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레 생각이 이어진 까닭일까. 영화 <데드풀>을 보는 내내 그의 작품생각을 했다. <데드풀>엔 수퍼히어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행동을 일삼고 각종 레퍼런스를 들어 시종일관 말장난하는 주인공이 있었다. 중요한 장면에 장난스레 끼어드는 만화식 표현도 그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었다. 기존의 엑스맨 캐릭터도 조역으로 등장하고, 1970-80년대 팝뮤직이 들리는 등 새롭지 않은 문화들을 뒤섞어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도 새삼스러웠다. 새삼스럽다. 손동현의 작품에 어울리는 형용사다. 이미 알고 있는 캐릭터와 소위 옛것이라 여겨지는 동양화를 매치해 새삼스러운 화면을 만들어주는 작품에 새삼스럽게 부연할 기회가 생겼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주목받기 시작해, 검증을 거치면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아직도 한참 젊은 이 작가의 그림을 읽는 방식은 많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채로운 말하기가 가능해서 어느 부분에 주력해 풀어 써야 할지 선택하는 것부터 애를 먹을 정도다. 그는 한국화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대안을 들고 나온 참신한 동양화가다. 팝아트의 계보에서 한국형 팝아트(K-POP이라는 정리된 용어까지 등장했다)를 논할 수도 있다. 미술에서 다소 소외되어온 장르인 초상화를 현대미술 맥락에서 재조명한 작가다. 글쓰는 입장에서 뭣보다 매력적인 건 그를 세대적으로 풀어보는 일이다. 1980년 이후에 태어나 현재를 살아가는 88만원 세대부터, 3포, 5포, 7포를 넘어 삶의 무수한 것들을 포기하며 산다는 N포 세대까지 다양한 징후를 가지고 묶이는 그의 제너레이션. 이 글을 쓰는 시점인 2016년에 아직 30대인 작가가 웅변하는 세대는 그렇게 부침도 많고 이야기도 많다.

텔레비젼, 인터넷, 스마트폰, 온라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까지 다양한 시스템을 온몸으로 접하고 익숙해져서, 수족같이 편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외부와의 관계망을 맺어가는 데 있어 선봉에 있던 세대다. 그 놀라운 신생문화가 끼친 영향관계를 풀어내기에도 적합하다. 사실 이 내용이 꽉찬 작가의 작품 자체가 어떤 기술적 발전을 대변하진 않는다. 오히려 잊혀져가는 정통성을 끄집어내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그가 차용하는 전지구적 참고자료들은 인터넷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TV와 영화, 음악과 관련한 그 세대의 세계시민적 감각이 중요하다. 따라서 인터넷세대로 묶어 논할 가치가 충분하다. 문화제국주의,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풍자적 발현이라는 시각으로도 풀어볼 수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탈식민주의에서 말하는 혼종성을 보여주는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좋다. 10년이 넘은 작업기간 동안 꾸준히 발전해 온 작품의 변화과정을 충실히 더듬어가며 교과서적으로 정리해볼만한 가치도 충분하다. 따져보니 그를 세대적 징후로 풀어놓은 평론이 가장 많고, 팝아트와 퓨전 동양화군으로 해석한 평론도 흔하다. 어쩌면 그의 작업을 둘러싼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게 작품세계를 풀어내는데 가장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러 그물망 안에 넣고 빼면서 지도 한 장을 그려보려 한다.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98학번인 손동현은 학부생이던 2004년 미국의 수퍼히어로인 배트맨을 동양화 기법으로 그린 <영웅배투만선생상>을 시작으로 고유한 문법을 만들어나간다. 2005년 제작된 두번째, 세번째 <영웅배투만선생상>에서 묘사는 더 정교해지고, 밀도도 높아진다. 2005년은 그가 본격적으로 초상작업들을 그려나간 기념비적인 해다. 영화 <스타워즈>의 캐릭터인 <우주전사요다선생상>부터 <인조인간알이두이시삼피오도>, <암흑지주다수배이다선생상>, 3D 만화영화인 <슈렉>과 <토이스토리>의 캐릭터를 옮긴 <막강이인조술액동기도>, <우두이선생상>, <파주라이투이어선생상>, 햄버거 프랜차이즈 가게 맥도날드의 마스코트인 로널드 맥도날드를 그린 <노날두맥날두선생상> 등이 모두 일년 사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 작품들을 2006년 <파압아익혼>이란 제목으로 묶어 아트스페이스휴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초상화는 미술의 탄생과 동시에 시작됐다고 말해도 좋을만큼 유구한 역사를 갖는다. 인류사에 문명과 권력이 생겨난 이후엔 권력자나 그 집안의 기록으로서 초상화가 남겨졌다. 다 빈치부터 램브란트, 휘슬러, 래핀, 서전트까지 익숙하고 유명한 초상화가들을 나열하자면 작정하고 덤벼야한다. 다만 이 글에선 손동현의 독특한 초상화가 현대미술에서 갖는 위치 정도를 가늠해 보려고 한다. 1980년에 태어난 손동현과 딱 한 세기차이 선배가 공교롭게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다. 본인을 거친 무수한 여인들의 모습을 초상화 소재삼아 다양한 기법적 형식적 실험을 하며 작업세계를 발전시켜나간 피카소에서 시작해보자. 피카소가 1906년에 그린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초상화는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로 세상을 놀라게 하기 직전에 그려졌다. 아프리카 마스크에서 착안한 나무로 깍은 듯 딱딱한 묘사를 회화에 대입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입체주의의 시작점에 머물면서도 동시에 인물의 강직한 성품을 드러내준다. 새로운 형식을 탐구하며 초상화 속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다는 게 손동현 초상화의 특징과 겹친다. 손동현은 동양화라는 매체에 걸맞지 않는 서양인이나 허구 속 인물을 동양화 속 초상 형식에 끌어들이며 동시에 그 정신까지 구현한다.

