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경택 작가의 작품에는 연필, 볼펜, 책 등과 같이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으나 그저 무심하게 스치는 사물들이 등장한다. 펜이 가장 흔한 것이라면, 대중스타와 같은 가장 통속적인 주제들도 그의 그림 속 주요 소재가 되곤 한다. 1950년대 이후 미국이 추상표현주의에 대항하여 싸울 만한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제스퍼 존스(Jasper Johns) 등의 작가들이 일상생활의 바탕 위에 우리와 직면되는 사물들로 시선을 돌렸던 것처럼 그의 작품에도 현대사회의 유산들을 재포장하면서 의미가 없는 것을 공공의 주제로 탈바꿈시켰다.

이 가운데 무생물인 ‘연필’을 집적된 화면 내로 소환, 재구성하여 이미지와 사물을 대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 ‘연필’은 2007년과 2013년 두 번에 걸쳐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8-9억 원에 낙찰되면서 그의 시장성을 입증했다. 모르긴 해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미지 역시 이 ‘연필’이거나 ‘펜’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인당뮤지엄 전시에 출품된 ‘펜’ 작품에서 엿볼 수 있듯 그의 ‘연필’과 ‘펜’ 시리즈는 작품 자체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아쉬움이 없다.(전시장에 내걸린 ‘Speaker box 4’도 매한가지이다) 많은 이들이 경매와 가격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사방으로 튈 것 같으면서도 형형색색의 원색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연필’ 또는 ‘펜’은 시각적 경쾌함과 감정적 흥겨움이 크다. 그려진 이미지라도 원래 속해 있던 평범한 일상세계를 확인시켜주는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더불어 리듬이 있고 음악적 요소 또한 풍부하다.

그런데 ‘연필’ 류의 작업이 아이러니한 건 그저 밝고 경쾌한 여운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알 수 없으나 난 그의 그림에서 자의적 압박 아래 피어나는 생명력을 본다.(평범한 사물에 이처럼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특히 너무나 빼곡한 그의 ‘연필’에선 일종의 심리적 강박을 읽는다. 강박은 마치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삶을 소환하고, 화려한 이면에 드리운 죽음마저 소비되는 시대를 발견한다.

이는 아마도 가볍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한 ‘연필’의 특성과 분열되는 인간 삶의 무게가 동전의 양면처럼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인간 삶(건조한 도시 문화적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그냥 그런대로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 같으나 실은 노곤하고도 육중한 속성이 동시에 녹아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온갖 캐릭터 뚜껑을 한 ‘펜’이 빈틈없이 들어선 작품에서처럼 그의 사물들은 가벼워 보이지만 우리네 삶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고, 작가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진중함과 드러남의 사이를 엿보게 한다.
 
   2.
   이 글이 ‘연필’로 시작한 것처럼 홍경택하면 많은 사람들 역시 으레 ‘연필’ 그림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예술세계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1990년대 시작된 ‘정물’ 연작에서부터 작가 여백 사이로 특유의 일상성이 배어 있는 ‘서재’ 시리즈, 음악을 기호적으로 녹여낸 ‘훵케스트라'(funkchestra)’까지 다양하다. 장갑공장을 운영하는 친형과 함께 만든 설치작품인 ‘코쿤’에 이르면 그의 눈길 아래 포박되는 예술화의 범주가 의외로 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붉은 장막 사이에 두 해골이 마주보고 서 있는 2008년 작품 ‘The End’와 같은 그림에선 종교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분위기마저 풍긴다.

