아다니게
된다.
계단을 오르거나 걷다가 멈춰
주변을 둘러보는 등 관객 각자의 속도와 움직임에 맞추어 작품이 진행된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타인의
기억 속 공간에 진입할 뿐 아니라 그 안의 시간 또한 통제하고 개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가상 공간 속에서 현존하는 감각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며 타인의 기억 속으로 더 깊이 진입한다.
또한 이 작품은 관객 개인의
차원에서 진행되기에 관객마다 상이한 경험을 생성하게 된다. 타인의 사적인 기억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다시금 수많은 타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전이되고 새롭게 기억된다.
한편 또 다른 가상현실 작업인 〈피치 가든〉(2019)에서는 더 넓은 공간 안에서 관객의 자유로운 신체적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연출되었다. 또한 4명이 동시에 감상 가능한 VR 기술을 세계 최초로 선보인 작업으로,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관객들의 모습 또한 작품의 일부가 된다.
조선 초기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영감을 얻은 〈피치 가든〉은 자연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세계를 구현한다. 그 안에는 다섯 개의 세상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가상현실 안에서 걷고 듣다 보면 내가 지금 있는 세상이 어디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며 경계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처럼 이전 작업들에서 개인의
내밀한 기억을 재구성하여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가상현실로써 구현했다면, 2020년대부터는
공적인 장소나 역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2021년에 발표한 〈구도,
경성 방랑〉은 20세기 초 서울의 풍경과 신문 아카아브를 다루며 자유와 검열의 경계를 보여준다.
〈구도, 경성 방랑〉은 소설가 박태원이 1934년 발표한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받은 영감에 그 시대에 관한 작가의 해석을 더해 제작한 가상현실
작품이다. 관객은 VR 기기를 통해 소설가 구보씨의 동선을
따라 그 시대의 경성을 체험하게 된다.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도시의 풍경은 마치 만화 속에 들어온 듯 흑백의 세상과 2D의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풍경은 구보의 비판적인 시선과 맞물리는 당시 유행했던 만문만화에서 받은 영감으로부터 비롯된다.
1930년대 당시 언론의 탄압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시사만화를 그릴 수 없었던
만화가들 사이에서는 도시의 풍경과 사회의 모습 그 자체를 담아내며 은연중에 풍자하는 만문만화가 유행하게 되었다.
작가는 만문만화에 등장하는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현실적인 모습을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가져왔다.
〈구도, 경성 방랑〉에 반영된 만문만화 캐릭터들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당시의 물질 만능주의, 여성 폄하, 청년실업 등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떠올리게 하며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경험으로 이끈다. 한편 영상 속 검게 칠해진 부분들이 등장하며 당시 일제의 검열로
인한 언론 탄압에 대한 시대상을 경험하게 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에서 선보이고 있는 권하윤의 신작 〈옥산의
수호자들〉(2024)은 대만 중심의 ‘옥산’에 얽힌 역사적 설화를 기반으로 한다. 일본이 대만을 침략했던 당시
옥산에 살고 있던 소수 민족인 부눈(Bunun)족은 이에 강력하게 저항하였지만 그들의 이야기와 목소리는
역사로 기록되지 못했다.
작가는 처음 자료를 조사했을
당시 접한 일본에서 온 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와 부눈족 족장의 우정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는 이들에
대한 기록을 끈질기게 탐구함으로써 이야기의 근거를 찾아내고 이를 시적인 풍경으로 재현해냈다.
관객은 VR 매체를 통해 구현된 가상의 공간에서 모리가 대만으로 건너 오게 된 이야기를 들으며 옥산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대나무로 만든 등을 손에 들고 모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옥산의 동식물들을 발견하게 된다.
권하윤은 현실을 고증하고자
고도에 따라 다르게 서식하는 옥산의 식물들을 가상현실 속으로 옮겨 왔다. 관객의 손에 들린 대나무등과
가상현실 속 대나무등이 연동됨으로써 더욱 현실감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등불에 놀라 부엉이가 날라가고, 나뭇잎 색이 빛에 따라 변하는 등 현실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감각적인 순간들이 가상의 차원에서 관객의 신체를
통해 벌어진다.
관객의 감각과 가상 현실
속 반응이 동기화됨으로써, 관객은 현실에서의 경험에 못지않을 만큼 생생하고 선명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VR 기기를 벗는 순간 곧바로 가상의 옥산은 사라지고 현실의 세계로 복귀하게 되지만, 옥산의 풍경과 그 안에서의 감각들은 여전히 관객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
사적이고 공적인 기억을 재구성하는
그의 작업은 가상현실을 통해 재구성됨으로써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짐에 따라 주체와 타자의 구분 또한 불분명해지는 경험으로 이끈다. 이로써 타인의 이야기는 그의 작품 안에서 관객의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감각되고 경험되며 공동의 기억으로 확장된다.
"가상현실은 타인의 시점을
나의 시점으로 경험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관적인 시점을 다루기에 탁월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기억에 관심이 있기에 항상 주관적인 시점에 관심을 가져왔다.
내가 관심 있어 하는 이야기를
통해 작업으로 풀어내기에 적합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여러 매체 중 현실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체이기 때문에 매료되었다.” (권하윤, 국립현대미술관
“순간이동” 작가 인터뷰,
2024)
권하윤은 르 프레누아 – 프랑스 국립현대미술학교(Le Fresnoy – Studio National
des Arts Contemprains)를 졸업한 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2019년 아라리오갤러리(상해, 중국), 2018년 Galerie
Sator(파리, 프랑스), 두산갤러리(서울, 한국), 2017년
팔레드도쿄(파리, 프랑스),
2016년 레크투르 사진예술센터(레크투르, 프랑스), 2015년 에꼴 드 보자르 샤토루(샤토루, 프랑스)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참여했던 주요 그룹전으로는 2022년 울산시립미술관(울산, 한국),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일민미술관(서울, 한국), 2020년
부산비엔날레(부산, 한국),
2019년 일민미술관(서울, 한국), 니콜라이 쿤스트할레(코펜하겐, 덴마크), 2018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서울, 한국), 그랜드 듀크 진 현대 미술관(룩셈부르크),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한국),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서울, 한국), 백남준아트센터(용인, 한국), MoMA(뉴욕, 미국), 2015년 아트선재센터(서울, 한국) 등이 있다.
2018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오스트리아), 2017년 리스본 인디애니메이션(포르투갈), 부쿠레슈티국제 실험영화제(루마니아), 2015년 팔레 드 도쿄(프랑스),
2014년 유로피언 미디어 페스티벌(독일),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러시아) 외에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2024년 올해의 작가상 후보 4인에 선정되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References
- 권하윤, Hayoun Kwon (Artist Website)
- 아라리오갤러리, 권하윤 (Arario Gallery, Hayoun Kwon)
- 올해의 작가상 2024, 권하윤 (Korea Artist Prize 2024, Hayoun Kwon)
- 헬로! 아티스트, 권하윤 – 기억과 현실의 경계
- 국립현대미술관, MMCA필름앤비디오 – 또 다른 이야기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roary Art Korea(MMCA), MMCA Film & Video – Because the Story Is Not the Same)
- 아트인사이트, [Opinion] VR로 경험하는 타인의 사적인 이야기 [미술/전시], 2024.07.22
- 국립현대미술관, “순간이동” 도록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roary Art Korea(MMCA), Catalogue of “Transport to Another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