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민(b. 1987)은 생활의 많은 기반이 온라인으로
옮겨진 현 시대에 기술이 우리의 지각 방식을 어떻게 결정하며, 또 미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해
왔다. 이를 위해 작가는 게임이나 광고 이미지, 3D 오브젝트
등과 같이 휘발성을 특징으로 하는 디지털 이미지를 회화와 조각으로 변환하며 대상에 내재한 물질성을 새롭게 발견한다.

정희민은 그의 첫 번째 개인전 《어제의 파랑》(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16)에서 디지털 환경에서 만들어지고 공유되는 수많은 이미지가 오늘날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대상을 향한
욕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냈다.
정희민은 이를 위해 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간접 경험이 가능해진 자연풍경의 이미지, 게임 인터페이스를 통해 경험하는 가상현실 속 이미지, 디지털 인쇄
기술의 발달에 따라 대량 생산되는 엽서, 포스터 등 일상에 편재한 수많은 이미지들을 모았다. 작가가 주로 모은 이미지들은 대상에 대한 경험과 기억, 욕망을 이끌어
내기 위해 만들어진 이차원의 풍경 이미지들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수집한 이미지들을 다시 확대하거나 병치하고, 다양하게
조작, 연결, 조합하여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다른 표현방식으로
회화적 표면 위에서 충돌하고 융합, 중첩된 상황을 연출했다. 이는
상품화된 경험, 조작된 욕망, 파편적인 기억을 유도하는 얇은
이미지의 층과도 같으며, 이러한 풍경 이미지의 전략이 만들어 내는 허상의 이면을 드러낸다.

이어서 작가는 2018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두 번째 개인전
《UTC-7:00 JUN 오후 세시의 테이블》에서는 가상의 정물들을 통해 정체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향후 그에게 어떤 조형 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마련했던 이 전시는 가상 생태계에서의
경험을 ‘꿈’에 대한 이야기로 빗대며 시작된다.
작가는 3D 모델링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일상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사물들을 배치한 가상의 테이블을 만들고, 그 중 하나의 사물이 되어 공간 안을 떠다니며 본 장면들을
그림과 글로 그렸다. 그는 이 사물들이 가진 덩어리감을 강조하고자 텍스처 없이 기본적인 구조와 명암, 그림자만을 활용해 형상을 표현했고 그 위에 겔 미디엄과 유화물감을 활용한 비정형의 얼룩들을 남겼다.

그의 작업에서 이처럼 허상과 환영을 이미지화하는 방식은 전통적인 회화의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정통 회화 기법의 연장선상에 위치시키며, “회화는
긴 역사성을 고려할 때 우리가 보고 지각하는 방식의 변화를 감지하는 데에 용이한 매체”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아가 정희민은 제각각 다른 시점의 캔버스 화면들 전체에 반투명한 겔 미디엄 레이어 얼룩들을 얹음으로써
가상 세계와 사용자 사이를 가로지르는 스크린 막을 만들어 내며 관람자를 끊임없이 밀어내어 소외시키고 환영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2018년에 발표한 ‘Calm
the storm’ 시리즈는 이전의 작업과 다른 서사적 구조를 가진다. 작가는 이 작업에서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 중 하나인 ‘예수가 폭풍을 잠재우다(Jesus
calms the storm)’의 일화를 모티프로 삼지만, 기존의 도상과 이야기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대신 종교적 의미를 지우기도 하며 이미지와 서사가 자유롭게 해체되고 중첩될 수 있도록 했다.
대형 캔버스를 여러 개 결합하여 만든 이 작품에는 구체적인 묘사로 서사를 구축하는가 하면, 또 다른 화면에서는 해체되고 분철되며 회화적 표현들과 중첩된다. 추상적
도상이나 반복되는 선과 패턴, 그래픽의 요소들이 대담하게 강조되면서도 어느 순간 이야기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이미지와 서사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즉, 이전의 작업에서는 그림이 서사와 밀접하게 붙어 있었다면, 이 작업에서는 그 사이에 공백이 생기면서 그림은 이야기를 넘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2018년 삼육빌딩에서 열린 전시
《이브》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정희민은 특정한 시간이 도래하기 이전의 유령 같은 시간을 일컫는
‘이브(eve)’라는 단어에서 컴퓨터 속 휴지통이라는 공간을
떠올렸다.
정희민은 곧 폐기될, 그렇지만 복구의 잠재성도 가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정보 조각들을 안고 있는 휴지통이라는 가상 공간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작가는 휴지통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들을 이용해 곧
잊혀질 세계에 적응하는 방식을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회화 작업 〈May Your Shadow Grow Less〉(2018)과 〈Erase Everything but Love〉(2018)은 ‘환영(illusion)’,
‘물질성(materiality)’, ‘레이어(layer)’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다. 두 작업은 모두 이질적인 시공간이 혼재하고 단일하게 인식할 수 없는
동시대의 풍경들을 은유한다.