이 중 눈에 띄는 연작은 색채와 형태의 하모니의 대작 ‘훵케스트라’이다. 이번 인당뮤지엄 전시에도 선보이는 이 작품은 음악에서 비롯된 영감을 토대로 미학적 가치와 대중문화적 상투성을 절묘하게 교차시키고 있다. 2005년 아르코미술관에 전시된 ‘훵케스트라’가 마릴린 먼로, 존 레넌, 반 고흐, 프린스 등 각각의 예술장르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포함해 ’AIDS’처럼 시대적 문제의식을 담은 텍스트가 음악의 가사와 어우러져 있었다면, 인당뮤지엄 전시에는 6점 1세트 포함 총9점의 ‘훵케스트라’를 포함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작품들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훵케스트라’는 어떤 작품일까. ‘훵케스트라’는 타락한 세계와 성스러운 세계가 공존하는 곳이며, 순간과 영원, 천박함과 고급스러움, 죽음마저 가볍게 휘발되는 생산과 소비의 ‘동시대성’의 무대이다. 건축적이면서 미술적이며, 감성적이면서 주지적이라는 것과 고귀하지 못한 것과 고귀한 것, 순간적이고 섹시하며, 선정적이면서 상업적인 여러 층위의 상황이 물씬 배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함축적으로 가로지르는 건 동시대성이다. ‘훵케스트라’를 언급한 여타 글 어디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동시대성은 홍경택의 ‘훵케스트라’를 지정하는 키워드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찰나의 지속과 지속적 찰나라고 할 수 있는데,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매순간 충돌하고 갈등하는 삶 속에서 위안과 안식을 갈구하는 혼돈의 세상을 강렬한 색과 단순한 패턴으로 규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구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대성을 건축적 질서 내부로 끌어들여 영원성을 부여한 작품이 바로 ‘훵케스트라’인 셈이다.

가볍고도 무거우며 다소 격렬한 펑크와 점잖은 오케스트라의 혼음을 시각이미지로 구현한 ‘훵케스트라’는 근본적으론 ‘연필’의 면밀함과 닮았다. 상대적으로 안정적, 정적이라는 것과 일부분 텍스트아트(text art)에도 속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무언가 끊임없이 돌파구를 찾아나서는 심리적 여운이 그렇고, 빠르게 변화하는 대중음악의 가사에서 걸러낸 시대의 흔적들이 하나의 거대한 조합을 이룬 채 율동 넘치는 손에 의한 구술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혼돈 속 정렬이자 화합과 해체의 변주이다.

‘연필’ 시리즈와 ‘훵케스트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공통분모는 시각정보에 대한 감각의 추구와 함께 존재성에 대한 고민이 짙게 묻어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성이란 일차적으로 ‘나’에 대한 질문이자,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그에게 존재란 어떤 선택을 제한, 제약하는 구체적 상황 속에 위치함을 지시한다. 그래서 한편으론 현존재(Dasein)에 관한 작가의 가치관 혹은 철학이 녹아 있다 해도 무리는 없다.
 
   3.
   타자와 마주하는 현존재로써의 철학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바탕엔 오랜 무명생활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놓여있다. 그렇기에 형형색색 폭발하듯 분출하는 ‘연필’의 형상과 상대적으로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훵케스트라’의 구성주의적 화면은 작가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어떤 선택을 제한, 제약하는 구체적 상황’ 자체와 연결된다.

존재에 관한 또 하나는 ‘욕망’과 연계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나’를 비롯한 우리가 자기의 본질이나 성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창조’해온 그 무엇도 온전히 긍정적인 역할만을 하진 않을뿐더러, 되레 방해물이 되어 진정한 자기를 상실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이를 예술에 대입하면, 예술은 ‘나’를 ‘나’로써 존재하도록 만들지만, 온전히 나를 나로써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는 ‘욕망’의 모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모순, 그것은 구체적으로 화면을 가로질러 분출하듯 나아가는 ‘연필’과 ‘훵케스트라’에서의 카오스적 질서, 언중의 합의와 ‘일상성’에 대한 파동을 통해 또 다른 소통방식을 묘사한 ‘모놀로그’처럼 양면성을 띠면서 모순적이다. 이런 흐름은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촛대나 해골, 인형, 성배와 서재, 몇몇 동물과 화초, 유명인들의 초상과 같은 선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나같이 이질적이면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럼에도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의미에 대한 사유라는 공통의 어미는 유효하다.

그러고 보면 ‘연필’이 그렇고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형태와 구성자체로써의 색감을 보여주는 ‘훵케스트라’가 그러하며 ‘정물’과 ‘서재’ 연작, ‘모놀로그’가 그렇듯 이들은 하나같이 시대를 말하고 삶과 죽음을 가로지른 채 종교적이면서 통속적인 관계성을 나타내는 기호로 작동한다. 사고의 모순이 이차원이라는 시각 아래 앉혀짐으로써 그 모순성은 더욱 극대화된다.

