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실(b. 1983)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억압받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분열하는 자아의 에너지를 전통 한국화의 형식으로 화폭에 담아낸다. 작가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억눌린 개인의 욕망이 결국 무의식에 응축되고 때로는 곪아 뒤틀린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보았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에서의 심리를 성(性), 공간 그리고 정신적 분열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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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에 이은실의 회화는 전형적인 한국화처럼 보인다. 작업에 활용하는 재료와 수묵채색 기법, 그리고 장지를 사용하는 점에서 형식적으로 한국화의 작법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흔히 한국화에서 다루는 소재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 숨겨져 있다. 오히려 전통 회화에서는 금기시되는 것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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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실의 초기작인 ‘Desire’(2004-2006) 시리즈에서는
남녀의 성교를 연상케 하는 아주 노골적인 성기의 모습을 드러내며 가부장제, 혹은 전통과 보수성에 도전하는
작업들이 엿보인다. 각각 성교 이후의 남녀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태도〉(2004)는 사랑과 쾌락의 행위에까지 스며들어 있는 권력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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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에서 남성의 경우 자신의 성기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자신의 성기를 감춘 채 부끄러운 듯 뒤돌아 있다. 또한
남성의 성기는 마치 성취를 이룬 듯이 발기된 상태로 묘사되어 있지만, 여성의 화면에는 처녀성의 상징인
붉은 피가 바닥에 흘러나온 채로 드러난다.
그림 속 남녀의 상반된 태도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자 사랑의 결과로 나온 행위에 마저도 가부장제라는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음을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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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실의 회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요소는 문지방, 창문 틀과
같은 집의 구성물이다. 이는 ‘Neutral
Space’(2007-2009) 시리즈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사회적 제도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작동한다. 때로는 각도에 따라 구조물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마치 몰래 내부를 훔쳐보는
금기의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 중, 〈Take off〉(2008)은 ‘벗다’라는
뜻의 제목처럼 그림 중앙에 스스로 껍질(피부)을 벗겨낸 사람의
형상이 자리한다. 이 인간 형상은 마치 바람에 의해 위태로이 흔들리는 촛불처럼 묘사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는 광풍이 몰아쳐 집의 구성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라가 버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영욱 미술평론가는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것에 대해 “정신적으로
극단적인 해체 상태에 처한 한 인물의 내면이며, 그 해체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 맥락”이라고 말한다. 즉, 이
작품은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금기와 억압 가운데서 해체되는 자아의 에너지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화폭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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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애매한 젊음’(2010-2013)
시리즈는 ‘얇은 장막’으로 형상화된 사회적 기제에
가려져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방향성을 잃은 “애매한 젊음”을
표상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연작에는 물, 빛, 바람의 장막으로 은닉된 모호한 형태들, 결혼제도를 간접적으로 은유하는
가옥 구조물, 왕성한 원기를 발산하지 못하는 젊음을 표현하는 동물의 성기 등이 나타난다.
이는 은밀하게 작용하는 사회적 규범의 틀로 인해 애매모호하게 자리잡은 ‘젊지
못한 젊음’에 대한 작가의 진술이자 세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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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한 화이트 큐브 공간이 아닌 대안공간에서 주로 개인전을 가졌던 이은실은 2013년 대안공간도 아닌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한 회사의 사무실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작가는 보수적이고, 경직되고, 권위적인
공간에 슬며시 개입해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건네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동화되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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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은 사회적 규범 아래 가려진 불안하고 애매한 존재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존재들은 ‘가장 외로운..’,
‘참아야 했는데’, ‘두고두고’, ‘나도 간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애매한 세계의 유동적인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끊임없이 보수적인 사회 구조에 말을 걸고 다가가는 작가처럼 애매하고 불안정할지라도 그러한
상태를 유지한 채 세상과 마주하는 존재들을 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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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인 욕망 등 한국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소재를 노골적으로 표현해온 이은실은 2017년
작업인 〈밤의 달〉에서 이를 더욱 기이한 형태의 모습으로 드러냈다. 그간 남녀의 성기를 그대로 그리거나
동물의 모습을 통해 빗대어 표현해 왔다면, 이 작품에서는 동물인지 털이 덮인 유사인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두 존재가 실내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성교를 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길고 가느다란 털로 덮인 인간 형상은 마치 짐승처럼 표현되어 인간의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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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18년에 선보인 〈삶의 풍경〉은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호랑이
무리들이 특정할 수 없는 욕망을 쫓아 역동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나타난다. 이 작업에서는 욕망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은은하게 빛나는 금빛 털의 무늬와 오른편 남녀 성기의 형상으로 보이는 돌기둥과
지형을 통해서만 상징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러한 상징적인 요소들은 성적인 욕망과 더불어 권력욕 등을 포함한 본질적인 에너지인 리비도(libido)의 풍경을 그려낸다. 그리고 호랑이 무리들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으로 표현됨으로써 더 크고 강한 힘을 향한 과한 열망과 환타지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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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실은 최근 작품에서는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현대인의 다양한 정신 질환—스트레스, 불안증, 화병, 조울증, 무기력증, 우울증, 신경쇠약증, 강박증, 다중인격증
등—들을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표현하고 있다.
가령, 〈엉망이 된 시간, 뒤엉킨
공간〉(2021)은 사회가 규정하는 기준에 맞춰 억눌린 자아가 그 과정에서 왜곡되고 분열, 중첩되는 모습을 여러 도상들로 표현하고 있다. 화면 속 신체 기관들이
와해되어 공중에 떠다니는 형상은 왜곡된 인간상, 고통, 트라우마, 분노 등 복잡한 심리 상황을 은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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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투명도의 밀도를 달리하여 각기 다른 시간성을 붙들고 있는 3차원 공간들이 불규칙하게 떠다니고 중첩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공간들은 분열하는 자아의 모습을 상징한다. 변형된 건축적 구조는 강박, 정신 분열과 같은 정신 질환을, 완결되지 못한 건축 구조는 완벽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모습을 은유한다.
이처럼 이은실은 견고한 사회 구조를 끈질기게 관찰하며 그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포착해 이를 매우 솔직한 방식으로
드러내 왔다. 나아가 최근에는 이러한 관심을 토대로 인간의 내면에 대해 탐구하고 표현하며 우리 모두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혼란과 투쟁의 현장을 들여다 보도록 한다.
“나에게 언제나 영감을 주는 것은 뒤틀어진 사회의 이면이다. 기이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며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작업의 소재가 되고 고민의 대상이 된다.” (이은실, 인천문화통신 3.0 인터뷰, 2018.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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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실 작가 ©이은실
이은실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동양화과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P21(2021, 서울), 유아트스페이스(2019, 서울), 두산 갤러리(2016,
뉴욕),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2010, 서울), 대안공간 풀(2009, 서울)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작가는 일민미술관(2022, 서울), 서울시립미술관(서울,
2022), 코리아나 미술관(2020, 서울), 송은
(2019, 서울), Cité International des
Arts(2016, 파리) 등에서 여는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9년 제19회 송은미술대상 우수상을 받았고,
2014년 리움미술관에서 개최하는 《아트스펙트럼 2014》에 참여한 바 있다.
이은실은 2020 송은 아트스튜디오,
2018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2016 두산아트센터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