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진(b. 1969)은 회화에서만 가능한 특유의 논리와 구조를 철저하게 탐구해온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회화 작가 중 한명이다. 작가는 회화를 구성하는 순수 조형 요소인 색채와 형상이 가진 자체적인 논리를 ‘시각적 언어’로 보고, 이를 통한 다층적인 추상회화 작업을 이어오며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왔다.

정수진, 〈무제〉, 2001 ©갤러리 스케이프

정수진의 작품은 언뜻 구상회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수많은 이미지들 사이에는 어떤 내러티브도, 현실성도 없다.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물건들과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배경들로 구성된 듯 하지만 해체되어 나타나거나 이질적인 모티프들이 결합되는 등 초현실적인 표현이 다채롭게 뒤섞여 있다.
 
이러한 정수진의 회화를 보며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씩 풀이하다 보면 빈번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작가는 작품에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시각적인 대상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정수진의 회화는 순수 조형 요소인 색채와 형태의 조합으로써 회화의 자체적인 논리를 탐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정수진, 〈무제〉, 2003 ©정수진

또한 형식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그의 회화에는 원근법이 없다. 마치 중력이 사라진 듯 부유하는 여러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정수진은 “2차원이라 여겨지는 평면을 사실상 3차원으로 본다”고 말한다.
 
보통 평면을 2차원이라 생각하지만 인간의 눈은 3차원만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작가는 평면 안에 하나의 시점에 의한 원근감이 아닌 다양한 시점에 따른 다차원을 형상화한다. 언뜻 무질서해 보이고 원근법에 벗어난 화면은 실상 치밀하게 짜인 입체 좌표와 그리드가 무수히 중첩된 것이다.


정수진, 〈저녁〉, 2006 ©아라리오갤러리

한편, 2006년 아라리오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서 작가가 선보인 회화들에는 캔버스 전반에 걸쳐 가득 채우던 세세한 묘사 대신 여유롭고 거침없는 붓놀림이 엿보인다. 기존 작업에 나타나는 다중적인 공간구성과 세밀한 묘사보다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2006년 작업들은 당시 작가의 시각 언어에 대한 탐구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정수진, 〈뇌해 5〉, 2000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이처럼 작가는 구상회화의 요소들을 비틀면서 회화 자체의 시각적 속성을 바탕으로 한 회화의 추상성을 탐구해 왔다. 정수진은 이러한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구축해 나감과 동시에 이를 통한 인간에 대한 탐구, 특히 인간의 의식을 함께 담아내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작가에게 캔버스는 단순한 2차원의 평면이 아니라 다차원의 시공간이 담길 수 있으며 의식의 가시화가 일어나는 장소가 된다.

정수진, 〈뇌해 6〉, 2000 ©이유진갤러리

예를 들어, 〈뇌해〉(2000) 시리즈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한계와 존재의 완전함과 불완전함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다. 정수진은 의식의 주체로서 인간이 지닌 끊임없는 상념의 과정과 공간을 ‘뇌해’라는 바다로 은유한다. 파도, 양파, 인간과 같은 이질적인 모티프들을 한 화면 안에 부유하듯 자유로이 존재하거나 반복되는 형태로 병존시킴으로써, 생각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중첩되며 상실되는 비선형적인 인간 의식의 차원을 회화적 상상력으로 함축시킨 것이다.


정수진, 〈입체·나선형 변증법〉, 2011 ©두산아트센터

〈뇌해〉(2000) 시리즈에서 엿볼 수 있었던 인간의 의식세계를 평면에 가시화하는 방법론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다. 2011년 그의 개인전 “입체·나선형 변증법”에서는 작가가 스스로 고민하고 정리해온 ‘시각 논리’를 일련의 작품들로 선보였다.
 
정수진은 이 ‘입체·나선형 변증법’을 ‘무에서 유가 되는 과정’을 거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이 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논리라고 정의한다. 작가는 눈 앞에 보이는 세상이 인간의 의식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듯이 회화 또한 인간의 의식을 투영한다고 보며, 이러한 사고에서 그의 시각 논리가 전개된다고 말한다. 즉, 비가시적인 인간의 의식은 색채와 형태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가시화되고, 그렇게 완성된 평면은 의식이 내재된 다차원적 세계로 변모된다.


정수진, 〈증식하는 다차원 생물〉, 2014 ©K-ARTIST.COM

그리고 2014년 개인전에서 정수진은 ‘의식세계를 가시화하는 시각이론’을 글로 정리한 단행본 ‘부도이론’을 발표했다.
 
정수진은 2006년 개인전을 진행하며 등장했던 ‘괴물들’이 지속적으로 화면에 증식하던 것을 보고 이들을 규정하고 질서를 부여하고 싶은 욕구로부터 ‘부도이론’을 정립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괴물들’이란 규정할 수 없는, 무질서하고 이름 붙일 수 없는 형상들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다.


정수진, 〈다차원 세계를 들여다보는 상상, 최초의 다차원 생물〉, 2012-2014 ©이유진갤러리

‘부도이론’을 통해 작가는 보이지 않는 의식세계를 가시화하는 다차원 세계로서의 평면에 나타나는 ‘괴물들’을 ‘다차원 생물’로 규정지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작가는 부도이론을 이용해서 미지와 혼돈의 존재인 괴물을 인식 가능한 영역으로 불러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작가는 ‘다차원 생물의 세계’라는 이름을 붙여 상징과 표상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지닌 의미의 구조를 작품으로 설명해냈다.

정수진, 〈Ice breaking〉, 2022 ©이유진갤러리

지난해 이유진갤러리에서의 개인전 “The Last Scenery of Mind”에서 다차원적 의식 세계를 회화로 풀어나간 정수진의 20여 년간의 작업을 선보이며 ‘부도이론’이 더욱 견고해지는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였던 그의 신작들에는 회화의 표면 질감이 강조된 표현들이 두드러졌다. 가령〈Ice breaking〉(2022)에는 표면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대하고 두툼한 붉은 색의 물감 자국이 눈길을 끈다.
 
작가는 다차원적 존재가 가진 본질적 정보는 회화 표면의 질감에 나타나 있다고 설명한다. 두툼한 질감 뿐만 아니라 사소한 붓질 하나에도 결국 표면 질감은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특정 의식 상태를 보여주고, 이것을 바탕으로 관객이 의식의 움직임을 추론할 수 있도록 한다.

정수진, 〈The Last Scenery of Mind〉, 2023 ©이유진갤러리

“그림을 구성하는 색채와 형태, 형상이 전달하는 정보는 특정 의미 자체가 아니라 의미의 구조이다. 이 의미의 구조는 각자의 해석이 담기는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해석의 자유는 그릇의 구조가 규정하는 한계 내에 있다.
 
즉 각자 특정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자유는 의미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한계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림이 제시하는 것은 의미의 구조다. 의미의 구조에 어떤 내용을 담는가는 보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 이것이 하나의 그림에 다수의 해석이 가능한 이유다.”

정수진 작가 ©노블레스

현재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정수진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회화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 대구 시공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그 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아라리오갤러리, 두산갤러리, 몽인아트센터, 갤러리스케이프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티라나 비엔날레, 상하이 비즈 아트센터, 부산시립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천), 문예진흥원(서울), 연강재단 두산아트센터(서울), 선화예술문화재단(서울), 롱 뮤지엄(상하이, 중국)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