어찌 보면 이 또한 동전의 양면 같은 모습이다.(만약 이를 삶과 죽음으로 설명한다면 삶과 죽음은 서로 충돌하며 삶은 죽음을 거부하고, 죽음은 삶을 밀쳐낸다. 둘은 그렇게 상호 배제적이고 모순적이지만 호환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예술가들에게 그 충돌의 굉음은 실로 받아내기 힘든 고통이다. 다만 홍경택은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삶과 죽음이 만나는 통로는 없는가.)

다만 그의 ‘연필’ 시리즈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우린 무엇을 남기며, 또 얻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넌지시 되짚는다. 그리고 그 끝은 결국 ‘연필’이 지닌 이미지와 비이미지 간 관계처럼 화려함 뒤 보이지 않는 욕망과 허무함을 말하고 있다는 게 옳은 해석이다.(이 이미지와 관련해 부언하자면, 장소의 국한성에서 탈피해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다양한 실험적 매체들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믿음과 기능의 차이는 세월의 간극만큼이나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이를 다른 말로하면 과거의 이미지가 뼈에 대한 애정에 머물렀다면 현재의 이미지는 예술과 금전성에 대한 애정과 결핍에서 서성거린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성격도 크게 달라져, 과거의 이미지가 무언가를 염원하는 주술적인 것이거나 영생을 위한 함의나 종교성를 간직한 반면, 오늘날의 이미지는 다분히 상업적이며 또한 혼자서도 충분히 자력갱생(自力更生)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그러나 사실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독립된 인격체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꼭짓점은 결국 욕망과 허무이다.)
욕망을 풀어내는 과정과 그 끝에 도달했을 때의 무력감, 진정한 인간상은 무엇이고 어디서 근본적인 자아를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자문자답도 그의 ‘연필’과 ‘훵케스트라’가 내재한 하나의 속살이다. 순전히 필자의 판단이지만, 아마도 홍경택은 ‘연필’과 ‘훵케스트라’ 등을 그리며 이 부분에 관한 자문을 놓지 못했을 듯싶다.
 
   4.
   홍경택은 평론계와 기획자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작가이다. 시장에서의 성공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는 세밀한 극사실적인 인물로 유명한 강형구나 오치균, 이우환 작가처럼 드물게도 미술평단과 마켓에서 동시에 성공한 작가군에 속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2007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작품 ‘연필Ⅰ’이 7억 8000만원에 낙찰되었는데, 이는 해외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그 이후에도 그의 그림 값은 작가를 대리하는 명사마냥 회자되곤 했다)

세계적인 경매에서의 낙찰소식은 그를 돌연 미술계의 스타로 만들었다. 대중들도 홍경택이라는 이름을 알 수 있을 만큼 꽤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정작 작가는 여느 예술인처럼 작업에 대해 고민하고 고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변화를 주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작품성에 대한 관심도 여타 작가들 못지않다. 그리고 그 변화의 흔적 중에는 이번 전시(제2-3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모놀로그’(Monologue) 시리즈를 포함해 영국의 벤저민 브리튼이 작곡한 성악곡이 떠오르는 ‘전쟁레퀴엠’(War Requiem), ‘곤충채집’(Insect Collecting) 등이 들어있다. 모두 시대와 반응하며 안주하지 않는 작가의 의지를 반영한 작품들이다.

이 중 수화를 인용한 듯한 작품 ‘모놀로그’는 기존 작업과 달리 무채색 계열이라는 점에서 눈에 띈다. 경계에 선 자의 어떤 모습을 담았다고 하는 ‘모놀로그’는 극사실주의 작업에 가깝다.(린넨에 오일로 그렸다.) 이 작품을 보다 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작가가 직접 쓴 글의 한 부분을 옮기면 이렇다. 먼저 작가는 손을 그림의 소재로 한 이유에 대해 “손은 화가나 조각가에겐 가장 중요한 신체도구이면서 그 자체로 표현력이 풍부하다. 손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 아름다움과 표정을 작품화하게 된 계기는 두 가지 꿈 사이의 공통점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손오공이 부처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표현하듯, 절대적이고 거대한 존재는 그 모습을 온전히 보이지 않은 채 어떤 일부만 현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내가 손으로 표현하는 존재는 신성과 악마성, 인간성을 모두 포함하는 신이다.”라고 덧붙인다.

