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승(b. 1974)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대상의 본질과 이미지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포착하고자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다.
나아가 그는 대상을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계와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일상 사물과 신체, 공간을 다루며 사진 매체의 즉물성을 극대화하는
한편, 텍스트를 활용해 이미지와 언어라는 불완전한 소통 수단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기도 하였다.
정희승, 〈페르소나〉, 2007 ©정희승
2008년, 정희승은 런던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첫 번째 개인전 “페르소나”(갤러리
와, 2008)를 가졌다. 전시에서 작가가 선보였던 〈페르소나〉 시리즈는 초상 사진에 있어 ‘Mask’와 ‘Face’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이었다.
작품 제목인 ‘페르소나(Persona)’는 원래 그리스 시대의 배우들이 무대에서
썼던 가면을 뜻하는데,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개개인이 다양한 사회적 상황 안에서 그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하며 타인에게 드러내는 사회적, 심리적 가면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가면과 그
이면에 존재할 진짜 얼굴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고자, 배우를 섭외하여 그들이 3-5분 간의 모놀로그 연기를 하는 동안 기계적으로 셔터를 눌러 다양한 얼굴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냈다.
〈페르소나〉에서는 연기에
몰입한 배우의 감정선과 그 내면을 카메라로 포착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였다면, 이어서 발표한 〈Reading〉(2010) 시리즈는 대본읽기 과정 속에서 배우들이 본래
자신을 상실해가는 과정을 사진에 담고자 했다.
정희승은 배우가 대본을 읽으며
자신의 연기할 인물에 대해 분석하고 이해하는 단계를 거쳐 점점 인물에 동화되고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긴장감에 주목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배우들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이성과 감정 사이의 긴장 상태가 얼굴과 몸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했다.
한편 정희승의 〈Still Life〉(2009-2013) 시리즈는 사물이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물 사진 작업으로,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촬영을 거듭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에 대한
실험을 보여준다.
이때 작가는 하나의 대상을
최소 2주 동안 끈질기게 관찰하고 간간이 즉흥적인 연출을 개입시키며 기계적으로 촬영했다. 그러한 반복적인 과정 속에서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하며 작가가 본래 의도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모든 의도와 의미가 사라진 사진 이미지들은 익숙한 사물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이미지로 다가오게 된다. 정희승은 본래의 사물이 가진 기능이나 작가의 의도가 없어질 때 이미지는 비로소 독자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정희승, 〈Untitled〉, 2013 ©박건희문화재단
이처럼 정희승은 대상의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 어떤 상태들, 배후에 잠재해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대상의 잠재성이 ‘본다’는 행위와 필연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사진을 통한 지각적 경험에 초점을 맞춘 작업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가령 2013년에 발표한 〈부적절한 은유들〉 시리즈는 대상의 내면성을 담아내고자 노력하는 데에서 나아가 그러한 과정에서의
사진 매체의 한계에 다다르고자 하는 작업이다. 이 연작의 이미지들은 어떠한 의도로부터 빗겨 나 있으며
모든 은유들 또한 부적절하다.
정희승, 〈Untitled〉, 2013 ©박건희문화재단
이러한 작업은 사진 매체의
재현적 한계를 매체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인식하고, 이로부터 극복하려 하기 보다 더 멀리 밀고 나가 매체의
또 다른 가능성과 소통의 방식을 발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업은 의미의 전달보다는 사진의 지각적이고
심리적인 작용 방식에 더 많이 관여한다. 사진 이미지와 감상자 사이의 지각적이고 심리적인 상호작용 안에서
이미지는 해석의 대상에서 경험의 대상으로 전환되고, 감상자는 단순히 본다는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후 제12회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한 정희승은 5.18의 역사적 상흔을 간직한
장소 중 하나인 옛 국군광주병원에 주목했다. 작가는 2007년
이후로 시간이 멈춰 있는 옛 국군광주병원에서 마치 역사에 머무르면서 현재에는 안착하지 못해 부유하는 시공간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발견했다.
작가는 역사적 상징성은 지녔지만
실제의 삶에 흡수되지 못해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옛 국군광주병원의 풍경에 주목하며 〈기억은 뒷면과 앞면을 가지고 있다〉(2018)을 제작했다. 이는 옛 국군광주병원이라는 장소 안과밖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간극과 그로 인한 묘한 긴장감을 좁고 긴 수직 구조의 포맷으로 담아 내고 있다.
정희승, 〈기억은 뒷면과 앞면을 가지고 있다〉, 2018 ©정희승
그리고 그 안에는 내부와 외부의 묘한 충돌과 조화가 공존하는 지점, 이질적인 흔적의 교합이 만들어낸 긴장, 버려진 공간의 서늘함 가운데 온기가 느껴지는 장면 등 언어로 서술하기 힘든 현장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렇듯 정희승은 비극의 기억이 층층이 쌓여 있는 옛 국군광주병원을 역사로 규정된 공간으로서가 아닌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현재의 공기와 풍경을 담아내고자 했다.
정희승은 2020년 “올해의
작가상” 후원 작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며 예술가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고민을 주제로 전시에 참여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동료 예술가 24인과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사진 이미지와 텍스트를 각각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 〈알콜중독자와 천사들을 위한
시〉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사진과 텍스트라는 매체 형식에 따라 두 개의 파트로 나뉘지만 내용상으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하나의 설치
작업이다. 작가가 동료 예술가 24인과 나눈 이야기들은 그들의
얼굴을 담은 초상 사진, 그들의 일상에서 추출한 사물이나 대상의 이미지, 그리고 이 작업을 하면서 나눈 대화의 파편들로 만들어진 짧은 문구들의 형태로 전환된다.
구체적이면서도 모호한 이미지와 언어의 조합에 음악이 더해진 공간 속에서 관객들은 예술가의 삶을 선택한 이들의
헌신과 두려움, 그리고 삶만큼이나 부조리하고 무상한 예술이라는 세계를 향한 발언들을 마주하게 된다.
정희승은 전시 공간에 따라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시퀸스를 만들며 공감각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도 작가는 정해진 동선 없이 조합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서 자유로운 시각적 경험과 더불어 음악을 통한 청각적 개입을 유도했다.
정희승, 〈Untitled〉, 2023 ©갤러리 바톤
이처럼 정희승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한계와 가능성을 실험해 오며 ‘바라본다’는 시각적 행위를 소통의 경험으로 확장시켜 왔다. 작가는 사진 이미지를 제작하는 데에서 나아가 이미지들을 전시에 따라 새롭게 배열하고 텍스트 또는 음악과 조합하는 등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이미지 속 대상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상태로 만든다.
“사진은 정의하기 어렵다. 고정된 아이덴티티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희승, “Unphotographable”(두산아트센터, 2010) 인터뷰)
정희승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후, 런던 컬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 대학교(London College of
Communication)에서 사진학과 학사와 석사를 전공했다. 제11회 다음작가상(2012), 송은미술대상 우수상(2011) 등을 수상하며 한국 현대사진계를 이끄는 주요 작가로서 입지를 굳혀왔고,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최종후보로 선정되었다.
일민미술관(2021), 벨파스트 포토 페스티벌(Belfast Photo Festival,
2019), 제12회 광주 비엔날레(2018), 국립현대미술관(2017), 리움미술관(2014), 서울시립미술관(2014), 아트선재센터(2013) 등 여러 미술기관의 전시에 참여해왔다. 작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 미술관, 대구미술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런던 예술대학교(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