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과정에서 오는 존재의 쓸쓸함 - K-ARTNOW
홍성철 (b.1969) 대한민국, 서울

홍성철은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1994)하고 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에서 Fine Art/Integrated Media 석사학위를 취득(2001)했다.

개인전 (요약)

작가는 2000년 칼아츠 (로스앤젤레스, 미국)에서 첫 개인전 《White Cube》를 개최했는데 천장에서 바닥까지 가늘고 가벼운 실들을 내려놓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후 본격적으로 줄을 이용해 신체 일부나 사물의 이미지들을 프린트한 입체 설치작품을 제작했다.

2007년에는 영은미술관 (광주, 한국)에서 진행하는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지원프로그램 ‘2006-2008 영은 아티스트 프로젝트’ 에 참여해 개인전 《영은 아티스트 릴레이》를 개최했다. 이 전시에는 손을 표현한 작품을 주로 선정해 전시했다.

홍성철 작가의 작품에는 ‘손’ 이라는 대상이 자주 등장하는데 손과 사물을 함께 표현한 작품은 2011년에 처음 선보였다. 이때 제작한 신작을 위주로2012년 하다 컨템포러리 (런던, 영국)에서 《Solid but Fluid》를 개최했다.

2018년에는 유아트스페이스(서울, 한국) 에서 《Solid but Fluid》을 개최했는데 한국에서 7년만에 열린 개인전이었다. 이 전시에서는 ‘손’ 이라는 주제를 통하여 소통의 의미를 표현한 작품들과 최근에 제작한 신작들을 선보였다.

그룹전 (요약)

작가는 2000년 전까지는 국내 활동이 주를 이루었는데 2000년 첫 개인전 이후부터 해외에서 이름이 알려지며 다수의 국내외 미술관과 갤러리의 기획전에 초대되었다.

홍성철 작가의 작업은 국내에서도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지만 해외에서 인기가 더 많아 국내보다 해외에서 열린 많은 그룹전에 참여했다.

작가는 사치갤러리(런던, 영국)에서 2012년에 열린 《코리안 아이 2012》 에 참여했다. 작가 34명의 작품 100여점을 전시했는데 런던에서 열린 한국미술 전시로는 최대규모였다. 한국 동시대미술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통찰력 깊은 작품들을 선정했는데 일찍이 해외에서 좋은 반응과 인정을 받고 있었던 작가도 함께 선정되었다.

이외에도 《보다 보여지다》 (2007, 금호미술관, 서울, 한국), 《2010, 영은10주년 기념전 Remind 그곳을 기억하다》 (영은미술관, 광주, 한국), 《Korean Collective Basel 2011》 (2011, hall33, 바젤, 스위스), 《Re-presenting Representation VIII》 (2014, ARNOT ART MUSEUM, 뉴욕, 미국),《Portrait Gallery》 (2015, Kallenbach gallery,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Beyond The Frame》 (2019, Taksu gallery, 싱가포르), 국립현대미술관(서울, 과천/한국),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한국), Waterfall Mansion gallery(뉴욕, 미국) 등 국내외에서 열린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했다.

작품소장 (선정)

작품은 보고시안 재단(브뤼셀, 벨기에), 국립 현대 미술관(서울, 한국), 서울 시립 미술관(서울, 한국), 금호 미술관(서울, 한국), 벽산 문화 재단(서울, 한국), 코오롱 그룹(과천, 한국), BGF리테일(서울, 한국), CJ E&M(서울, 한국), SK 텔레콤(서울, 한국) 등 다양한 미술관과 기업에 소장되어 있다.

주제와 개념

홍성철은 현대 기술을 접목한 다양한 미디어로 조각, 설치, 퍼포먼스, 그리고 인터렉티브 미디어 작품을 선보여왔다.

작가가 매체를 다변화하며 오랫동안 탐구해온 주제는 존재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된 실존적 불안과 긴장, 그리고 이러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나’를 인지하여 사회, 인간과 소통하고 관계 맺기를 향한 부단한 의지이다.

‘스트링(String)’ 연작은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연작이다. 이 연작은 양감이 희박하고 유동적인 재료인 ‘줄’로 조형적인 형태와 구조를 축조하는 입체 설치 작품이다. 이 연작은 ‘스트링즈(Strings)’, ‘스트링 핸드(String Hands)’, ‘스트링 미러(String Mirror)’, ‘스트링 칼럼(String Column)’ 등의 연작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반복되고 중첩된 줄이 구축한 레이어 위에 이미지가 펼쳐지므로, 작품은 때로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작가는 이에 영상을 투사하거나 설치와 감상 방식의 묘를 더해 미디어 아트 혹은 인터랙티브 아트 작품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첨단기술과 미디어를 통해 상호작용성을 자기 작업에 들여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비전통적인 조각재료에 작가만의 방법론으로 질서와 규칙을 부여하여 새로운 개념의 조각을 창안한 것은 홍성철만의 성취라 볼 수 있다.

