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진(b. 1971)은 다양하고 복잡한 현대사회의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구조 안에 드러나는 개인들의 삶을 영화와 다큐멘터리 필름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상기법과 사운드, 그리고 영상설치를 통해 공감각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해왔다.

작가는 시스템 속 ‘익명으로서의 개인’들이 사회적 규율에 대해 저항하거나 또는 적응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소외와 고립, 불안과 고독에 주목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디지털 환경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관계망에 대해 다루며, 오늘날 불확정적이고 유동적인 세상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을 이어 오고 있다.

김세진, 〈기념 사진〉, 2002 ©경기도미술관

김세진은 광주비엔날레의 프로젝트 3에 출품했던 〈기념 사진〉(2002)에서 광주라는 장소의 역사적특수성에 주목해 영상 매체의 속성을 바탕으로 개인과 집단의 역사에 대해 성찰했다. 그는 “역사는 과연 절대적인가?”라는 물음과 이에 대한 반응으로 기념 사진을 찍는 학생들의 모습을 3분 분량의 영상으로 담아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서 있는 학생들은 정지되어 있어 보이지만 어느 순간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이내 사진이 아닌 영상임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역사는 사진처럼 하나의 프레임 안에 영원히 가둬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시 읽히고 쓰여질 수 있는 가변적인 개념임을 영상의 속성을 빌어 이야기한다.


김세진, 〈나잇 와치〉, 200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편 2006년 작가가 타이베이 체류 시절 제작한 3채널 비디오 작업 〈나잇 와치〉는 아시아 국가권에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담고 있다. 밤이 되어서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안에서 작가는 대만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공유된 삶의 양상과 이로 인한 여러 증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서구의 도시들과 달리 네온사인과 함께 24시간 돌아가는 아시아 국가의 도시는 화려하지만 그 이면에 고독과 소외의 풍경 또한 공존한다. 작가는 이러한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고독과 소외의 현상을 영상으로 담아냈다.
 
〈나잇 와치〉의 3개의 채널은 각각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모습, 거리의 맹인이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모습, 그리고 도시의 화려하지만 서글픈 네온의 밤 풍경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변화와 변형을 끈임없이 거듭하는 도시 공간과 그 안에 머물고 있는 현대적 삶의 정체성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간극을 보여준다.

김세진, 〈잠자는 태양〉, 2012 ©김세진

김세진의 2010년대 이후 작업들은 해외 레지던시와 영국 유학 생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방인으로서의 삶과 노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국에서 생활하던 경험을 토대로 한 〈잠자는 태양〉(2012)은 당시 작가가 이방인으로서 겪었던 불합리한 경험들에 대한 기억을 가상의 시공간과 픽션의 요소를 이용해 풀어낸다.
 〈잠자는 태양〉에서는 이전 작품들과 달리 서사적인 양식이 작품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이 작품에서 실재하는 시공간인 2012년의 영국은 이름 모를 행성으로 변환되고 작가 자신은 금발과 흑발을 반 씩 가지고 있는 동양인 여성의 모습을 한 외계인으로 치환된다. 


김세진, 〈잠자는 태양〉, 2012 ©김세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름 모를 행성에 도착한 외계인은 주변을 둘러보다 정면을 응시하고, 그녀의 눈동자에 도시의 풍경이 비추어진다. 이후 작은 집들 사이에 거인처럼 서있는 모습이 나타나며 도시의 한 관제탑에서는 그녀에게 지시하는 듯 끊임없이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작업 속에서 영국이라는 도시는 왜곡되어 그려지지만, 작가의 타자화된 경험은 주인공인 외계인을 통해 주체화된 이미지로 전환된다.  

김세진, 〈열망으로의 접근〉, 2016 ©김세진

이러한 서사의 개입은 이후 2016년 송은미술대상 전시에서 선보였던 영상 작업 〈열망으로의 접근〉에서 ‘시각적 서사’라는 형식으로 발전되어 나타났다. 작가에 의하면, 시각적 서사란 문학이나 영화처럼 스토리텔링과 같은 요소를 바탕으로 구조를 만드는 방식이 아닌 영상, 사운드, 프레임과 같은 요소를 통해 공감각적인 서사구조를 만드는 방식이다.
 
〈열망으로의 접근〉에는 파운드 푸티지, 촬영, 애니메이션과 같은 무빙 이미지의 다양한 방법들과보이스-오버와 자막의 삽입 등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다큐멘터리 문법과 기법이 시도되었다.

김세진, 〈열망으로의 접근〉, 2016, “제16회 송은미술대상” 전시 전경(송은, 2016-2017) ©송은

이러한 새로운 공감각적인 시각적 서사 구조를 바탕으로 한 〈열망으로의 접근〉은 ‘열두 개의 의자’, ‘엔젤섬’, ‘또르틸라 치난틸라’ 총 세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되며,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주와 이민 현상,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개인사와 역사적 토대, 집단적 유토피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열두 개의 의자’는 과거 유럽이민자들이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 체류했던 미국 동부의 엘리스 섬에서 발견한 버려진 의자를 소재로 강대국들이 과거부터 자행해온 권력이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다룬다.
 