작가는 가상과 실재가 혼재하여 분리 불가능한 현재의 풍경이 하나의 불투명한 레이어로 재현될 수 없다고 보며, 레이어 간의 물성차를 더욱 극대화한 폐허의 공간을 그렸다. 이전
작업에서도 드러났던 환영과 물질성은 작가의 평면 위에서 만나 충돌하고 이율배반적인 화면을 만들어 내며 그 위에 쌓인 레이어는 환영에 깊이를 더하는
장치가 된다.
〈Erase Everything but Love〉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출처의 구글맵 풍경을 쌓고 이를 지우고 이미지를 다시 얹는 과정을 반복하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반복적인 이미지의 중첩과 삭제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온갖 이미지에 둘러싸인 동시대 시각 환경 및 이미지 수용 방식과 닮아 있다.

2021년부터 정희민의 작업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꽃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에서 꽃은 단지 평면 위에 잘 그려진 정물화로 묘사되기 보다는, 겔 미디엄을 이용해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꽃잎 부조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위에 작가가 웹에서 채집한 자연물의 이미지를 아크릴 분사, 잉크젯 전사, UV 프린트 등 인쇄의 기법으로 덧입히며 여러 층의 레이어를 중첩시켰다.
정희민은 2017년경부터 겔 미디엄을 회화 표면에 발라 막을 형성해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우리의 추상적 신체가 정보와 경험을 감각하고 체화하는 양상을 시각해 왔다. 한편
꽃 작업에서부터 겔 미디엄은 낱장의 꽃잎으로 만들어지거나 입체적인 주름의 형태로 변모하며 회화 표면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실체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평면이지만 평면이 아닌 기묘한 혼종적인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정희민은
이 작업을 통해 가상 이미지들의 환영에 집중했던 이전 작업의 맥락에서 나아가, 물질의 자연적이며 적나라한
상태에 다가가며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혼종적 경험들과 그에 따른 정서적 변화에 주목했다.
2021년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기》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꽃 그림 작업을 ‘Serpentine Twerk’라는 이름의 시리즈로 묶어 선보였다. 정희민은 ‘꽃’을 모티프로
작업했던 세계적인 화가 조지아 오키프에게서 영감을 받아, 꽃의 야성적이고 기괴한 에너지, 시각적인 기이함을 오늘날 디바이스 사용자들이 경험하는 일종의 트랜스 상태와 겹쳐 보며 의식적 해방을 제안했다.
총 4점의 회화로 구성된 ‘Serpentine
Twerk’는 하얀 카틀레야 오키드, 블랙 아이리스 등을 모티프로 삼고 있으나, 특정 꽃의 이미지로 읽히기보다는 여러 형상들이 중첩되고 봉합되어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작가는 이 작업에서 보다 동적인 상태로 물질을 풀어내며 이를 통한 명상적 탐구를 실험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꽃잎과 피륙 사이의 물감 덩어리들은 신체적 감각과 움직임의 궤적을 담아내고 있다.

회화의 평면성으로부터 벗어난 이미지들은 캔버스 프레임 바깥으로 떨어져 나와 보다 독립적인 개체로써 공간을 점유하기도
한다. 가령, 2023년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수신자들》에서는
데이터 전송으로 출력된 나무껍질과 같은 형태의 조각이 등장했다.
웹을 통해 여러 사용자에게 제공받은 자연물의 포토 스캔 모델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이 조각물은 나무껍질, 갑각류의 꼬리, 광물의 표면에 새겨진 알 수 없는 생명의 흔적과
같이 식별할 수 없는 형태와 물질, 질감의 불완전한 합성 상태로 존재한다.
정희민은 실제로 본 적 없는 원본의 표피 질감을 상상하고 손으로 더듬어 떠냈다.
그리고 작가는 이 행위를 통해 우리가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다양한 시공간을 혼합하고 신체적 감각을 증폭시키고자 했다.