이것이 바로 동양화에서 중시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형상재현에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 그려내는 일-로 동진(東晋)의 인물화가 고개지(顧愷之)가 처음 사용한 단어다. 고개지는 인물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그 인물화 속 특수한 배경을 활용할 것을 주장했는데, 손동현의 경우 각 등장인물이 가진 소품이나 복장, 혹은 인물 자체의 생김새 변모과정을 통해 그 내면과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이미 영화 속에서 가상의 캐릭터를 생생하게 구현해내는 데 성공한, 본인의 정체성을 온몸은 물론 관련부속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물의 초상을 다시 동양화로 옮겨내니, 효율적으로 전신사조를 구현해낼수 있었으리라. 사실 현대미술에 와서의 초상화들은 대부분 전신사조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적 표현보다는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엘리스 닐(Alice Neel, 1900-1984)이 역시 대상과의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내면까지 표현하는 초상화를 추구했다. 그러고보니 내면을 표현하는 초상화가로 루시안 프로이드(Lucian Freud, 1922-2011)만큼 탁월한 작가가 있었을까? 할아버지가 유명한 정신의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였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몸과 살의 표현으로 인간의 감정과 성격을 드러내려 한 노력은 화면에서 절절히 느껴진다. 비슷한 연배의 미국 초상화가로 래리 리버스(Larry Rivers, 1923-2002)와 알렉스 카츠(Alex Katz, 1927-)가 있는데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지인들의 초상을 다수 그린 점, 그 와중에 모델과의 관계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서구형 전신사조 맥락에 놓아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갑자기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78)이 튀어나온다. 이 팝아트의 창시자에게 한국의 미술학도는 수퍼스타의 유명세에 기대는 방식을 전수받는다. 마릴린 먼로나 자클린 케네디,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당대 가장 유명한 인사의 초상에 기대어 워홀도 그들만큼이나 유명해졌다. 거기에 대중들이 사랑하는 캠밸수프나 코카콜라도 워홀이 빚진 인기물품이다. 손동현이 마이클 잭슨, 슈렉, 슈퍼맨 등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모델을 기용하거나, 코카콜라나 나이키같은 로고를 회화에 끌어들이는 방식은 바로 워홀에게서 시작한다. 2006년도에 작가가 주력해 제작한 <문자도>시리즈는 문화적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탄생한 각종 브랜드의 익숙한 로고를 전면에 내세운다. 아디다스, 스타벅스, 코카콜라, 나이키, 맥도날드, 말보로 등 세계화된 브랜드를 강조한 작품들은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문자도-코카콜라>는 화면 가득 필기체의 코카콜라 로고로 채웠다. 로고 안에는 문양을 가장해 세밀하고 위트넘치는 이미지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산타클로스가 코카콜라의 광고를 위해 창조된 캐릭터였다는 점을 참조해 산타클로스가 코카콜라를 들고 선물배달가는 장면을 넣었고, 북극곰이 코카콜라를 마시는 장면도 익히 알려진 광고에서 따왔다.

