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택(b. 1968)은 펜, 연필, 책 등 일상적인 소재로 현대인의 집착적인 욕망이라는 주제의 작업을 선보여 왔다. 또한 그는 디자인과 회화, 팝아트와 사실주의가 혼합된 조형성과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넘나들며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열었다.

홍경택, 〈컵이 있는 정물〉, 1993 ©K-ARTIST.COM

1990년대부터 홍경택은 팝아트, 기하학적 추상, 색면 추상 등에 영향을 받으며 강렬한 원색과 색채의 대비, 리듬감 있는 화면 구성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실험해왔다. 이와 함께 작가는 사물의 표면과 물성 자체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그의 눈길을 끌었던 사물은 플라스틱으로 된 컵, 머리빗 등이었다.

홍경택, 〈해골 1〉, 1994 ©K-ARTIST.COM

홍경택은 일회적이고 가벼우며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플라스틱의 물성에서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았다. 20대의 홍경택이 마주한 사회는 정치적 암울함과 대중문화의 화려함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던 극단의 시기였다. 그러한 혼돈 속에서 작가는 가벼움과 무거움, 쾌락과 고통, 삶과 죽음의 대비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정물〉 시리즈에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나타난다.


홍경택, 〈연필 2〉, 1995-1999 ©더 아트로

2000년 인사미술공간에서의 첫 개인전 “신전”에서 홍경택의 대표작 〈펜〉 시리즈와 〈서재〉 시리즈가 발표되었다. 그 중, 〈펜〉 시리즈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현대미술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하며 홍경택은 세계 미술시장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펜〉 시리즈에 등장하는 펜이나 연필 같은 일상적 사물들은 형형색색 빼곡하게 어우러진 채 마치 분수가 솟아오르듯, 꽃이 만개한 듯 폭발적인 에너지를 함축한 상태로 묘사된다. 대형 캔버스에 현란하고 빼곡하게 그려진 일상적 사물들은 낯설게 다가오게 되고 그로부터 추상성을 느껴지게 한다. 여백 없이 빽빽한 구조에 대해 그는 “현실에서 파생된 강박증의 극단적 표현”이라고 이야기 한다.


홍경택, 〈Pens - Anonymous〉, 2015-2019 ©홍경택

어느 날 홍경택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아 놓은 수많은 펜들 중에서 이름 모를 캐릭터가 달린 펜 뚜껑에 주목하게 된다. 펜 끝에 달린 공장에서 만들어진 익명의 캐릭터를 통해 작가는 우리 시대의 현대인을 빗대어 바라보게 되었다. 이로부터 작가는 〈펜〉 시리즈에 ‘어나니머스(Anonymous; 무명씨)’라는 새로운 주제어를 담으며 현대인의 이중적이며 강박적인 욕망을 다뤘다.


홍경택, 〈서재 2〉, 1995-2001 ©국립현대미술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서재〉 시리즈는 우연히 보게 된 조선시대 민화 중 하나인 책가도(冊架圖)로부터 영감을 받아 시작된 작업이다. 〈서재〉 시리즈는 인류의 역사가 집적된 서재라는 공간을 현대적으로 변용함으로써 현대인의 충돌하고 증식하는 욕망을 녹여낸다.
 
그 중, 〈서재 2〉(1995-2001)는 제단의 형식으로 그려낸 작업으로, 제일 위에는 예수 그리스도, 그 다음에는 비너스 그림, 제일 아래 칸에는 케이크가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를 종교, 아름다움, 쾌락 순서로 보고 이를 인류의 역사를 상징하는 서재라는 공간 안에 풀어냈다.


홍경택, 〈Fuck and Roll〉, 2008-2009 ©K-ARTIST.COM

〈서재〉 시리즈에 종교적 도상이나 전통 회화의 도상이 등장했던 한편, 〈훵케스트라〉 시리즈에는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훵케스트라〉 시리즈는 당시 작가가 즐겨 듣던 대중음악에서 받은 감흥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제목인 ‘훵케스트라(Funkchestra)’는 대중음악 장르인 ‘훵크(Funk)’와 클래식 연주의 한 형태인 ‘오케스트라(Orchestra)’의 합성어다.
 