특히 작품의 형식과 실존적 탐구와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긴밀하게 연결하여 작품 내적으로 설득력을 획득하고, 외적으로는 비평적 쟁점과 감상의 다양한 층위를 부각시킨 것 또한 유의미한 지점이다.  

형식과 내용

홍성철은 ‘스트링’ 시리즈를 꾸준히 전개하고 변주함으로써 옵티컬 아트와 키네틱 아트 양자의 개념을 더욱 심화한 시각적 환영을 선사한다. 홍성철 주로 손, 눈, 얼굴과 같은 신체 일부나 전체를 사진 찍고, 이를 탄성이 있는 가느다란 줄에 인쇄한다.

이 줄을 반복 나열하여 전체 이미지가 재현되는 화면을 만들고, 이 화면을 다시 입체나 부조와 같은 형태로 설치한다. 컴퓨터 화면의 픽셀이 모여 화상을 구성하듯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통합되는 과정을 거친 이미지가 ‘줄’이라는 아날로그적 재료로 3차원 디지털 이미지로 변모되는 셈이다.

홍성철이 촬영, 인쇄, 분할, 통합을 중첩하여 만든 작품은 태생적으로 불안정하다. 이미지는 관객의 감상 위치나 시선에 따라 달라지고, 작가가 설정한 음악소리, 전시 공간의 공기 흐름이나 관객의 손길에 의해 일시적으로 붕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이내 원래의 이미지로 돌아온다.

홍성철의 작품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손’은 개개인의 본질, 자신과 외부와의 접점, 현대사회의 관계와 소통을 상징한다. 복잡하게 얽혀 맞잡은 손, 구슬이나 실타래를 감아 잡은 손, 또는 구겨진 종이를 위태롭게 붙잡거나 찌는 손은 고립된 삶에서 친밀감, 상호 이해, 나아가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작가의 갈망이자 의지로 읽힌다.

“나라는 실체의 의미는 그 자체로 닫혀질 수 없으며 끊임없이 지연되고 연기될 뿐 궁극적인 실체와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

개체와 군집의 형상화, 사회적 의미로 기호화된 신체, 오브제의 활용, 시각적 유희를 담지하는 홍성철의 작품은 동시대 디지털 문화의 인간 소외와 존재론적 불완전성을 매체적,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관객이 몸을 움직여 적극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나아가 작품과 상호작용하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지각하도록 한다.

지형도와 지속성

홍성철의 작업은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종합적인 의미망을 구축한다. 그리고 이 의미망이 짜이는 바탕인 화면은 독특한 시각적 유희를 담보하는 인터랙션을 추구한다. 일반적인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에게 디지털 감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이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 있는 인터렉티브 작업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String Tongue’과 ‘Perceptual Mirror’로 대표되는 2000년대 초반에 집중하여 제작된 미디어 아트나, 불규칙적으로 점멸하는 태양열 LCD 유닛이 격자로 배열되어 기하학적 추상을 이루는 ‘blinker’ 연작은 ‘스트링’ 연작에 작가가 담고자 했던 삶의 본질과 예술에 대한 사유를 멀티미디어 아트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예술세계와 정신사를 발전시키고 이를 다양한 매체로 확장하여 드러내는 홍성철은 작업 초기에는 국내에서 활동하였지만, 캘리포니아예술대학 시절 이후 활동 무대를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지의 유럽으로 넓혔다.

데뷔 이후 국내에서 미술관, 갤러리, 아트페어 등 다양한 경로로 작품을 선보이는 동시에, 런던의 폰토니 갤러리 등 유럽의 유서 깊은 갤러리가 수년간 국제무대에 소개해온 작가로서 해외에서의 입지도 탄탄히 다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몸이라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이미지를 다루면서도 긴장감과 풍부한 메시지, 아름다운 형상을 전달하며 틀 안에 안주하기보다 다각도의 노력을 통해 기존 작품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소통의 과정에서 오는 존재의 쓸쓸함
심혜련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함은 인간은 사회에서 혼자서 살 수 없고 늘 타인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소통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소통 없는 타인과의 삶이란, 어쩌면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는 지옥일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소통을 버거워하면서도 늘 오해 없는 소통을 꿈꾼다. 우리는 이러한 소통의 과정에서 상처받고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소통을 꾀하면 꾀할수록 소통의 어려움을 깨닫고 다시,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존재의 쓸쓸함을 안고 말이다.

홍성철 작품의 주제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존재간의 소통’이다. 그는 지금까지 다양한 주제들과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서 이러한 존재간의 소통을 시도했다. 그가 이전의 작품에서 매체들을 사용해서 상호 작용적인 작품들을 선보인 이유도 소통을 위해서였다. 매체를 이용해서 좀 더 소통의 기회와 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런 그가 변했다. 이번 전시회에서 그는 매체를 통한 상호 작용적 작품을 선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통에 대한 노력을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매체를 통한 소통의 노력을 포기한 것인가?

