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상의 작품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는 관객의 자유이다. 그의 작품은
의미와 가치판단에 있어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진지하게 진술하는 태도로 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인간의 시지각부터 시간과 공간, 사진과 조소, 실재성과 가상성, 그리고 시대정신에 관한 진술서가 된다. 권오상 작업의 의미와 가치판단에 대한 관객의 자유도는,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그의 작업이 실제로 이러한 다양한 맥락을 성공적으로 동시에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권오상의 사진조소 작품은 가벼운 조각을 만들어내려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시도는 재현과 모방에 대한 의구심이라는 근대적 예술 담론의 맥락에 있으며, 조각이라는 매체에 관한 문제제기였다. 조각에 대한 실험 과정에 사진이라는
매체를 차용하는 것은-혹은 사진에 대한 실험 과정에 조각을 차용한 것이라도-많은 부분을 시사한다. 그의 사진조소는 3차원 공간의 실재를 2차원 평면의 파편으로 재현하고, 그 조각들을 모아 다시 3차원의 입체로 구성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 과정은 즉각적으로 사진과 조소라는 장르의 경계나, 재현과
모방의 한계라는 미술의 근대적 담론을 상기시키지만, 그 결과물이 드러내는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우리의 삶과 맞닿은 현실적인 맥락에서부터 실존성에 관한 철학적인 의미, 시지각의 시간적 오류 문제를 적나라하게 펼쳐놓는다.
먼저 그의 사진조소 작업을 살펴보자. 수백장의 스틸 사진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조소에서 각각의 사진은 서로 다른 시간에 촬영되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바라볼 때에 그것이 존재하는
순간과 동시에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의심치 않지만, 권오상의 작업은 시각과 시간을 무차별하게
재구성하여 보는 이의 혼란을 초래한다. 우리 시각의 즉각성, 동시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권오상 작업의 소재는 남성, 여성,
개, 자동차, 가방, 잡지, 꽃이나 돌 등 어느 하나도 우리의 일상과 친숙하지 않은 것이
없다. 권오상은 그 친숙함을 어색함으로 탈바꿈한다. 근본적으로
그 어색함이 시작되는 지점은 익숙한 사물과 존재들이 전시장이라는 기념비적 공간에 들어설 때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감상의 깊이를 따라 순차적으로 증폭된다. 스틸 사진의 파편으로 껍데기가 이루어진, 속이 텅 빈 실물 크기의 존재들이 실존적 공허함을 강조하듯 당당히 감상자의 앞에 서있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머리 대신 오리의 머리가 셋 달렸다거나, 샴쌍둥이처럼
두 몸이 하나로 붙은 인체, 이목구비의 비율이 왜곡되어 외계인의 뉘앙스를 풍기는 나체 작업과 같은, 권오상이 장난을 쳐놓은 작업들이 주는 느낌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정상적인 인체를 가진 작업들보다 심히 어색하지 않으며, 찬찬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러한 기형적 재구성이
더 익숙하고 제자리인 듯하기도 하고, 초월적인 존재의 형상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어색함과 친숙함 사이의 경계는 그것을 살펴볼 것인가, 지나칠 것인가라는
태도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권오상의 작품들은 그 경계에서 보는이로 하여금 일상의
친숙함과 존재의 의미를 성찰케 한다.
권오상의 ‘Flat’ 연작은 언뜻 보면 시계나 보석, 화장품을 직접 촬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잡지속의 이미지들을
담은 사진이다. 어느 사진가의 사진기에 담긴 실제의 사물이, 잡지나
인쇄물에 복제되고 배포되면, 권오상은 그 인쇄물을 오려내어 아주 간단한 입체로 만든 뒤, 그것들을 화면 가득 나열하여 다시 사진으로 담아낸다. 이러한 공정의
의미를 살필 때 ‘Flat’ 연작은 사실 진품과 복제성, 평면과
입체와 연관된 예술적 담론의 문제에 있어 사진조소보다 진일보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Flat’의
소재가 된 것들은 권오상의 말을 빌자면 ‘잡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단지 잡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종류의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겹겹의 공정과 그 소재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파급효과는
‘단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이미지’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다. 잡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는 것은
자본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곧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의미가 되고, 실제로 명품시계, 보석, 화장품
등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아이콘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인화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이 시대적 기호들은
물성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복제된 잡지 속 이미지들일 뿐이며, 제작 과정을 통해 수차례의 박제를 거쳐
전시장에 등장한 작품 이 고발하는 실물적 가치의 허구성은 극대화 된다. 한없이 복제된 이미지가 된 아이콘과, 그 박제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이미지인 ‘Flat’은, 시뮬라크르의 부유와 포스트모던의 속성을 그 어떤 언어와 담론보다 명쾌하게 시각적으로 전달해주는 작업이다.
나는 처음 권오상의 ‘Flat’ 연작을 접했을 때에 앤디워홀을 연상했다. 실제로 유사한 문맥에서 해석이 가능하며, 무엇보다도 시대정신이 담겨있고, 또 동시대의 ‘미’를 작품 자체에서 찾을 수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 잣대와 관련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권오상의 작품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는 관객의 자유이다. 권오상의
작업을 두고 미술의 문제와 심지어는 이데올로기나 미적 취향을 언급해두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앤디워홀에
대한 당시의 오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권오상의 작업이 그 의미와 내용을 생각하기
전에 완성도 높은 구조와 진지한 분위기로 보는 이의 흥미를 유발한다는 사실이며, 그 어떤 작품보다 현대적인
작품이자 동시대의 진술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