이 작품에서 상하좌우의 대칭구도 속에 원색의 형광 빛의 현란한 패턴들은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펑크 음악의 환각성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들은 MTV, 클럽, 전광판의 이미지들로 표상되는 현대도시의 풍경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홍경택, 〈BTS〉, 2019 ©홍경택

홍경택은 이름만 들어도 떠올릴 수 있는 우리 시대의 팝의 아이콘들을 일종의 신화로 보고 종교의 아이콘과 동등하게 그림 가운데에 그려 넣는다. 또는 팝송에 나오는 시대를 반영하는 가사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 들인다. 이처럼 〈훵케스트라〉 시리즈의 일련의 작품들은 패턴(추상)과 리얼리즘, 성과 속,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회화와 디자인 등을 교차하며 복잡 다양한 현시대의 관현악을 이루어 낸다.


홍경택, 〈스피커박스 3〉, 2003 ©K-ARTIST.COM

〈훵케스트라〉 시리즈와 짝을 이룬다고 볼 수 있는 〈스피커박스〉 시리즈 또한 작가의 음악감상이라는 취미로부터 시작된 작업이다. 기하학적 추상의 요소가 두드러지는 이 시리즈는 작가가 우연히 스피커 내부를 관찰하게 된 것을 계기로 진행되었다. 스피커 그물을 떼어내면 그 안에 다양한 모양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한 작가는 이를 새로운 패턴으로 제작하게 된다. 홍경택의 독자적인 시각 구조로 치환된 스피커박스는 현란한 색과 패턴으로 캔버스 화면을 한 가득 점유하게 된다.

홍경택, 〈모놀로그〉, 2012 ©국립현대미술관

화면을 가득 채우는 올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 구성 방식으로 현대 사회의 욕망과 강박을 표현했던 기존의 작품과 달리 〈모놀로그〉 시리즈는 거대한 손이 작은 무언가를 잡으려 하는 모습만이 묘사되며 다소 무겁고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품 속 거대한 손은 그 누구도 실제로 본 적 없는 절대자의 손을 상징하며, 그러한 손은 작고 여린 존재로 상징되는 나비나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을 향한다. 홍경택은 이 시리즈에 대해 “절대자의 손을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가 아는 절대자는 선과 악의 경계에 있다.”고 설명했다. 〈모놀로그〉 시리즈는 절대자의 손을 통해 영적인 세계와 삶, 그리고 죽음의 본질에 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홍경택, 〈반추 2〉, 2013 ©K-ARTIST.COM

이처럼 홍경택의 회화는 일상적인 사물이라는 소재의 가벼움을 통한 욕망의 표현을 넘어서서 삶과 죽음, 종교와 세속 등 다양한 삶의 속성에 대해 말하는 작품까지 아우른다. 그의 작업은 현대의 시각정보에 대한 감각의 추구와 함께 존재성 및 양가성에 대한 고민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반영해 오고 있다.

“종교에서 포르노까지 우리 시대의 모습을 생생한 날것 그대로 그리고 싶다.”


홍경택 작가 ©포브스 코리아\

홍경택은 경원대학교에서 회화과를 전공하고, 2000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첫 개인전 “신전”을 개최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두산갤러리 뉴욕, 아르코미술관, 갤러리현대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대안공간 루프, 삼성미술관 플라토, 인도 Vyom 아트센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독일 보훔 미술관, 산트럴 이스탄불 미술관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3년 작가는 최연소 ‘제14회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작품 소장처로는 국립현대미술관(서울, 한국), 삼성 리움 미술관(서울, 한국) 일민미술관(서울, 한국), 두산갤러리(서울, 한국) 아모레퍼시픽(서울, 한국) 등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