<문자도-말보로> 역시 말보로 로고 안에 중국전통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한 인물들이 웨스턴 부츠를 신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담배를 피는 장면이나, 광고 속 말보로맨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묘사돼 있다. <문자도-나이키>나 <문자도-아디다스>에는 패턴처럼 나이키나 아디다스를 신는 사람, 혹은 관련 스포츠맨 이미지가 등장한다. ‘Just Do It’이나 ‘Impossible Is Nothing’같은 브랜드가 미는 슬로건이 동그란 뱃지 안에 알파벳 한글자씩을 채워 문양처럼 꾸며지기도 한다. 대중의 소비 아이템들을 적극적으로 동양화 화폭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경계도 허물고 있다. 글자 자체가 작품이 되는 서예, 혹은 시서화 능력을 소양으로 삼던 사대부층이 즐긴 글과 그림이 한 화면에 존재하는 문인화처럼, 동양화 전통에서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다. 손동현의 <문자도>시리즈는 서예와 풍속화 형식을 결합하고, 다시 서양의 브랜드와 매스미디어를 내용면에서 믹싱하면서 특유의 편집감각을 발휘한다. 서양에서도 워홀과 동갑이던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1928-)처럼 글자를 하나의 이미지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시도가 있다. 멜 라모스(Mel Ramos, 1935-)나 톰 워셀만(Tom Wesselmann, 1931-2004)의 광고와 포르노의 요소를 뒤섞은 초상화들 역시 워홀과 동시대를 호흡한 작가가 자본주의와 워홀을 동시에 차용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한국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젊은이의 창작물은 동서양의 문화사회적 레퍼런스를 세대를 넘나들며 읽는데 무리없이 즐겁다.
 
사진으로 세대의 초상을 남기는 작가들도 등장한다.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과 낸 골딘(Nan Goldin, 1953-)이 그 예다. 다양한 역할로 스스로를 분장해 세대가 공유하는 문화적 스테레오타입을 드러낸 셔먼의 초상사진과 동시대를 사는 친구들의 일상적인 삶을 매우 근접한 거리에서 찍어나간 골딘의 사진. 매체만 달라졌을 뿐, 이전에 초상화가 전통적으로 해오던 역할과 유사하다. 그들의 후예가 각종 민족의 스테레오타입 속으로 잠입해 자연스런 초상을 찍어내는 니키 리(Nikki S. Lee, 1970-)겠다. 제국주의자들이 문화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바로 정형화(stereotype)작업이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지적한 바 있듯이, 오리엔탈리즘, 곧 동양은 감성적이고 신비롭고 여성적이라는 고정관념을 생산해 그와 반대되는 서구사회는 이성적이고 남성적이라는 식으로 대비한다. 타자를 상정해, 그 타자를 지배하는 제국경영을 합리화하는 초석 작업으로 정형화와 타자화를 시작한다. 그래서 탈식민주의를 논할때 가장 기본은 그 정형화된 사고의 탈피다. 식민통치의 역사를 품은 극동의 작은나라에서 태어난 우리의 재능많은 화가가 외국의 수퍼히어로와 팝스타, 만화캐릭터의 고유한 특성을 추출하고 최대한 원본이미지에 가깝게 고스란히 그리는 것은 정형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일이다.

영화나 만화 속 정형성을 순수회화로 옮기는 일이 왜 유의미한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지점이다. 여기서 제국주의자들이 정형화시킨 두 스테레오타입이 부딪히는 부분을 거론할만 하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법한 위대한 영웅을 만들어낸 문화제국주의자들의 산물(할리웃 캐릭터)을 여성적이고 미개한 것으로 여겨지는 타자의 고유한 문화(동양화)로 재탄생시킨 지점에서 발생하는 충돌. 식민지하에서 지배자는 피지배자에게 ‘나를 따르되 비슷할 정도로만, 절대 완전히 똑같아서는 안 된다’며 따라하게 만드는 동시에 구별을 짓는다. 모방하게끔 유도하는 동시에 차별화되는 구분짓기를 통해, 피지배자는 계속 잡종이 된다는 의미를 갖는 혼종성이 손동현의 작업에선 조금 특별하게 해석된다. 이를테면, 호미 바바(Homi K. Bhabha)가 강조하는 것처럼 자아와 타자, 자국문화와 타문화의 구분이 아니라 ‘경계선상(borderline)’ 혹은 ‘사이-속(in-between)’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관점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 제3의 공간을 설정한다. 주류를 어설프게 따라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서 각각의 요소를 참조는 하되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손화백의 작업은 각종 계급과 문화 장치를 뒤섞음으로써 사이속 공간에 틈입한다.
 
한편, 1950년도를 즈음해 태어난 미국 작가 짐 샤 (Jim Shaw, 1952-)와 마이크 켈리 (Mike Kelly, 1954-2012)는 초상화 작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손동현 작품과 유사성을 보인다. 이 둘은 본인을 둘러싼 문화적인 모든 것들, 이를테면 코믹북, 앨범 커버, 잡지, 종교, 포스트 펑크 정치학, 블랙 유머 등의 다양한 미국문화에 개인의 취향을 더한 작업을 해나갔다. 설치, 회화, 영상 등 결과물은 다채롭지만, 문화적 레퍼런스들을 열심히 그러모아 2차 창작물을 닮았어도 현대미술계 문법에서 보면 엄연히 단순 차용을 한 순수창작물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손동현의 작업이 딱 그렇다. 본인만의 스타일로 완전히 소화해 캐릭터나 유명인의 모습을 끌어오기에, 누구도 그의 작품을 두고 2차 창작이나 표절, 도용을 거론하진 못한다. 내 눈에 켈리와 짐 샤가 본인들로선 국내 자료들, 즉 내수 컨텐츠를 차용한다면, 손동현은 본인의 영역에 수입된 외국의 컨텐츠를 끌어들인다는 점만이 달라보인다.  
 