이 글을 읽은 이들은 단번에 눈치 챌 것이다. 존재성 및 양가성과 동시성 면에서 ‘연필’ 그림과 ‘훵케스트라’는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말이다. 물론 대중문화의 특성과 시대성을 빨아들여 순수미술의 방식으로 보여주며, 그 이면엔 존재에 관한 작가의 고민과 철학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음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화사(?史)가 오로지 ‘연필’이나 ‘훵케스트라’에 국한된 것이 아닌, 오래 전부터 수없이 많은 변화의 시도를 일궈왔음을 찾아낼 수도 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기 작업에 속하는 ‘추상’ 연작을 봐도 그 시선은 틀리지 않다.

변화와 관련해 작가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한참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를 앞두고 작품에 대한 고민을 잠시 밝힌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적이면서도 천생 예술가인 자신의 한 단면이었다. 그러므로 홍경택을 고가의 아이템에 불과한 미술과 시장의 관계로만 설명하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얼마에 팔렸느냐는 사실 그에게 그리 중요한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세계적인 작가들이 그러했듯 작품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바람은 더디지만 의미 있게 고착되고 있다.
 
   5.
   홍경택은 대중문화와 미술이라는 장르를 효과적으로 혼합해온 작가이다. 대중문화라는 강렬한 이미지 덕인지 일부에선 팝아트(popart) 계열의 ‘팝아티스트’로 바라보지만 온전한 동의는 어렵다. 왜냐하면 팝아트는 원론적으로 영국과 미국 팝아트를 토대로 21세기 중후반 이후 동시대미술작가들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팝적인 경향의 모든 작품을 통칭한다. 팝아트가 순수미술형식과 대중문화 간 ‘경계 허물기’라는 성격이 강했고, 동시대 아이콘을 통해 감각적으로 50-60년대의 표면현상에 반응했다면 홍경택의 작업은 우리 사회 이면에서 작동하는 억압의 기제에 주목하고, 동시대성에 대응한다는 차이가 있다.

나아가 팝아트가 현실에 무비판적이며 휘발성이 강했던 반면(특히 미국의 팝아트가) 작가의 작품들은 착 가라 앉을뿐더러 (작가는 비록 인정할지 모르겠지만)구성원 간 복잡하게 관계 맺는 현실에 대해 다소 냉소적이다. 더구나 분석적, 회의적, 허무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에서 팝아트와는 명료한 간극이 존재한다. 이 거리감은 사실 꽤나 상당한 편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순수 미술 형식과 대중문화의 정서를 결합한 복합적인 양상의 작업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써 수용한 삶과 죽음의 미학, 섹슈얼한 이미지, 애수적인 감성 등이 녹아 있다. 한편에선 고급문화와 서브컬쳐(Subculture)의 조밀한 조합이 만들어낸 특이함을 하나의 가치체계로 상정한 다음 경제적으로 규정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구분, 작가의 시선에서 재구성한 사회의 다양한 양상, ‘진정한 존재’란 무엇인지에 대한 자문자답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집중한 측면도 없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미국식 팝아트로 해석하는 건 형식의 닮음 탓이 크다. 굳이 리차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의 명언을 빌리자면 “대중적이고, 일회적이며, 소비적이면서 저렴한, 나아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되는 젊고, 섹시하고, 재미있으며 매혹적인” 속성 중 일부와 관계 맺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홍경택의 그림에선 형식적 공통점과 매혹적인 부분이 있다.

그런데 ‘모놀로그’에서 그러하듯 그의 작업에서 놓치지 않아야하는 것은 깊이이다. ‘연필’ 류의 작업이 지닌 가벼움의 속성을 단지 시각으로만 해석한다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존재에 관한 서사이다. 예를 들어 그의 ‘훵케스트라’에서의 ‘선’(線)과 아주 오래 전 작업인 ‘추상’ 연작에서의 ‘선’이 담긴 그릇은 다름에도 실제적 선과 암시선(暗示線)이라는 깊이의 ‘선’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작품에 드리운 빗장을 열었을 때 확인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