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현(b.1957)은 주로 연필을 사용하여 오래된 흑백사진을 캔버스나 장지에 옮기는 작업을 통해 잊혀 가는 과거의 흔적을 섬세하게 복원하고 한국 근현대사 속에 위치한 개인의 실존과 운명에 주목해왔다.

작가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정교한 그의 ‘사진 회화’를 통해 한 가족의 역사를 되살리기도 하고, 가상의 역사를 기반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또한 작가는 오랜 시간 동안 문학, 역사, 음악 등 타 장르와의 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해왔다.


조덕현, 〈20세기의 추억〉, 1994. ©국립현대미술관

90년대에 조덕현은 20세기 사진들을 참고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20세기의 추억〉 시리즈는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암시하는 사진이나 이름 모를 누군가의 사진, 그리고 작가 자신의 가족들의 역사가 담긴 사진들을 참고하여, 캔버스 위에 콩테로 극도로 섬세하고 정확하게 그려 놓은 작업이다.

또한, 이 작품은 검은 상자와 이미지의 결합이라는 형식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입체적인 검은 상자의 중앙에 마치 스크린처럼 놓인 캔버스는 관객들로 하여금 작은 영화관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관과 같은 설치와 더불어, 꽃이나 배 모형 등 조형적인 요소를 추가하여 작품을 화폭의 바깥으로 확장시킨다. 우리의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부각시키려는 조덕현의 주제의식은 이러한 형형색색의 설치 방식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조덕현, 〈노라 컬렉션〉, 2008. 국제갤러리 전시 전경. ©국제갤러리

2000년대에는 특정 인물의 역사를 다루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대표적으로, 〈노라 컬렉션〉은 한국의 전설적인 패션디자이너 노라 노(Nora Noh)와 영국 로더미어 자작부인(Dowager Viscountess Rothemere) 이정선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한 컬렉션 형태의 프로젝트가 있다.

작가는 두 여인의 사진과 그들의 가족 사진 등을 수집한 다음 소묘 회화로 재해석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출품된 2008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재-수집/회상(Re-collection)”에서 작가는 작품들을 좌우대칭의 형식으로 배치하거나 거울을 함께 설치하였다. 이러한 설치는 작가가 수집한 인물들에 대한 역사를 관객이 재-수집하도록 유도한다.


조덕현, 〈Dark Water: The Antipodes Project〉, 2009. 스타크화이트(Starkwhite) 전시 전경. ©Starkwhite

이후, 조덕현의 사진을 소묘 작업으로 옮기는 작업은 나아가 발굴 프로젝트와 만나게 된다. 1994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시작된 〈Dark Water: The Antipodes Project〉는 한국에서 출발한 컨테이너 박스가 바다를 건너 전 세계 여러 곳에서 발굴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프로젝트다.

이후 이 작품은 공공 조각 프로젝트인 ‘Living Room 09: My heart is where my home is’ 연작의 일환으로,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시작하여 더니든에서 마무리되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뉴질랜드에서의 〈Dark Water: The Antipodes Project〉는 오클랜드 항구에서 이틀간 바다에 있던 검은색 컨테이너 박스를 건져 올려 그 안에 있는 작가의 사진 회화 작업들을 발견하는 작업을 담고 있다.

마치 ‘분더카머(Wunderkammer, 호기심의 방)’와 같은 이 컨테이너 안에는 작가가 오클랜드 도서관에서 찾은 사진 아카이브 중 과거에 촬영된 익명의 결혼식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회화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처럼 도서관에 묻혀 있던 사진 속 누군가의 역사는 작가의 스토리텔링 작업을 통해 되살아나 바다를 건너 전 세계를 돌아다니게 되고 다양한 관객들에 의해 새롭게 재해석된다.


조덕현, 〈꿈〉, 2015. 일민미술관 전시 전경. ©일민미술관

2015년 일민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꿈〉에서는 개인의 서사가 어떻게 거시적 역사를 상징해낼 수 있는지 가상의 인물을 통해 살펴보는 실험을 담고 있다.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상의 인물 조덕현(1914~1995)을 만들고 그의 삶을 추적해가는 작업으로 시작했다.

조덕현은 자신과 동명이인이 남자의 인생과 꿈에 접근하기 위해 가상의 역사를 세밀하게 설정하고, 사진, 주인공의 물건, 영상 등을 제작하여 한 인물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나아가 작가는 소설가 김기창과 협업하여 가상 인물 조덕현의 생애를 담은 단편소설 『하나의 강』을 집필하도록 하였고, 소설 속 한 장면을 그와 또다른 동명이인인 배우 조덕현이 재현하도록 하여 사진으로 촬영했다. 이러한 정교한 설정으로 만들어진 가상 인물 조덕현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로 작동한다.


조덕현, 〈플래시포워드〉, 2020. ©조덕현, PKM 갤러리

작가의 최근작인 〈플래시포워드〉는 10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아크릴 회화 작품으로 여러 시공간에 걸쳐 발생한 다양한 사건들을 마치 영화촬영이나 연극을 시연하듯, 하나의 시공간에 병치시키는 구도로 제작되었다. 15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이 작품은 시리아 팔미라의 유적, 중세 시대 최후의 만찬, 뉴욕 인종차별시위나 홍콩 시위 등 다양한 역사가 혼재되어 있다.

폭넓은 시공간을 하나로 압축하는 과정은 디지털시대의 ‘합성’과 비견되지만 그러한 합성들의 특징인 얇은 느낌,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회화의 태도로 극복했다. 그리고 조덕현이 주로 선보였던 연필이나 콩테를 이용한 흑백 회화가 아닌 아크릴 물감을 이용한 색채 회화로 다양한 역사들을 재현함으로써 이미지들이 내포한 역사성과 이야기를 더욱 강렬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조덕현은 과거의 흐려져 가는 기억과 흔적을 다시 발굴하고 이를 현재로 연결시킴으로써미래를 재고하도록 한다. 즉, 그의 회화는 개인의 역사에서 공동체의 역사로,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일종의 회로가 되어 왔다.

“과거는 현재에서 분리되는 별개의 시간이 아닌 두 시제가 서로 밀착되고 연동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해요. 현재는 아주 빠르게 과거로 편입되는 시간이니 우리가 인식하는 삶은 결국 과거에 기반을 둔 셈이죠.

그렇게 과거로 흐르는 시간이 기억이란 저장고를 향하고, 그 저장된 기억은 현재의 요청에 의해 소환되는 거예요.” (노블레스, 조덕현 인터뷰, 2015.09.02)


조덕현 작가 ©노블레스

조덕현은 필라델피아 ICA미술관, 파리 주드폼 국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상파울루 비엔날레, 이스탄불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등 국제전에 초대되며 일찍이 세계무대에 진출했다.

2001년에는 ‘제2회 한불 문화상’을, 2019년에는 ‘제20회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은 미국 허쉬혼 미술관, 일본 후쿠오카 미술관, 네덜란드 호린험 시청, 삼성미술관 리움 등 전 세계 유명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가는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