펠름시스트(palimpsest)는 종이가 없던 시절 양피지에 썼던 글을 지우고 다시 써서 책을 만들던 고대의 글쓰기 방식에서 유래한 단어로, 겹쳐서 다시 쓴다는 개념이다. 식민지의 문화적 정체성은 백지에서 시작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제국주의의 산물로 얼룩진 상태에서 다시 쓰인다는 의미로, 식민지 역사기록을 펠름시스트에 빗댄다. 이제는 다층적인 의미를 갖는 내용을 포괄적으로 가르키기도 한다. 손동현이 잡종이 아닌 주체가 되어 서구의 것을 끌어들일 때, 즉 동양화용 장지에 서구문화의 캐릭터들을 그릴 때, 이미 이 장지에서부터 캐릭터까지 수많은 레이어들이 축적돼 있어서 단순히 ‘종이 위에 그림’으로 치부할 수 없다. 탈식민주의에서 저항담론을 논할때 영문학의 고전을 식민지인이 주체가 돼 다시 쓰는 ‘되받아쓰기(Writing Back)’ 전법이 있다. 낸시 롤스(Nancy Rawles)의 소설 <나의 짐(My Jim)>은 미국 고전인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여성인 흑인 화자의 입장에서 다시 썼다. 손작가의 작법을 굳이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끌어다 쓰자면, ‘되받아쓰기’와 가장 가깝다. 화자와 기법, 배경은 주체적이어도, 가장 핵심이 되는 화면 속 주인공은 여전히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딱 맞아 떨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그 어떤 틀에도 완전히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업의 매력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동시에 어디에나 그럴듯하게 속할 것 같은 기막힌 사이속 공간 만들기에 성공한 것이다.
 
앞서 말한 일군의 사진작가들 등장 이후 또 다른 형식의 초상화 그룹이 등장한다. 존 커린(John Currin, 1962-)은 백인의 저속한 취향을 전면에 드러내는 장치로서 풍만한 몸매의 금발여성 초상을 만화처럼 과장되고 왜곡된 편집을 통해 해학적으로 드러낸다. 리사 유스카비지(Lisa Yuskavage, 1962-)의 경우, 여성적 관점에서 남성적 시선을 조롱하는 장치로서, 존 커린과는 반대되는 개념의 과장되고 변형된 여성의 초상을 역시 만화적 느낌을 상당부분 드러내면서 표현하고 있다. 동양화는 사실 회화를 대표하는 재료인 유화, 즉 천에 오일페인팅을 사용해 작업하는 것보다는, 종이에 연필과 펜, 수채화로 표현하는 만화와 좀더 밀접한 재료적 유사성을 갖는다. 만화나 삼류잡지들을 묶어 규정짓는 저급문화 혹은 B급문화를 고급문화로 간주되는 순수미술계로 끌어올린 시도와 성공이 이 초상화가 그룹에 있었다. 워홀의 팝아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손동현이 차용하는 대중문화이자 B급문화의 아이콘들과 이 작가군의 모델이 통하는 구석이 있다. 반복해 말하게 돼 민망하지만, 손동현이 모델로 세운 캐릭터들은 B급문화에 속한다해도 문화제국주의의 산물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문화를 수용하는 다른 나라의 입장에서는 복잡다난한 컨텍스트를 생산한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손동현은 매해 2-3점의 동물화를 그린다. 동물화라곤 하지만, 모두 실제 만화에서 데려온 동물캐릭터들이다. 2D 애니메이션 <루니 툰>의 캐릭터인 벅스바니와 실베스터를 모델로 한 <토도>와 <묘작도>가 2005년작이다. 2006년에 같은 작품 속의 로드러너와 와일리코요테를 한 화면에 등장시킨 <죽조구자도>, 대비덕과 그 새끼를 그린 <영모도>를 그렸다. 콘프레이크 브랜드인 캘로그의 광고용 캐릭터로 창조된 호랑이 토니가 모델인 <송하맹호도>와 큰부리새를 모델로 한 캘로그 플룻루프의 마스코스 투캔샘이 두 마리 등장하는 <쌍작도>는 2007년에 그렸다. 이 일련의 동물캐릭터가 등장하는 화면들을 시리즈로 묶어 분류한 뒤, 그 특징으로 내세울 것은 배경이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소나무 아래 토니가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늠름하게 서 있다거나, 산등성이 나무둥치에 투캔샘이 앉아 있는 식이다. 돌 뒤에 와일리코요테가 숨어 있고, 실베스터는 나뭇가지 위에 올라 앉은 트위티가 제 손 안에 떨어지길 음흉한 표정으로 기다린다.

