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욱 (b.1968)은
다양한 매체의 경계를 뛰어넘는 작업을 통해, 빠르게 재편된 근대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 사회의
격동적인 문화, 경제, 정치적 역학을 예리하게 관찰해 오며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려 왔다.
유동적이고 연약한 물질, 흘러가다가
사라지는 사운드, 사실과 허구를 오가는 영상, 신체와 목소리의
집합으로 완성되는 퍼포먼스, 그리고 전혀 다른 매체가 서로를 번역하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는 작업을
통해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를 시도하면서 잊혀지고 감추어진 목소리와 형상들을 다채롭게 드러낸다.
임민욱, 〈Rolling Stock〉, 2000 ©임민욱
임민욱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프레데릭 미숑과
함께 ‘피진기록(Pidgin Girok’이라는 콜렉티브를
결성해 〈Rolling
Stock〉(2000)을 제작했다. 그동안 작업했던
수많은 스냅사진들을 “계속 굴려 살아나게 하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Rolling Stock〉은 소책자와 싱글 채널 비디오 두 가지 버전으로 구성된다.
처음에는 광주비엔날레를 방문한 외국인들을 위한 일종의 문화 가이드북으로서 소책자의 형태로 제작되었다가, 3년 뒤 네덜란드와 수교기념 전시에 초대되어 책에서 비디오로 매체를 바꾸며 이미지를 다시 ‘굴렸다.’ 〈Rolling
Stock〉은 빠른 도시의 속도 안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 스쳐 지나간 것들을 추적하고
시각적으로 재구성하여 다시 붙잡아 축적시킴으로써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임민욱, 〈New Town Ghost〉, 2005 ©임민욱
〈Rolling Stock〉에서 엿볼 수 있었듯, 임민욱의 초기 작업은 ‘도시’라는
환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임민욱은 자신의 일터이자 거주지,
작업장이기도 한 영등포라는 지역이 구도심 개발을 위한 ‘뉴타운’ 지역으로 지정된 후, 이 곳을 배경으로 한 퍼포먼스 영상 작업 〈New Town Ghost〉(2005)를 제작했다.
이 영상은 짧은 머리의 진한 화장을 한 젊은 여성이 영등포 도로 위를 달리는 트럭 위에서 작가가 직접 만든
‘뉴 타운 고스트 송’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드럼 소리에 맞춰 확성기에 대고 분노하듯 열성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여성의 모습과 이를 당혹스럽게 바라보는 길
위의 시민들의 모습이 교차된다. 작가는 이처럼 도시 개발에 대한 기억과 그로 인한 폐해에 대해 살피며
이를 발언하는 작업들을 선보여 왔다.
임민욱, 〈S.O.S. – 채택된 불일치〉, 2009 ©임민욱
이와 같이 초기 임민욱의 작업은 현장에서의 퍼포먼스
작업으로 그 공간에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반응까지 교차시키며 보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2009년 3채널 비디오 작업 〈S.O.S. – 채택된 불일치〉에서
더욱 심화되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퍼포먼스와 다큐멘터리가 교차된다.
〈S.O.S. – 채택된 불일치〉는 여의도 한강 유람선으로 관객들을
초대한 후 유람선 안과 밖에서 진행된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 작품으로, 개발과 보존, 인간과 도시에 대한 담론들이 연극적 연출로 구성된다. 유람선에 초대된
관객들은 선장의 스피치, 한강 둔치 중간중간의 특정 장소에 작가가 연출해둔 거울을 둔 시위대, 갈 곳 없는 연인들의 퍼포먼스, 비전향 장기수 출신 보안관찰 대상자의
목소리 등을 만나게 된다.
임민욱, 〈S.O.S. – 채택된 불일치〉, 2009 ©임민욱
이때 유람선에 설치된 조명은 강변의 아파트, 대형 빌딩, 공사 현장 등을 구석구석 비춘다. 여기서 관객은 퍼포먼스의 객체와 주체를 오가며 그들이 겪는 공감각적인 경험은 작품의 중요한 일부가 된다.
작가는 “이
퍼포먼스는 속도와 기억의 관계, 그것으로부터의 저항, 인간과
도시 속 자연의 관계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동하는
유람선 안에서 관객은 더 이상 구경꾼이 아닌 계속해서 교차되는 한강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 안에 개입되고
작가가 던지는 이러한 질문들을 공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2011년
임민욱은 다른 장르의 예술가,
일반 시민들과 협업하여 〈국제호출주파수〉를 제작했다. 이 작업은 당시 재개발 지역이었던
명동 중앙극장 일대의 지역 상점들이 철거 위기에 놓이며, 철거 반대를 위한 농성이 벌어지던 것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밴드 ‘무키무키만만수’의
이만휘와 협업하여 노래를 만들고, 이를 모집한 사람들에게 가르쳐 노래를 배운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이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가사가 없는 이 노래는 사라지는 장소와 터전에서 쫓겨난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종의
파장이며, 힘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 도심 사이를 공명했다.
임민욱, 〈허공에의 질주〉, 2015, “만일(萬一)의 약속” 설치 전경(삼성미술관 플라토, 2015-2016) ©임민욱
임민욱은 이처럼 한국 사회의 급격한 도시 근대화
안에서 소외되고 누락된 장소와 사람들, 잊힌 삶과 기억을 퍼포먼스와 다큐멘터리가 결합된 형태의 작업으로
다루어 왔다. 작가는 사라짐에 대한 애도와 기억의 복원을 영상 매체 뿐만 아니라 조형 작업을 통해서도
되살리는 작업을 이어 왔다.