둘 다 아니다. 오히려 본질적이며 원시적인 소통의 가능성으로 회귀했다고 볼 수 있다. 또 그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했던 소통의 과정에서 겪은 소통의 어려움들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그는 그간 사용했던 매체를 이번 작품들에서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매체가 주는 번거로움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까지 상호 작용성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할 때 사실 번거로움을 느끼곤 했다. 매체 예술들은 상호 작용성이라는 이름으로 작동과 조작을 수용자에게 권한다.

어쩌면 이는 수용자에게 작품에로의 몰입과 관여라는 놀라운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반면 번거로움과 작동 불가능이라는 황당한 상황을 연출해주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많은 매체 예술 전시회에서 기술상의 이유로 이 작품은 지금 작동되지 않는다는 설명문을 볼 수 있었다. 작동되지 않는 상호 작용적 매체 예술 작품은 전시에서 전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런 일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종종 발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을…

그래서 홍성철은 이러한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소통의 원형적인 형태로 되돌아간다. 바로 실이 그것이다. 그에게 실은 관계의 부재와 오해 속에서 생긴 소통의 원초적인 욕구가 만나는 지점이다. 실은 터진 곳을 엮어주기도 하고, 다른 대상과 연결시켜주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이 끊어짐으로써 비로소 사회 속에 던져지게 된다.

탯줄의 끊어짐은 인위적인 소통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러한 실 또는 줄에 그는 주목한다. 그래서 그는 손이라는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다시 실 또는 줄에 프린트해서 이를 다시 엮는 작업을 한다. 여기서 그가 이미지를 매개해서 표현하는 실이라는 매질뿐만 아니라, 매개해서 보여주는 이미지의 대상이 손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손, 우리는 외부세계와 접촉할 때 오감을 사용한다. 특히 시각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눈으로 하는 지각과는 달리 손으로 하는 지각은 직접적인 지각이다. 관조적 거리두기가 아닌, 직접 만지고 체험하는 그러한 지각인 것이다. 직접 지각이 주는 효과는 매우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만지고 느끼려고 한다. 타인과의 소통을 확인하기 하기 위해 손을 잡기도 하고, 또 그 손에서 느껴지는 존재의 낯섬과 쓸쓸함에 당황하기도 한다. 그런 손이 그의 작품에 지각의 소통 통로가 아니라, 대상으로 등장한다. 아니, 작가 자신이 바로 손이고, 그래서 작가는 결국 손을 통해 또 다른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손들은 마치 눈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손이 수단이 아니라, 주체가 된 것이다. 허나 그 손들은 헛헛하다. 소통의 부재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의 손들은, 아니 그는 무언가를 갈구한다. 갈구하는 손짓들은 쓸쓸하다. 무언가를 잡으려 하는 듯하기도 하고, 잡기를 포기하고 혼자 놀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손이 등장하는 작품은 손이 두개이기 때문에 더욱 존재의 쓸쓸함을 가중시킨다. 두 개의 손은 때로는 어긋나 있고, 또 때로는 손등을 마주 하고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손은 바로 홍성철 자신인 것이다. 그는 손을 통해 자신의 소통의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굵은 실에 프린트된 손들은 뚜렷한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즉 경계가 모호하다. 또 자세히 보면 하나의 손 뒤에는 그림자처럼 또 다른 하나의 손이 겹쳐져 있다. 손들은 애매하게 중첩되어 있다. 이 또한 작가 자신의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여지는 손(자아)만이 아니라, 뒤에 숨어져 있는 또 다른 손(자아)들… 이는 타인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분열된 자아간의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소통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와의 화해를 통한 자기와의 소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홍성철의 또 다른 작품들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조그마한 LCD 모니터 조각들을 사용한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실에서 모니터로 그리고 모니터 사이 사이로 섞여있는 거울로의 전환.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이러한 급작스러운 매질의 전환이 있는 것이며, 이는 실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모니터와 거울은 둘 다 외부의 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외부 세계와 연결의 역할을 하는 실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어쨌든 그는 외부 세계와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다양한 매체들을 사용해서 이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움직임에 대한 그의 집착이 낳은 결과이다. 실은 고정되어 있지만, 다분히 유동적이기 때문에 흔들린다. 즉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LCD 모니터 조각들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들도 빛에 의해서 다르게 반응한다. 각자 다르게 반응하는 조각들은 더미를 이루면서 마치 하나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결국 그는 다양한 매체들을 실험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하나의 매체를 고집함이 없이 다양한 매체들에 열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물론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에는 다양한 매체들을 사용해서 상호 작용성을 보여주는 그러한 작품들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좀 더 나은 소통의 가능성을 위해서 일 것이다.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면 할수록 아마도 존재의 쓸쓸함과 소통의 불가능성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도 아마도 다양한 매체들과 소재들을 통해 아픔의 과정 또한 보여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소통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에서 실들의 중첩과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레이어 효과를 보여주듯이 그는 소통의 과정에서 오는 존재의 쓸쓸함도 마치 레이어처럼 겹쳐지고 중첩될 것이다. 이 겹쳐짐과 중첩을 통해 손에 굳은살이 생기듯, 존재에도 굳은살이라는 내성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성은 소통의 과정에서 오는 존재의 쓸쓸함을 앞으로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할 때 아마도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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