상하급으로 문화의 계급화가 가능하다고 할 때, 어린이들이 즐기거나 내용에 깊이가 없다고 여겨지는 만화는 하급문화로 간주된다. 이 하급문화를 유교 문화권의 동양화에서 양반들이 즐기는 상급문화인 문인화와 섞어 제시하는 게 손동현의 작법이다. 또 한 걸음 들어가 따져보면 지금은 계급을 떠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동양화는 비주류의 영역에 속할 것이고, 그에 비하면 많은 이들이 여전히 아끼고 찾는 만화는 주류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렇게 나라간 시대간 서로 다른 문화와 계급 층위를 넘나들면서 발생하는 불편함과 어색함은 피할수 없게 된다. 문화의 가치 자체를 평가해서라기보다는 당대의 헤게모니에 따라 그 문화서열이 뒤바뀌는 모순을 꼬집어주기도 한다. 이 재미있는 문화와 계급 충돌을 비유하자면,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가 등장하는 셈이다. 이 비유를 또 역으로 대입해보면, 앵그르나 다비드식의 그랜드매너로 제작된 서양 전통 초상화에 아기공룡 둘리나 달려라 하니가 제 모습 그대로 들어가 있는 모양새다.   
 
제 3세계 반제국주의 운동에 앞장서며 알제리의 독립을 주도했던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태생적으로 지닌 열등감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난 스스로를 흑인이라 단언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날 인식하길 주저하기 때문에 단 한 가지 해결책만이 있다. 즉, 내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같은 사고에서 출발한 새로운 흑인 초상화가의 움직임이 신선하게 주목받았다. 리넷 이야돔-보야케(Lynette Yiadom-Boakye, 1977-)는 흑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문학 속 캐릭터를 창조해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키힌데 와일리(Kehinde Wiley, 1977-)는 평범한 흑인을 나폴레옹의 초상처럼 유명한 영웅초상의 구도에 집어넣음으로써 초상화의 기능에 질문을 던진다. 이야돔-보야케와 와일리는 그렇게 본인들의 소수성, 혹은 파농식 표현대로라면 열등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주류를 넘보기’를 극복하고 ‘주류를 정복하기’에 도전중이다. 그렇다면 손동현의 미국(주류)문화 속 주인공을 초상화의 대상으로 삼기가 노리는 바는 무얼까. ‘주류를 노골적으로 앙망하기,’ 즉 해학적으로 문화적 사대주의를 전면에 드러내놓기인가. 게다가 주류를 표현하는 방식자체는 현대미술계의 완벽한 비주류인 동양화 기법이다. 그뿐인가. 영화나 만화 속 캐릭터를 모델로 선택하는 중에 악당이나 조연에도 꽤 많은 관심과 비중을 두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딱히 주류를 내세우는 것도 아닌 것이 확실해 보이는 것은, 사실 수퍼히어로물이나 만화 역시 헐리웃 영화 중에서도 매니아층을 거느리는 하위문화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니까 방식과 결과물은 달라도, 비주류와 주류를 교묘하게 섞어 제시한다는 점에선 이야돔-보야케와 와일리의 전술과 유사하다.

손동현 본인은 현상보다는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밝힌바 있다. “어떤 이미지를 가져올 때 역사를 드러내기 위해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역사는 왜 외국인들이나 외국영화, 외국만화캐릭터, 특히 미국의 문화제국주의 사고방식에 기반한 영웅물들의 이미지로서 표현되는가.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왜 하필 미국문화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남는다. 이는 다분히 힙합 등 미국문화를 즐기는 작가 본인의 취향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고, 미국문화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한국문화가 반영된 까닭도 있다. 1980년 이후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환경에서 성장한 한 개인이 미디어와의 영향관계를 말할때 할리웃영화나 할리웃영화의 확장과 같은 드림웍스나 픽사의 에니메이션, 마블 코믹스 등을 빼놓기 어렵다. 한국문화를 말하려면 미국문화를 말해야하는 기묘한 문화적 식민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루하게도, 지속적으로 탈식민주의 이론을 빗대 작품설명을 이어가야 하는 탓도 여기에 있다.  
 
