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정경자(b. 1974)는 도시, 자연, 인물 등 우리가 매일 마주하고 스치는 일상 속 우연한 감각의 순간들을 카메라로 담아낸다. 그의 사진은 특별한 기법이 개입되어 보이기 보다는 피사체가 분명하게 드러나 직관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정경자가 작업하는 방식 또한 그의 사진만큼 직감적이다. 장비를 최소화한 디지털 카메라로 현실에서 마주한 순간들을 스냅 사진으로 남긴다. 즉 정경자는 사진을 찍기 위해 어떠한 연출을 준비하고 기획하기보다는 ‘다가오는 것을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풀어내면서’ 사진을 찍는다.


정경자, 〈사진 속의 사진_13〉, 2007 ©정경자

정경자는 평범한 일상의 공간 속에서 어딘가 동떨어져 있는 존재들에 주목한다. 있어야 할 자리를 잃어버린 물건들, 살아 있으나 생명을 이미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것들,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않은 존재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속의 사진(Spiegel im Spiegel)〉(2007) 시리즈에 나타나는 피사체들은 현실에서 오는 억압의 순간들과 암울한 심연의 기억 속 파편들이다. 정경자는 이때 자신의 내면을 투영시킬 수 있는 사물들을 선택했고, 그러한 과정은 스스로의 내면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행위이며 그 결과는 자의식의 초상이라 설명한다.


정경자, 〈사진 속의 사진_10〉, 2007 ©정경자

〈사진 속의 사진(Spiegel im Spiegel)〉은 작가의 과거와 꿈 그리고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작가가 생각하는 ‘죽음’과 맞닿아 있다. 여러 장의 사진들의 조합을 통해 관련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일상의 파편적인 이미지가 서로 고리를 물고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정경자, 〈Story within a Story_27〉, 2011 ©정경자

2010년 영국 유학 시절 제작한 〈Story within a Story〉(2010-2011) 시리즈에는 당시 작가가 현실에서 우연히 조우한 사물들과 교감한 순간들이 전통적인 스트레이트 기법으로 담겨 있다. 작가는  현실 공간에서 마주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감각을 사물을 통해 이야기한다.

〈Story within a Story〉의 피사체들은 일상에서 그냥 스쳐 지나칠 법한 익숙한 사물들과 장면들이다. 예를 들어 창문, 거미줄, 죽은 벌레, 바다 위의 부표, 꽃나무 등이 존재하는 그대로 선명하게 담겨 있다. 작가가 카메라에 담은 사물들은 지극히 주관적인 순간으로부터 선택된다.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지시하고자 하기 보다는, 작가의 감각을 자극하여 눈길을 끄는 것들을 담아낸다.


정경자, 〈Speaking of Now_01〉, 2012 ©정경자

한편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한 〈Speaking of Now〉 시리즈는 작가의 지인이 겪어 낸 삶과 죽음의 경험에 대한 고백이다. 정경자는 투병 중인 지인의 모습과 주변 사물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와 그 순간을 담담하면서도 애틋한 시각으로 담아냈다.


정경자, 〈Language of Time_11〉, 2014 ©정경자

그리고 정경자는 〈Language of Time〉(2013-2014) 시리즈에서 시간이 정지한 폐허의 사물들을 담아냈다. 이 작업은 사라져 가는 존재들을 순간으로 포착함으로써 살아 있지도 소멸되지도 않은 그 중간 상태에 머물게 한다. 즉 〈Language of Time〉은 생성과 성장, 그리고 또다시 소멸을 반복하는 순환의 고리를 사진이라는 매체로 기록하는 작업이다.


정경자, 〈Elegant Town_33〉, 2015 ©정경자

한편, 〈Elegant Town〉(2015-2016) 시리즈에서는 도시 공간에서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이미지의 파편들이 조합되어 나타난다. 사진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모순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가령 푸르른 자연의 이미지와 함께 이에 대비되는 곧게 솟은 신도시의 건물이 병치된다.

이름 모를 장소의 친숙한 풍경들의 오묘한 재조합은 무엇을 지시하고 의미하는지 명확히 하지 않는 대신 보는 이들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낸다.


