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호(b. 1974)의 회화에는 문자와 이미지가 유희적인 관계를
이루며 하나의 큰 이미지를 구성한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단어들은 이미지와 의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유승호는 이에 대해 “의미를 분철하고 해체하고 무의미화 시키는 게
내 작업의 본질”이라 설명한다.
그는 ‘쓰기’와
‘그리기’ 사이를 유희적이고 직감적으로 오가며 언어나 사회적으로
직접 드러나지 않는 우연적 관계들을 화면 안에 자유롭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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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는 펜과 먹, 종이라는 간단한 도구를 이용하여 점을 찍거나 글자를 써서 이미지의 형태를 만드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동집약적인 점묘화의 형식이 돋보이는 그의 초기작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점의 반복적인 화면 구성으로
독특한 추상성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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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푸-하-〉, 2000 ©국립현대미술관
한편 그의 대표 연작인 ‘문자 산수’는
멀리서 보면 전통적인 산수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천 개의 글자들이 화면 안에서 나름의 규칙을 가진 채 유영하고 있다. 산수의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주루루룩’이나 ‘슈~’와 같이 만화책에서
볼 수 있는 의성어 또는 의태어이거나 ‘으-씨’나 ‘으이그 무서워라’처럼
농담 같은 구어적 문구들이다.
이를 테면, 2000년작 〈푸-하-〉의 경우에는 ‘푸’와
‘하’라는 두 글자를 수만번 반복해서 적으며 나무와 산 절벽의
모습을 새롭게 그려낸다. 이처럼 유승호의 ‘문자 산수’는 전체적으로는 전통적인 수묵 산수화의 도상을 띠고 있지만 이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인 문자들은 이 이미지와 특별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단어라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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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yodeleheeyoo~〉, 2007 ©유승호
유승호는 ‘문자 산수’에
조선 초기의 화원 안견의 그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을
비롯한 여러 전통 명화를 차용하지만, 그림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맥락,
의미를 가져오기 보다는 작가 본인의 시각을 사로잡는 강렬한 그림의 에너지에 주목한다.
작가는 기존 도상의 기법, 사상, 이론
등의 맥락을 비우고 난 자리에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경쾌한 언어를 채워 넣는다. 이는 직관과 감성에 의해
선택한 전통적 도상 안에서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실험하는 유승호만의 산수화로, 언어와 회화 그리고
과거와 동시대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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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활용한 그의 회화가 그려지는 화면은 비단 종이뿐 아니라 공간으로 확장해 나가기도 한다. 전시 공간의 벽과 바닥으로 옮겨간 문자-이미지들은 그림 안에서 이질적인 요소들 간의 경계를 오가며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내는 데에서 나아가 3차원의 공간에 침투하며 그곳의 물리적 요소, 공간의 맥락과 또 다른 관계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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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엉~엉〉, 2022 ©유승호
한편 유승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시늉말(echowords)’ 연작에서는 ‘문자 산수’에 비해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연관성이 엿보인다. ‘흉내내는 말’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단어 ‘시늉말(echowords)’을 제목으로 하는 이 작업은 의성어나 의태어와 같이 특정한 의미를 가지기 보다는 어떠한 소리나 상태를 말로 본뜬 단어들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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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작은 단어로 인해 이미지가 연상될 수도 있고, 이미지가 존재하기에
단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를 테면, 〈우수수수〉(2017)의 경우 상단에 붓글씨로 크게 쓰인 ‘우수수수’라는 단어와 그 주변으로 ‘우’와
‘수’라는 두 글자가 떨어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글자는 ‘우수수수’라는
단어가 연상케 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음으로써 문자와 이미지가 시각적으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텍스트, 또는 기호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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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뇌출혈〉, 2017 ©유승호
‘문자 놀이’ 연작에서는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들을 소재로 삼아 언어유희적으로 풀어냈다. 이 연작에서 작가는 보통
의성어나 의태어, 외국어의 음차를 이용해 언어나 문자가 가진 의미를 해체시켜 소리나는대로 혹은 표기법대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뇌출혈〉의 경우 뇌혈관 질환을 의미하는 단어 ‘뇌출혈’을 발음했을 때 영어 단어 ‘natural’로
들리기도 하는 언어유희에서 출발한다. 유승호는 의미적으로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발음을 통해 연관성이
생기는 단어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화면 위에 유동적으로 풀어낸다. 그의 회화에서 ‘뇌출혈’이 ‘natural’이
되고, ‘natural’은 산이 되어 지고한 풍경을 이루다 어느 부분은 이내 새가 되어 화폭 저 멀리
날아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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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hypertext〉, 2012 ©유승호
한편 ‘hypertext’ 연작에서는 문자와 이미지가 더욱 하나처럼
밀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작업들은 개별 정보들을 링크를 이용해 연결시키는 월드 와이드 웹(WWW) 개념인 ‘하이퍼텍스트’처럼
고정된 텍스트의 의미에서 탈피해 자유롭게 연결되는 구조를 가진다.