2008년 갤러리2에서 열린 개인전 <왕>에서 손동현은 마이클 잭슨의 데뷔 후 외모 변천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어진(御眞)으로 보이도록 그려진, 한국의 전통 왕좌에 앉은 마이클 잭슨만 총 40여점이다. <왕의 초상(01)_갓투비데어>, <왕의 초상(22)_맨인더미러>, <왕의 초상(33)_스크림>처럼 40여점의 번호를 매긴 뒤에 초상을 참고한 시기에 잭슨이 발매한 앨범 제목을 붙인 일련의 시리즈다. 유년기의 마이클 잭슨은 처음에는 호피무늬 의자에 앉아있다가, 팝의 제왕 호칭을 얻은 1989년부터는 왕좌인 붉은 용상에 앉게 된다. <왕의 초상(26)_블랙오어화이트>부터 마지막 작품 <왕의 초상(40)_원모어찬스>에 이르기까지 그 왕좌를 빼앗기지 않는다. 자타공인 팝의 제왕이었던 마이클 잭슨이지만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지우고자 지속적으로 성형을 한 과정이 40점의 시간순서대로 기록된 작품들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바바는 과거 식민지하에서 흉내내기(mimicry)가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했다. 피지배자의 지배자 흉내내기를 통해, 흉내내는 자들은 지배자의 권위를 위협하고, 지배자는 자신을 흉내내는 이들이 폭동과 반란을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불안해한다.

바바는 이런 흉내내기라는 상징적 저항이 제국주의의 견고함을 손상시킬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이미 비주류로서 주류의 왕으로 등극한 마이클 잭슨이 본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주류의 외형을 따라하고자 한 기괴한 흉내내기의 궤적을 좇으며 손동현이 말하고자 한 바는 의미심장하다. 한 명의 피지배자(흑인-어린아이-신인가수)가 지배자(백인-어른-팝의 제왕)이 되기까지의 관상을 살피며, 진정한 의미의 전신사조를 드러내보려 한 듯하다. 한 인간이 비주류에서 주류가 되어가는 과정을 잭슨처럼 노골적으로 발현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의지가 그처럼 성공한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사용한 성공이란 단어에 대한 평가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활동내내 한번도 매스컴의 주목도가 떨어진 적도 없고, 인기가 사그라든 적도 없기에, 작가가 원하는 시기의 자료를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겠다. 한 명의 인간이 외형과 앨범발매 등으로 시대의 아카이브가 되어준 셈. 그렇게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한 인간의 역사를 추적하며 유행을 주도하던 팝의 제왕의 복장과 외양을 통해 문화의 트렌드를 한눈에 보는 장도 펼쳐진다.
                                                
2010년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의 개인전 <아일랜드>에선 병풍화를 소개한다. <뉴욕>매거진이 선정한 ‘맨하튼을 가장 잘 부순 영화 10편’을 기준으로 삼아, <딥 임팩트>, <아마게돈>, <고질라>까지  총 3편의 영화에서 도시를 부시는 장면을 뽑아 다각도로 재해석해 병풍에 그려 전시했다. 총 8개의 씬으로 구성된 8폭 병풍이었다. 이전 작품들과 달리 색채를 빼고 수묵형식으로 그렸고, 산수화를 그리고자 했던 의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인물보다는 풍경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이렇게 인물화, 산수화, 문인화, 서예 등 동양화의 모든 장르를 통과시키면서, 작가는 본인이 제일 잘 다룰수 있는 매체로 가장 관심있는 소재를 표현한다. 동시에 문화사 미술사적으로 촘촘한 이야기거리를 쌓아가며 저 역시 미술사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해가고 있다. 작가의 작품 자체가 혼잡한 세상의 혼종변이체로 기능하는 듯하다. 탈식민주의 이론에서야 잡종이라는 뉘앙스를 내포한 단어가 혼종성이지만, 이 혼종성이야말로 손동현 작업의 특징이다. 이왕 잡종이 될 바에 그가 그리는 수퍼히어로처럼 ‘수퍼 잡종’으로서 중심이 되는 것, 그리하여 지배되는 세력에 역으로 공격도 가능해 지는 것이 작업의 차후 과제라 하겠다. 사실, 잡종의 역습은 시작된지 오래다. 케이팝의 경우 미국의 팝뮤직을 한국적으로 재생산해 아시아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어왔고, 최근엔 미국과 유럽권에서도 관심을 갖는다. 조금 다른 경우로는 〈쿵푸팬더〉처럼 혼종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할리웃 영화를 들 수 있다. 할리웃의 메이저 영화사가 전세계 시장을 노리고 다양한 나라의 문화 요소들을 섞어서 만들어낸 혼종 컨텐츠다. 세계화 시대엔 경계없이 모든 넘나들기가 가능하다. 네 것 내 것의 구분이 완전히 모호해 지는 것이고, 그 모호함 와중에도 뚜렷한 시각으로 구분짓고 특징지어주는 시선이 귀해진다. 손동현의 동양화를 내세운 서구컨텐츠 회화가 가치를 갖는 지점이 된다.
 