정경자, 〈Drifting_05〉, 2018 ©정경자

이후 정경자는 개성을 잃은 익명의 공간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작업 〈Drifting〉(2016-2019)을 선보였다. 이 시리즈에 담겨진 풍경들은 대단지 거주 공간이나 성당, 그리고 그 주변부의 모습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간들이지만 그의 사진에는 마치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폐허 혹은 가짜 모형 건물처럼 보인다.

작가는 도시를 거닐며 ‘저 건물은 과연 과거가 있을까? 미래가 있을까? 역사에 남을까?’라는 의문을 시작으로 이러한 풍경을 담았다고 한다. 무분별한 도시 개발로 장소가 가진 기억과 역사를 잃은 도시의 초상은 두께도 깊이도 없이 부유하는 듯한 도시 건물 사진으로 포착된다.


정경자, 〈So, Suite_02〉, 2018 ©정경자

〈So, Suite〉(2018) 시리즈는 지어진지 25년이 지난 오래된 호텔의 스위트룸의 모습을 담고 있다. 호텔이라는 장소는 매일 새로 갈아 끼우는 표백된 하얀 시트처럼 매일의 기억을 표백하는 일회적인 공간이다. 25년이라는 긴 시간의 역사를 가지지만 막상 그 곳을 방문하는 익명의 투숙객들에게 그 공간의 과거는 무의미하다. 정경자는 곧 사라질, 그리고 누구도 찾지 않을 스위트룸 곳곳의 기억들을 카메라로 붙잡았다.


정경자, 〈Nevertheless_03〉, 2021 ©정경자

2021년 작가는 팬데믹 시기를 겪으며 변화한 일상의 풍경들을 자연에 빗대어 포착하는 〈Nevertheless〉 시리즈를 선보였다. 〈Nevertheless〉 시리즈에 담긴 자연의 모습들은 만개한 벚꽃, 낙엽을 모두 떨군 나무, 흰 눈이 쌓인 겨울 산, 파도가 멈추지 않는 바다, 그리고 하늘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제 것 하나 없이 시간에 따라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변화한다.

“조용한 날들” 전시 전경(갤러리진선, 2021) ©정경자

정경자는 2021년 갤러리 진선에서의 개인전 “조용한 날들”에서 〈So, Suite〉와 〈Nevertheless〉에서 각각 선별한 사진들을 다양한 크기로 인쇄하여 뒤섞이도록 배치했다. 시간은 언제나 똑같이 흘러가고 자연은 고요히 변화한다. 작가는 인공과 자연을 혼재시켜 보여줌으로써 팬데믹 속에서도 계속되는 삶과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 생각한다.


정경자, 〈Uncanny_07〉, 2023 ©정경자

이처럼 정경자의 사진은 평범한 일상의 풍경 속에 내재한 기억의 흔적이나 숨겨진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그리고 수집된 일상의 파편들은 크기와 색감을 달리하거나 다른 이미지들과 병치되어 전시되고, 관객과의 새로운 교감의 순간을 거쳐 본래 가지고 있던 이야기와는 다른 제3의 이야기를 생성한다.

“나의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시간과 공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감각을 통하여 나에게 감지되고 기억된다. 그래서 감각은 기억의 시작이자 세상을 인식하게 하는 자극이 되어 내게 이미지로 각인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하나의 절개된 세상의 이미지는 세계의 일부이면서 외면적으로 가려진 표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 파편적인 이미지들의 재배치로 또 다른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다.”


정경자 작가 ©뮤지엄 한미

정경자는 중앙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컨템포러리 아트 석사를 졸업했다. 제23회 광주신세계미술제 대상(2022), 제5회 일우사진상(2013)을 수상하였으며, 개인전 “다른 면”(뮤지엄한미 삼청별관, 2023), “감각의 경계”(스페이스22, 2019), “우연의 뿌리”(일우스페이스, 2014) 등 15여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Weltkunstzimmer(뒤셀도르프, 2022),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서울, 2018), 플랫폼창동 61(서울, 2017), 서울시립미술관(서울, 2017) 등 국내외 다수의 기관에서 개최된 그룹전에 참여했다. 전남도립미술관과 고은사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작품집으로는 『우연의 뿌리』(일우재단, 2014)와 『In between Something and Nothing 외』(Hezuk Press, 2012)가 있고, 수필집 『조용한 열정』(마음산책, 2004)의 사진 작업을 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