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진(b. 1977)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풍경을 세심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화폭에 담아 왔다. 그의 풍경화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물리적 표면 그 너머를 담고 있다. 작가는 지나온 과거와 기억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데에서 출발하여, 쉽게 지나치던 것들 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다양한 풍경의 이면을 표현해 왔다.


박세진, 〈풍경 1993-2002〉, 2002 ©두산아트센터

이와 같은 박세진의 풍경화는 2000년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첫 작품은 판문점에 대한 작가의 오래된 기억에서 출발한다.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선보인 〈풍경 1993-2002〉(2002)은 1993년 견학차 다녀온 판문점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공동경비구역 남쪽 초소에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바라보며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존재할 보이지 않는 풍경들을 상상했던 당시의 기억과 조우하며 이 작품을 그려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응시하는 희미한 실루엣의 인물 형상들은 북한 병사, 남한 헌병, 혹은 작가 자신 모습의 투영이기도 하다.


박세진, 〈Crying Solider〉, 2007 ©아라리오갤러리

이처럼 박세진이 보여주는 풍경은 나를 포함한 주변에서 시작해 저 멀리 어렴풋한 곳까지 이어진다. 그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풍경 속 요소들 간의 경계는 우리의 눈으로는 지각하기 어려운 엷은 층과 흐릿한 빛으로만 감지되는 ‘풍경’인 동시에, 사물들이 서로 부딪히며 섞여 드는 ‘원경’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이 ‘경계로서의 풍경’을 섬세한 붓터치와 마티에르 기법을 통하여 존재와 공간의 유기적인 움직임과 만남을 보여주는 ‘원경’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망토”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06)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예를 들어, 작가의 2005년 작품 〈밤〉은 형태의 외곽선을 찾기 어려운 대신 붓질의 질감이 도드라져 나타난다. 이 작품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제작된 〈망토〉시리즈의 일부로, 시리즈 후반으로 갈수록 화면 속 망토를 제외한 모든 형상들의 경계는 점차 배경색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투명해지거나 흐릿해진다.

한편 화면 속의 형상들 중에서 망토는 점점 문양이 화려해지고 그림자는 길어진다. 여기서 망토는 공간의 이편과 저편을 가르고 감추는 기능과 각 공간을 이어주고 열어주는 매개로써 이중 기능을 수행한다.


박세진, 〈밤〉, 2005 ©두산아트센터

시리즈 후반에 해당되는 〈밤〉은 밤이라는 어둠 속에서의 우리의 감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작가에 따르면, 밤은 고유한 색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보려고 하는 사람이 선택한 경계의 해석이다.

어둠 안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각, 그리고 경계가 모호한 밤의 색감은 캔버스 위 여러 겹의 붓질과 켜켜이 쌓인 물감을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표면의 질감으로 인해 〈밤〉은 빛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밤의 모습을 드러낸다.


박세진, 〈오래된 아침〉, 2007 ©두산아트센터

근경과 원경이 겹쳐지고 이어지는 풍경과 그 안의 어렴풋한 형상들이 이루는 몽환적인 분위기는 마치 실경산수를 그리듯 살아 숨쉬는 실제 풍경 안에서의 집요한 관찰을 통해 이루어진다.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오래된 아침〉(2007)의 경우에도 작가가 직접 눈으로 오랜 시간 동안 바라봤던 한국의 가을 아침 풍경을 담고 있다.

작가는 실경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눈 앞의 사물과 자연을 끈질기게 관찰한다. 그리고 이때 작가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풍경 속 모든 개체들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친다.


“Golden Age” 전시 전경(아라리오 갤러리, 2007-2008) ©아라리오 갤러리

2007년 아라리오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Golden Age”는 이러한 박세진의 작품 세계를 집약해서 보여주었다. 전시 제목인 ‘Golden Age’라는 단어는 작가의 작품 세계 안에서 모든 개체의 존재가 안정되고 캔버스 속에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없으며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뜻한다.

당시 작가는 전시를 준비하는 1년 6개월 동안 매일 10시간 이상 그림을 그리며, 물리적인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모든 개체가 연결되고 삶의 연속성을 내재한 새로운 세계를 화폭 위에 표현했다.


박세진, 〈달려라, 달려!〉, 2012 ©두산아트센터

또한 박세진은 이러한 자신만의 세계를 화면 위에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 방식을 연구해 왔다. 이를 테면, 작가는 어렴풋한 기억 또는 보이지 않는 것과 함께 연결되는 원경을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해 물감이 쌓이는 캔버스보다 물감이 스며드는 종이를 택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체리나 장미와 같은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을 재료로 삼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달려라, 달려!〉(2012)는 체리의 즙을 낸 다음 접착액과 섞어 종이 위에 그린 풍경화다.


박세진, 〈벽〉, 2018 ©누크 갤러리

2018년, 작가는 언덕 위 담벼락을 지나 산을 만나는 곳에 살며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마주하는 낡은 콘크리트 옹벽부터 언덕 위의 평범한 풍경들을 한 점씩 그려 나갔다. 작가는 좁은 길을 지나며 뻔한 풍경들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고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의 흔적들을 찾았다.


박세진, 〈나의 네 그루〉, 2018 ©누크 갤러리

박세진은 모든 시멘트 벽은 마주 보고 지탱하는 맞은편 삶이 현상되어 있다고 말한다. 맞은편 삶의 형태에 따라 빛과 바람이 남긴 빗물, 곰팡이, 흙이 섞여 새겨진 얼룩은 또 다른 풍경을 만든다. 그 길을 지나온 작가를 포함한 수많은 존재들의 흔적은 그의 작품 속에서 얼룩과 그림자, 빛이 연결되어 있는 원경으로 나타난다.


박세진, 〈서리〉, 2012 ©두산아트센터

즉 박세진의 풍경화는 그 안에 살고 존재하는 것들의 이야기이며, 박세진이 세상을 대하고 스스로 인식하는 방법이다. 박세진은 보이는 세상 이면에 그 안의 이름 모를 존재들이 놓고 간 삶의 흔적들을 그의 풍경 속에서 드러내 왔다. 이러한 흔적들을 직접적으로, 혹은 아주 은밀하게 작은 단서만을 남겨 놓으며 우리의 삶이 그림 밖 누군가와 끊임없이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삶이란 살아가다의 연속성, 그래서 확인하게 되는 시간, 시간이 멈춰진 듯 보이는 장소에서도 시간의 부재는 흔적을 남기고 저는 그것을 뒤늦게 찾아 내었습니다.” (박세진, 작가 노트)


박세진 작가 ©매거진한경

박세진은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마쳤다. 누크갤러리(2018, 서울), 두산갤러리 뉴욕(2012, 뉴욕, 미국), 아라리오 갤러리(2007, 천안, 한국),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2006,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작가는 카스텔로 디 리볼리 현대미술관(2005, 토리노,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2005, 베니스, 이탈리아), 삼성미술관(2003, 서울, 한국), 이스트링크 갤러리(2003, 상하이, 중국), 네덜란드 미디어아트 인스티튜트(2003, 암스텔담, 네덜란드), 대안공간 풀(2000, 서울, 한국), 예술의전당(1999, 서울, 한국)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