2011년 갤러리2에서 열린 전시 <악당>에서 손동현은 1962년부터 2002년 사이의 <007시리즈> 20편에 등장하는 악역의 변화를 좇는다. 이 일련의 파노라마를 통해 그는 시대마다 존재하는 두려움의 대상을 분류한다. 냉전기엔 사회주의 인민복을 입은 이가, 자본주의 성공 이후엔 억만장자나 재벌이 악을 상징한다. 애꾸눈이거나 고양이나 카멜레온 등의 애완동물을 아끼면서 잔인한 명령을 하는 악당 보스의 정형성을 답습하기도 한다. 마약을 거래하는 흑인이나 북한군과 연관한 악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는 ‘호명(interpolation)’에 대해 설명한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부름을 당한 개개인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국주의란 어느 시대나 통용되는 것이 아닌, 특정 시기에 특정 집단에서 헤게모니를 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시적 가치체계다. 정형화와 타자화 및 이데올로기의 호명 방식에 의한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해 알튀세르는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공산주의를 타자로 규정한 사회에서는 공산주의자는 악으로 간주되고, 개개인은 스스로의 판단보다는 제국주의가 잡은 헤게모니에 따라 다시 공산주의를 악으로 삼는다. 그 악의 근원이라는 게 그렇게 정치적이다. 악당이란 사실 악행을 자행해서 붙여지는 타이틀이 아니라, 구분짓기와 타자화의 산물이란 뜻이다.
 
<악당>전이 열린 해인 2011년, 손화백은 41점에 달하는 <마스크> 시리즈도 제작한다. 온갖 히어로물에 등장하는 마스크만을 모아 그린 것이다. 2012년에는 부채에 각종 우주선을 그린 소품작업을 50여점 내놓는다. 22명의 외계인 캐릭터만을 한권의 고서에 모은 <외계로부터>도 이 해에 제작됐다. 역시 22개의 로봇을 고서에 그린 <로봇>도 함께 그렸다. 화판 표구의 형식을 벗어난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은 고민이 이 해에 집중된다. 부채나 책의 형식을 빌어 작품의 외견에 변화를 주는 것과 동시에, 인물을 벗어난 소품에 좀더 천착하면서, 작가의 자료 수집벽을 좀더 강하게 드러낸다. 오타쿠적으로 하나의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그림으로 남기는 시기였다고 본다. 사실 손동현의 모든 작품은 오타쿠적 자료 수집과 깊이 연관한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논문 작성을 위해 자료를 모으는 학자적 태도로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심의 대상의 오타쿠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매니아적 만화와 영화 등의 대중문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학자라기 보단 오타쿠라고 지칭하는 것이 어울린다. 다소 과격한 분류를 용서하시길.  
 
안정적인 명성을 획득한 유명작가의 작품세계는 2014년부터 급격한 변화를 갖는다. 완전히 ‘탈’식민주의를 이룩해낸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행보에는 캐릭터를 스스로 창조한다는 특징이 있다. 일단 2014년 윌링앤딜링에서 열었던 전시의 제목부터 독립의 서광이 비치는 <소나무>다. <일월오봉도>에서는 군주의 위엄을 드러내며, <세한도>에서는 군자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고, <까치호랑이>에서는 신성함으로 악귀를 쫓는 나무로 나타나며, <십장생도>에서는 장수를 은유하는 이 천하무적의 소나무를 수퍼히어로로 탄생시킨 면면이 흥미롭다. 창작과 혼합능력이 무르익어 정점에 달한 작가는 이미 있는 수퍼히어로의 특색들에서 부분적인 아이디어만을 얻어, 4개의 고유한 캐릭터 <파인더그레잇(Pine the Great)>, <미스터하이피델리티(Mister High Fidelity)>, <셔먼더에버그린(Shaman the Evergreen)>, <마스터노티니들스(Master Knotty Needles)>를 창조한다. 신디 셔먼이 초기작에서 고전영화의 전형성을 추출해 본인이 등장하는 사진을 찍어, 이미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고 의심받지만, 사실 완전히 새로운 씬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익숙한 캐릭터인 듯 하지만, 순수 창작물인 히어로들이 탄생했다. <파인더그레잇>에서 삐죽삐죽 직선으로 뻗는 소나무의 초록빛 솔잎은 머리카락으로 변하고, 딱딱한 소나무 껍질의 패턴은 이미 갑옷의 모습이다. <미스터하이피델리티>와 <셔먼더에버그린>에서 내세우는 굴곡은 모진 바람과 시간을 견뎌낸 소나무가 얻은 미학이다.