한편 2024년 타데우스 로팍 런던에서 열린 개인전 《UMBRA》에서는 한국의 전통 장례의식인 ‘초분’과 장례 현장에서 벌어졌던 전통극 ‘다시래기’를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죽음과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제시했다. 오랜
시간 자연에서 탈육한 뼈를 이장하는 장례 현장에서 벌어진 다시래기는 한 여성이 눈먼 남편을 속여 중과 바람을 피우고 출산까지 하게 된다는 서사를
가진다.
작가는 “왜 선조들이 죽음의 현장에서 춤을 추고, 농담을 주고 받고, 불경한 상상을 하고, 새로운 탄생에 대해 이야기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해 이를 전시로써
재현해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작가는 전시장을 하나의 무대로 상정하고, 그 위에 작가가 도시에서 목격한 죽은 새와 나무, 부서진 도로 등과
같은 ‘죽음의 흔적’들이 스며든 작품들을 올려 두었다.
이와 함께 작가는 온라인에서 찾은 여러 이미지들에 물성을 부여해 부활한 살점으로서 재구성한 작품들을 배치하며, 전시장을 죽음과 탄생이 공존하고 교차하는 장(場)으로서 연출했다. 이처럼 정희민은 《UMBRA》전에서는 디지털화된 동시대의 환경 안에서의 물질성과 감각에 대한 기존의 탐구를 넘어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구체적인 작품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정희민은 스크린 안팎으로 세계를 마주하며 느끼는 것을 작품으로 담아내며 이질적인 요소들이 복잡하게 혼재되고 충돌하는 현 시대의 환경 속 우리의 감각과 정서를 예민하게 다뤄 왔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급변하는 기술과 그에 따라 움직이는 환경 속에서 우리가 현재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잠시 멈추어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생활의 많은 기반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면서 대상을 지각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이 지속적으로 달라진다고 느낀다. 원래 있는 것들로부터 다른 의미를 끌어내는 것,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를 위해 전통적인 소재를 활용한다.” (정희민, 작가노트)

정희민 작가 ©두산연강재단
정희민은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를 졸업했다.
작가는 타데우스 로팍(런던, 2024), 두산아트센터(서울, 2023), 신도문화공간(서울, 2022), 뮤지엄헤드(서울,
2021),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서울,
2016)에서 개인전을 선보였다.
이외에도 웨스(서울, 2023), 남서울미술관(서울, 2021), 을지아트센터(서울, 2021), 수림아트센터(2020), 경기도미술관(안산, 2020), 레인보우큐브(서울, 2020), 플랫폼 엘(서울,
2019), 보안1942(서울, 2019), 국립현대미술관(과천, 2019), 하이트컬렉션(서울, 2018), 주홍콩한국문화원(홍콩,
2018), 아카이브 봄(서울, 2017) 등
국내외 유수의 기관에서 개최된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2022년 부산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선보인 정희민은 같은 해 제 13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그는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서울, 2022), 신도 작가지원 프로그램(서울, 202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고양, 2020) 등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고, 그의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등 유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
- 정희민, Heemin Chung (Artist Website)
- 인천문화통신 3.0, 정희민 인터뷰, 2019.07.10 (IFACNEWS 3.0, Heemin Chung Interview, 2019.07.10)
- 타데우스 로팍, 정희민 (Thaddaeus Ropac, Heemin Chung)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어제의 파랑 (Project Space Sarubia, Yesterday’s Blues)
- 금호미술관, UTC -7:00 Jun 오후 3시의 테이블 (Kumho Museum of Art, UTC -7:00 Jun 3PM, On the Table)
- 월간미술, 정희민의 감응적 그림과 동시대 지각
- 남서울미술관,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기 (Nam-Seoul Museum of Art,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 두산아트센터, 수신자들 (DOOSAN Art Center, Receivers)
- 하퍼스 바자, 회화와 조각 사이, 감각을 자극하는 정희민의 작품 앞에서, 2024.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