이에 더해, 유승호는 텍스트의 의미가 규정되기 이전의 느슨한 연상과
반복에 주목했다. 가령, 작가는 고정된 의미와 형태를 가지고
있던 기존의 단어를 아직 형태도 갖추지 못한 원초적인 상태까지 하이퍼텍스트적으로 해체한다. 점차 해체되고
분열되는 문자는 어느 순간 비선형적으로 변형되며 텍스트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닌, 그 중간 상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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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머리채를 뒤흔들어〉, 2015 ©페리지갤러리
2015년 페리지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 《머리채를 뒤흔들어》에서는 이전의 문자 작업들의 요소들과 ‘hypertext’ 연작의 실험들이 접목되어 나타났다.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들에 쓰인 소재들은 동양화에서 많이 그리는 난(蘭), 피라미드, 용, 신윤복 스타일의 춘화, 바람개비, 숫자,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연꽃문양 등으로 다양하다. 기법들 또한 붓을 사용하거나 종이를 뜯기도 하며, 내용이나 소재, 형식, 기법들이 다양하게 뒤섞여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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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가에게 있어서 이러한 카오스적인 상태는 오히려 이상적으로 여겨진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서로 엉켜 특정한 의미를 잃어버리는 그 순간을 가장 이상적이며 자유로운 상태로 보는 것이다. 고정된 의미나 형태로부터 벗어난 요소들은 그의 회화 안에서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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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라멜라 양〉, 2019 ©유승호
유승호는 ‘라멜라 양’ 연작에서
선 드로잉 위에 분무기로 아주 고운 입자의 물을 뿌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형태들이 우연히 만들어지는 모습을 담았다. 그는 이 연작에서 라멜라 구조 또는 접힌 사슬이라는 화학적 개념을 차용한다.
라멜라 구조는 분자와 분자가 만나 층을 이루며 안정적이고 단단한 완성체를 만드는 구조를 뜻한다. 이 분자 구조는 실제로 완벽한 결정형 사슬 구조를 이루기 어렵고, 열을
가한 가공을 통해서만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형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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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라멜라 양〉, 2019 ©유승호
유승호는 기호·이미지를 이용해 구축하는 형태가 이러한 분자 구조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기존 작업을 이루는 빼곡한 글씨를 ‘분자’로 상정하고 일련의 작업 과정을 통해 층층이 레이어를 쌓아 안정적인
상태의 고분자 결정처럼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회화에서 형태는 구조화되지만 그 결과 문자가 가지고 있던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의미는 해체되는
아이러니함이 발생한다. 분무기를 통한 작가의 화학 작용으로 인해 그의 회화 속 개별 요소들은 비선형적으로
변형되고 서로 뒤얽히며 새로운 형태를 스스로 생성해낸다.
유승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것은 (글씨를) 쓴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미지와 언어, 기표와 기의, 정형과
무정형, 의식과 무의식 등을 나누는 이분법적 경계는 그의 회화 안에서 무력화된다. 그로 인해 상반되고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요소들은 서로를 반영하고 결합하는 등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우리가 보고 느끼는 실재하는 경계들에 대한 위트 있는 성찰을 제시한다.
”내가 하는 놀이는 무거운 의미들을 가볍게 흘려 보내고
화면의 공간 속으로 자유롭게 부유하는 것이다. 결국엔 즐김, 본능, 쾌락, 유머만이 남아있는 꿈속으로…그래서
화면 위의 글자와 이미지들은 나와 함께 히히히 웃으면서 놀아나고 있다.” (유승호, 작가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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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작가 ©종근당
유승호는 한성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해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터테인(2021), 씨알콜렉티브(2019), P21(2017), 뉴욕 두산갤러리(2013), 원앤제이 갤러리(2005) 등 다수의 국내외 주요 갤러리
및 비영리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또한 작가는 일본의 모리미술관(2022, 2009), 울산시립미술관(2022), 국립현대미술관(2020), 두산갤러리(2014), 서울시립미술관(2013), 대안공간 루프(2006) 등 여러 단체전에도 참여한 바 있다. 또한 2002년에는 광주 비엔날레에 초빙되고, 1998년 제5회 공산미술제 공모전 우수상과 2002년 제22회 석남미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홍콩 버거콜렉션, 아부다비 행정청, 퀸즐랜드 아트 갤러리, 모리미술관,
휴스턴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
- 현대자동차, brilliant 30: 작가 유승호 (Hyundai Motor, brilliant 30: Artist Yoo Seungho)
- 가회동60, yodeleheeyoo~ (GAHOEDONG60, yodeleheeyoo~)
- 페리지갤러리, 머리채를 뒤흔들어 (Perigee Gallery, Shaking your hair loose)
- 두산아트센터, echowords (DOOSAN Art Center, echowords)
- P21, 머리부터 발끝까지 (P21, From Head to Toe)
- 씨알콜렉티브, 라멜라 양 (CR Collective, Miss Lame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