이어서 ‘엔젤섬’에서는 미국 내 아시아 이민자들이 소수자로서 겪어 온 부당함의 역사를 실제로 그들이 남긴 시와 병치시킨다. 마지막 ‘또르틸라 치난틸라’는 미국에서 제일 인기 많은 음식 중 하나인 또르티아를 소재로 미국 내 멕시코 이민의 역사와 함께 집단적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과 현실에서의 간극을 그려낸다.

김세진, 〈전령(들)〉, 2019 ©송은

제16회 송은미술대상의 대상을 수상하며 2019년 송은에서 개최한 그의 개인전 “Walk in the Sun”에서는 남극부터 북극권 라플란드에 이르는 작가의 여정을 바탕으로 한 신작들을 선보였다. 신작들은 실제 이야기를 허상의 이미지로 보여주거나 실제 이야기나 이미지를 허구적인 서사 구조에 맞추는 등의 방식을 통해 실제와 허상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그 중, 〈전령(들)〉(2019)은 유인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최초로 궤도 진입에 성공한 ‘우주개’ 라이카(Laika)를 하이퍼리얼 이미지로 제작한 영상 작업이다. 작가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전령을 3D 모션 그래픽 기술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동과 확장에 대한 인류의 욕망과 역사 안에서 희생된 수많은 존재들을 추모한다.

김세진, 〈2048〉, 2019 ©김세진

작가가 2주간 남극에서 레지던시 생활을 하며 직접 촬영한 영상을 바탕으로 한 〈2048〉(2019)는 “G”라는 이름의 가상의 대륙을 설정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이다. 작품 제목 ‘2048’은 남극의 대륙과 바다를 오직 과학 연구 목적으로만 평화롭게 이용하자는 뜻에서 체결한 남극조약이 종료되는 해이다.
 
김세진은 실제 촬영한 영상과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제작된 가상의 랜드스케이프들이 혼재된 이 작품을 통해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오가는 서사구조로써 남극조약이 만료되는 2048년 남극의 모습을 상상한다.

김세진, 〈모자이크 트렌지션〉, 2019 ©송은

이와 함께 김세진은 오늘날 기술의 진보와 함께 만들어진 디지털 이미지와 데이터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하는 작업 〈모자이크 트렌지션〉(2019)을 선보였다. 〈모자이크 트렌지션〉은 두 개의 분열된 스크린을 통해 이미지가 파편화되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영상 사운드 작업으로, 무수한 정보가 떠다니는 디지털 영역에서의 오작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를 위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기후와 같은 기상정보를 데이터로 시각화하는 디지털 이미지를 활용한다. 〈모자이크 트렌지션〉는 이러한 디지털 무빙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인터넷 환경 속 디지털 이미지나 데이터와 같은 가상의 정보들이 현실의 영역에서 정형화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동시에, 불분명한 정확성에도 불구하고 맹신되는 오작동의 풍경을 자아낸다.


김세진, 〈모자이크 트렌지션〉, 2019, “Walk in the Sun” 전시 전경(송은, 2019) ©송은

이처럼 김세진은 이주민, 난민, 야간 근무자 등 익명의 개인들을 규정짓고 그들의 삶의 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세상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이와 동시에 그는 다양한 시청각적 구조를 통한 허구와 실제 이미지의 간극에의 다양한 실험을 해오며 작가가 바라보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세상의 이면에 대해 공감각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다양하고 복잡한 시스템이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는 현대사회에서 그 시스템들을 유지하기 위한 통제 아래 존재하는 익명으로서의 개인이 그것에 저항하거나 혹은 적응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소외와 고립, 불안과 고독과 같은 결과로서의 화학적 반응에 주목한다.

그럼으로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을, 초월적 가치보다는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실존방식의 현대적 가능성에 관하여 디지털 무빙이미지, 사운드, 무빙이미지의 기초적 원리를 이용한 키네틱 조각, 영화의 서사적 구조와 다큐멘터리의 사실적 기록방식을 차용한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한 영상 등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통해 표현해오고 있다.” 
(김세진, 작가 노트)


김세진 작가 ©송은문화재단

김세진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한 후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영상미디어과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영국의 슬레이드 미술대학(UCL)에서 미디어아트를 전공했다. 2005년 인사미술공간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2017년 제16회 송은미술대상의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Henry Tonks Prize’(2011) ‘블룸버그 뉴 컨템포러리즈’(2011), 박건희 문화재단의 제4회 다음작가상(2005) 등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타이베이 아티스트 빌리지에서, 2007-08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창작스튜디오, 2014-15년 금천예술공장, 2015년 뉴욕 ISCP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