<마스터노티니들스>은 침엽수림인 소나무의 날카로운 잎의 이미지에 착안한 날렵한 영웅상이다. 이 캐릭터들이 모두 등장하고, 그들과 대립되는 악의 캐릭터들과 함께 코믹북의 표지나 포스터처럼 제작한 족자들도 함께 전시됐다. 그리고 이 소나무캐릭터들의 이름은 중국 현대미술가 수 빙(Xu Bing, 1955-)이 만든 로마자 알파벳이 상형문자인 한자형태로 제시된 전혀 새로운 문자로 쓰여졌다. 셔먼이나 수 빙 같은 현대미술가들의 작법을 차용하고, 캐릭터는 새로 창조해내는 또 다른 방식의 뒤섞기를 만들어내는 게 손동현 작업의 최근 흐름이다. 그리고 여기 수 빙의 문자를 차용한 부분에 다시 시선이 머문다. 세계사의 패권이 중국에 넘어갔다면, 세계의 주류가 되는 문자의 모양은 분명 달라졌을 것임을 암시하는 이 한자의 형태를 한 영문, 그리고 마오쩌둥에서 빌린 수 빙의 철학 “옛것을 오늘에 맞게 쓰고, 외국의 것도 중국에 도움이 되게 쓰라”는 말이 손동현 작업의 자세를 대변하는 듯하다.
 
더이상 새로운 변화는 없을 것만 같던 시점에 업데이트를 멈추지 않는 이 부지런한 일꾼은 2015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다시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화가 사혁(謝赫)이 제시한 산수화의 여섯가지 요체인 ‘사혁의 육법(六法)’을 근간으로 <육협(六俠)>이라는 인물화 시리즈를 제작한 것. 동양화의 대표화론을 내세워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한 이 시리즈 역시 작가가 창조해 낸 캐릭터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소나무> 전과 유사하다. 여섯 명의 협객으로 이뤄진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육법에서 논하는 산수에 대한 항목들을 협객이 갖는 ‘무공’의 특성으로 재해석한다. 육법의 하나인 기운생동을 표현하기 위해 만화에서 사용하는 온갖 에너지의 표현을 조합해 <마스터스피릿(Master Spirit)>을 그려내는 식이다.
 

손동현이 꺼내 쓸 수 있는 레퍼런스는 구글적이다. 10년전만 해도 그의 전지구적이고 시대를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과 구체적인 차용에 백과사전식이라는 표현을 썼겠지만, 시대는 변했다. 중고서점에 나도는 세계대백과사전과 옥스포드어학사전에 아무도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키워드를 탁탁 입력해 엔터 버튼을 누르면, 1초만에 관련 정보가 셀 수 없이 뜨는 시대이니까. 구글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손동현은 똑똑한 편집의 기술, 유행하는 말로 큐레이팅의 예술을 보여준다. 손동현의 그림은 과거의 레시피를 철저하게 탐구해, 맛있는 부분은 살리고 불필요한 부분은 새롭게 바꿔 만들어낸 퓨전 비빔밥이다. 잘 지은 밥 위에 알록달록 예쁜 고명을, 그 맛 또한 조화롭도록 잘 버무린 맛있고 잘난 비빔밥 말이다. 자, 기막힌 비빔밥은 탄생했다. 그리고 바통은 넘겨졌다. 이 비빔밥을 어떻게 쌀국수나 부리또처럼 지구라는 하나의 동그란 마을에 인기 아이템으로 정착시킬 것인가가 문제다.

사실 뉴욕에서 비빔밥이 어중간하게나마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뉴요커들의 오해에서 시작했다. 풀을 섞어먹는 거라면 환장을 하는 이네들이, 나물과 야채들을 올린 비빔밥을 일종의 샐러드라고 여기고 수용하기 시작한 것. 밥알이 좀 얹어진 한국식 샐러드 개념으로 비빔밥을 친근하고 건강한 음식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뉴요커들이 비빔밥을 포크랑 젓가락으로 슬슬 비벼 집어먹는 모습을 보는게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손동현의 작품을 내세울 때 일일이 설명하자면 입만 아픈 신비로운 동양화 개념을 조금 덜 강조하고, 화풍이 좀 다른 한국형 코믹북을 닮은 현대회화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어떤가 싶어지기도 한다. 오목조목 읽는 재미가 풍성한 그의 그림을 좀 더 많은 장소에서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손동현의 작품을 향한 어떤 비유도 결론도 불필요하다. 그의 작업은 과거에도 계속 변했고, 지금도 변하는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하며 발전할 테니까. 앞으로도 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문화적 레퍼런스들이 출몰할테고, 그는 그 정신없는 내용들을 멋지게 편집해 현재를 되돌아 보게 해줄테니까. 그리고 그 거듭되는 변신과 편집놀이가 우릴 실망시키지 않을테니까. 난 그의 10년 뒤가 못 견디게 궁금하고, 20년 뒤의 미지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와 동시대를 살며 차기작을 기다릴 수 있다는 건 분명한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