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민 (b. 1970)은 도시라는 공간이 가진 구조와 그 안에 살아가는
현대인 사이의 관계를 사진을 통해 탐구해 왔다. 작가는 도심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빌딩들이 자세히 보면
각기 다른 것 같지만 결국 비슷한 모습으로 콘크리트 숲을 이룬다는 점과 도시인들 또한 자신의 개성대로 살고 있지만 그러한 모습들의 전체는 다수
속에 감추어져 정체성이 흐려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박찬민은 환경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영향을 끼치고 그 안의 사람들 역시 환경에 변화를
가하고 살아간다는 관계성에 주목하며 우리를 둘러싼 도시 환경을 관조적인 태도로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박찬민, 〈Intimate City 01〉, 2008 ©박찬민
박찬민의 도시 공간에 대한 첫 연작 〈Intimate City〉(2007-2009)는 먼 거리에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흑백으로 담아낸 사진이다. 그의 사진 속 빼곡하게 솟아 있는 빌딩들은 희뿌연 연무 속에서 각자의 확실한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그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존재할 뿐이다.
또한 작가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아파트들의 상호를 지움으로써, 그들의
유일한 개성을 삭제하여 더욱 단조롭고 익명화된 도시 환경을 강조했다. 더불어 사진의 흑백 처리는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도시의 모습을 더욱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박찬민, 〈Untitled; The Level of Deception 01〉, 2012 ©박찬민
이후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진행했던 〈Untitled; The Level of Deception〉 시리즈에서는 한국의 도시 환경에서
나아가 영국과 네덜란드를 포함한 유럽의 건축물을 담았다. 이때 작가는 건물을 촬영한 다음 후작업으로
배경을 지움으로써 그 건물의 용도와 맥락을 모호하게 만들어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가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사진 매체의 사실적 기록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박찬민, 〈BL212372259126385023〉, 2012 ©박찬민
그리고 2010년부터 박찬민은 한국의 아파트와 스코틀랜드의 공동주거
형태의 건물을 소재로 한 〈Blocks〉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건물의 디테일을 삭제하는 후작업을 통해 건물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거대한
블록으로 보이게 만든다.
〈Blocks〉 시리즈에서는 건물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며
건물의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작가는 건축물의 창과 문, 발코니, 그 위에 널린 생활의 흔적들, 그리고 간판, 광고, 명패 등을 지워 균일한 콘크리트 단면만을 남겼다.
박찬민, 〈BL105565103104512〉, 2010 ©박찬민
박찬민은 아파트의 상표명을 통해 주거 공간의 값어치가 결정지어지고 각각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콘크리트를 쌓아 올린 거대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이 시리즈를 작업했다. 그리고 내부와 외부 사이의 통로가 사라지고 균일화된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건물들을 통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획일화되고 소통이 부재한 삶을 빗대어 바라보게 한다.
박찬민, 〈Urbanscape_042〉, 2012 ©박찬민
이후 작가의 관심은 서울, 부산, 대구, 홍콩, 마카오를 비롯한 여러 도시권으로 확장하여 다양한 도시 환경을 담아낸 작업 〈Urbanscape; Surrounded by Space〉(2012-)를 선보였다. 여기에는 빼곡한 빌딩숲의 건물들이 서로의 입면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들이 포착된다. 다양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지만, 각자만의 지역성이나 개성이 드러나기보다는 도시 공간 속 선과 면이 강조되면서 마치 기하학적인 패턴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박찬민, 〈Urbanscape_002〉, 2014 ©박찬민
박찬민은 오늘날 주거공간, 상업공간, 그리고 때로는 산업시설까지 함께 공존해 있는 도시 공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가 만들어낸 이 공간이 우리를 어떻게 둘러싸고 포위해 가는지를 생각하며 이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치 사례 연구를 하듯이 그러한 도시들의 이미지들을 카메라에 담고 나열해 가며 다양한 지역에서 공유되는 도시 공간의 공통적인 구조들을 보여준다.
박찬민, 〈CTS 04_HKG〉, 2016 ©박찬민
박찬민의 최근작 〈Cities〉 시리즈는 이전 작업인 〈Blocks〉와 마찬가지로 건물의
디테일이 말끔히 제거된 도시의 풍경을 담고 있다. 〈Blocks〉는
근거리에서 촬영되어 건축물 자체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Cities〉
시리즈는 마치 조감도를 그려낸 듯 대도시의 풍경을 원거리에서 조명한다.
작가는 홍콩, 오사카
등 서로 다른 도시들의 차이와 색깔을 드러내기보다는 도시 공간이 갖는 구조적인 유사성에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세부적인 요소들이 단순하게 표현되어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디오라마(diorama)나
조감도처럼 전체적으로 밀집된 형태가 부각되도록 했다.
박찬민, 〈CTS 09_Tokyo〉, 2016 ©박찬민
작가는 다양한 나라의 도시들을 바라보며 많은 도시들이
서로 다른 이름과 역사를 가지지만 결국에는 비슷한 형태로 향해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인간들의 욕망이 문화와 지역을 넘어서 점점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거나 원래부터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도시에 대한 박찬민의 시각은 어떠한 비판이나
비관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대신 박찬민의 작업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현대 도시의 진정한 모습과
도시 구조를 탐구하고, 도시 공간과 도시인의 삶의 본질을 포착해 나가는 여정이다.
박찬민, 〈CTS 06_Osaka〉, 2015 ©박찬민
“모든 도시에서 개인은 도시 안에 어떤 공간이 구축됐는지 알아야 비로소 자신의 삶의 색깔을 알 수 있다.”
박찬민 작가 ©박찬민
박찬민은 고려대학교 독문과를 졸업(1997)하고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2008)했다. 이후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사진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2011)했다. 2008년
갤러리 룩스(서울, 한국)
신진작가 지원 공모에 선정되며 첫 개인전을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2022년까지 아홉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제1회 KT&G
SKOPF 올해의 작가(KT&G 상상마당, 한국)로 선정되었으며 제6회 일우사진상
‘올해의 주목할 작가’ 전시 부문에 선정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천, 한국), 일우재단(서울), 대구미술관(대구, 한국), 고은사진미술관(부산, 한국),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한국), 소버린예술재단(홍콩, 중국)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