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택은 현대 정물화의 새 이정표를 제시한 화가다. 그는 ‘정지하고 있는 물건의 그림’이란 의미의 정물화를 거꾸로 해석하는 역발상을 보여줬다. 정물은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 아니라 불꽃놀이처럼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이미지란 사실을 일깨워줬다. 덕분에 그는 40대에 홍콩 옥션에서 정물화로는 두 번이나 최고가를 경신하는 기록을 세웠다.
 
   작가는 대학시절작가는 민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조선시대 그림이 어쩜 이리 현대적일까? 그 속에는 마티스도 있고, 몬드리안도 있고, 레제도 있었다. 충격을 받은 그는 민화를 현대화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무거운 현대 미술보다는 밝고 경쾌한 민화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민화는 ‘조선시대의 팝아트’다. 팝아트는 현대인의 취향과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며, 표현이 가볍고 화려한 것이 특색이다. 나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민화 책거리의 매력은 이러하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래도 색채가 들어간 것에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색을 볼 수 있는 그림이 별로 없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민화는 민중들이 색을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또한 당시 사물들에 집착한 그림이 많지 않은데, 책거리는 물건에 대해 세속적인 욕망이 표출된 그림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세속적인 부분에서 공통됩니다. 시대가 애호하는 팬시한 물건들을 그린다는 점에서 저와 민화는 공감대가 있습니다.”
 
   그가 민화, 그리고 책거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책거리의 색채와 물건에 매료된 것이다. 민중들이 색을 볼 수 있는 채색화요, 정물화라는 점에서 공감을 이룬다. 처음 그는 책거리의 장식적이고 구조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을 기울였다. 민화 책거리를 보면, 한쪽 면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점에서 본 대상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책거리의 구조적인 짜임도 매우 현대적이다. 서양의 색면 추상을 연상케 하는 책거리가 있다. 그가 대학시절에 시작한 작품들은 이런 책거리의 구성미를 살린 정물 시리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1995년부터 2005년 사이에 제작된 화려한 서재다. 초기의 사실적이고 구조적인 책거리를 컬러 차트처럼 다채로운 색채의 스펙트럼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물질적인 그림으로 출발한 서재 시리즈에 영적인 색채를 입혔다. 서재 안으로 천지창조의 신화를 끌어들이고, 문명과 비문명의 이분법적인 시각을 반영했다. 처음 책거리의 구조적 아름다움에 끌려서 시작한 작업이지만, 어느새 그의 서재는 관념적이고 철학적으로 바뀌었갔다.
이러한 작품의 개념은 작가는 우연히 일본의 미술관에서 본 피테르 브뤼헤 Pieter Bruegel(1525~1569)의 <바벨탑>에서 비롯됐다. 벅찬 감동끝에, 그는 서재의 책들에서 바벨탑의 이미지를 보았다. 바벨탑은 인류가 오늘날까지 처절한 환경을 딛고 일어서온 역경의 극복을 상징한다. 반면에 인간의 오만이 신의 영역을 침범할 때, 바벨탑이 무너뜨리는 재앙이 벌어졌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바벨탑은 늘 우리 마음속에 우뚝 서있다. 이는 신에 대한 경외이고,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그의 서재 그림이 내뿜는 에너지는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어떻게 책과 기물을 그린 정물에서 이처럼 폭발적인 에너지가 발산되는 모습을 상상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작가는 컬러풀한 책들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원천을 원죄 의식에서 찾았다. 화려하게 빛나는 책 더미 중심에 아담과 이브가 있다. 이들이 낙원에서 추방된 뒤, 인류는 자생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엄청난 문화와 학문의 유산을 쌓았다. 작가는 책이란 인류의 문화유산을 구축하는 중요한 도구라는 담론을 담은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책의 바벨탑이라, 그 속에는 문명의 축적과 오만의 경계란 상반된 메시지가 미묘하게 충돌한다.
 
   컬러플한 서재는 어느새 하얀 색조의 우아한 서재로 바뀌었다. 관념적인 책거리가 다시 사실적인 책거리로 환원한 것을 의미한다. 늘 변화를 선호하는 그의 성격은 새로운 라이브러리의 탄생을 재촉했다. 이 서재에는 비록 색채가 베풀어져 있지만, 이전의 컬러플한 서재에 비하면 수묵화나 수묵담채화 같은 느낌마저 든다. 새 서재에는 유독 선인장이 많이 등장하는데, 선인장은 건조한 곳에서 자라고 이파리가 없으며 가시만 있는 식물이다. 작가는 험난한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선인장의 강한 생명성에 주목했다. 그는 이 식물을 통해 문명의 집약이자 인류의 기록, 지난한 역사인 책과 동질성을 부여했다.
 
   서재의 실험은 계속됐다. 2011년 맨해튼의 동쪽 부자들이 사는 지역의 서점을 탐방한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줬다. 고서점의 어지럽게 쌓여있는 책 더미들은 새로운 서재가 주는 감동이다. 사진처럼 사실적인 풍경에 비둘기, 영지버섯, 해골, 부엉이 등 그가 선호한 아이콘을 곳곳에 장치했지만, 이들은 리얼리티를 꾸미는 머리장식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런 작업은 그의 장기가 리얼리즘이 아니라 표현주의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홍경택에게 기대하는 것은 강렬한 표현성이다. 그는 늘 가슴 속에 '이미지 폭탄'을 장착하고 다닌다. 시각적인 임팩트가 강하고, 화려한 색채가 진동하며, 역동적 운동감으로 가득 차있다. 이는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현대인의 취향과에 부합된다. 그런데 그를 만나서 이야기해 나눠보면, 의외로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이런 성격으로 어떻게 그린 파워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지만, 그 비결은 엄청난 공력에 있다. 그의 라이브러리 시리즈에 ‘1995-2001년’이란 제작기간에 적혀있는 작품이 있다. 무려 6년 동안 이 작품을 제작했다는 뜻이다. 가능한 많은 책들로 화면을 채우고, 이들 책에 여러 차례 색을 올리는 작업을 헀다. 정성에 정성을 보태는 성실한 작업이 관람자로 하여금 그가 마련한 조형언어에 빨려들어가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불꽃놀이처럼 폭발하는 연필시리즈도 라이브러리 시리즈 못지않게 인기가 많다. 연필들이 방사선의 형세로 강렬하게 폭발한다. 흥미롭게도 이 연필 시리즈는 민화 책거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시리즈는 라이브러리 시리즈와 동시에 시작했던 작업이다. 필통에 꽂혀있는 연필을 그리다가 연필만 화면으로 끌어낸 것이 이 그림을 시작하게 된 동기다. 얌전하게 책거리 속 필통에 담겨진 문방구가 갑자기 우리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는 이미지 폭탄으로 돌변한 것이다. 디즈니의 요정처럼, 문방구에 강렬한 리듬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요술을 부린 결과다. 조선 민화가 갖고 있는 잠재력을 현대적으로 한껏 끌어내는데 성공한 화가로, 내가 주저 없이 홍경택을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