2015년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개최된 그의 개인전 “만일(萬一)의 약속”에서 선보였던 〈허공에의 질주〉는 미술에서 주로 다루지 않는 재료들인 액체, 라텍스, 촛농, 깃털, 뼛조각, 잔여물 등을 사용하여 소멸되기 쉬운 유기체적 존재들을 형상화했다. 이와
함께 소리, 조명, 온도와 같은 공감각적 요소들을 더함으로써
재료의 물성적 차원을 넘어 슬픔과 애도와 같은 정서적 공감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임민욱, 〈내가 지은 이름이에요〉, 2018 ©임민욱
또한 임민욱은 플라토에서의 개인전에서 한국의 디아스포라 현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1983년 KBS에서 방영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을 참고하여 제작한 영상 작업을 선보였고, 이는
2018년 〈내가 지은 이름이에요〉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발전된다.
작가는 138일간 진행된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으로 찢어진 가족들을
이어주는 TV 프로그램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가족들이 재회하는 장면을 보고, 방송국이라는 공간이 우리가 잊고
있던 기억과 역사를 되살리는 대화의 장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 순간은 작가의 기억 속 미디어의 기능, 역할, 가능성, 피상성
등에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며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새겨져 있었다.
왼) 임민욱, 〈블랙홀〉, 2015, “체크포인트: 한국에서 바라본 국경” 전시 전경(볼프스부르크 미술관, 2022) ©리얼디엠지프로젝트. 사진: Marek Kruszewski.
오) 임민욱, 〈내가 지은 이름이에요〉, 2018, “체크포인트: 한국에서 바라본 국경” 전시 전경(볼프스부르크 미술관, 2022) ©리얼디엠지프로젝트. 사진: Marek Kruszewski.
임민욱은 이 사건을 국가적 프로파간다를 전파하는 공영 방송국이, 냉전의 칼날 아래 숨죽이며 살아오던 수많은 이산가족에 의해 오히려 ‘점령’ 당했던 상황으로 반전시킨다. 단채널 영상 작업 〈내가 지은 이름이에요〉는 자신의 이름도 기억을 못할 만큼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은 이산가족의 상봉 장면을 주로 담았다.
한편 올해 임민욱은 BB&M에서의 개인전 “Memento Moiré”에서 특정 장소와 시간의 경계를 넘어선 신화, 의례, 토템 등의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으로 확장된 작품 세계를 보여줬다. 특히, 그의 새로운 회화 연작은 기존에 작가가 주로 사용했던 재료들인 우레탄, 뼈조각 등을 활용해 우주론과 신비주의적 도상학, 자연과 문명의 잔해 등을 표현했다.
예를 들어, 〈Almost
Too Calm〉(2024) 시리즈는 오징어 뼈와 따개비,
마른 해초, 카메라 스트랩, 롤러 블라인드 손잡이
등 쓰임을 다한 일상적 사물을 마치 투명한 우레탄 층 아래에 박제한 듯한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러한
자연과 문명의 잔해들을 박제하는 형식은 멸종된 문명의 유산을 보존하는 미래의 박물관을 상상하도록 한다.
이처럼 임민욱의 작업은 비디오, 조각, 일상적 사물 등 다양한 매체와 재료를 통해 냉전 이념의 분열로 인한 상흔과 급격한 사회적 변화의 이면을 상기시키고, 가려지거나 누락된 유령과 같은 존재들을 계속 굴려 되살아나게 한다. 또한
그는 비인간 목격자의 존재를 상상하거나, 행위성을 지닌 사물들의 연결 속에서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망각된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작업은 속도에 의해 지워진 기억들과 그것에 대한 저항 그리고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와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문들을 던진다.
이 급속한 환경의 변화는 우리의 기억들을 지우고, 우리는 기억들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 없이 그것을 떠나 보낼 준비를 해야만 했다. ‘지구화’를 위한 이와 같은 어지러운 과정들은 쉴 새 없이 바빴던
시간들 속에서 마치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 그리고 ‘이미 사라져 버린 어떤 것’인 듯 보인다.”
임민욱 작가 ©BB&M
임민욱은 국립고등미술학교(에꼴 데 보자르 드 파리)를 졸업했으며, 파리 국립고등조형예술학교 DNSAP 펠리치타시옹 석사를 마쳤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서울, 2018), 퐁피두 센터(파리, 2017), 삼성미술관 플라토(2015), 포어티쿠스(프랑크푸르트, 2015), 워커아트센터(미니애폴리스, 2012), 스미소니언 아시아박물관(워싱턴 D.C., 2011) 등 국제적인 주요 미술기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쉬른 쿤스트할레(프랑크푸르트, 2022), 로마 국립21세기미술관(2019), 도쿄도 현대 미술관(2015), 쿤스트할레 비엔나(2015)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이 밖에도 작가는 광주(2021, 2014, 2008, 2006), 리옹(2019), 시드니(2016), 리버풀(2010), 이스탄불(2007) 등의 전세계 유수의 비엔날레 및 아시아 퍼시픽 트리엔날레(브리즈번, 2021), 파리 트리엔날레(2012)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2023년 오바야시 재단의 리서치 프로그램에 최종 선정되었으며, 2024년에는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 주관한 아시아 아트 게임 체인저 상을 수상했다.
References
- 임민욱, Minouk Lim (Artist Website)
- BB&M, 임민욱 (BB&N, Minouk Lim)
- 올해의 작가상, 임민욱 (Korea Artist Prize, Minouk Lim)
- 서울시립미술관, S.O.S. – 채택된 불일치, 2009, 임민욱 (Seoul Museum of Art, S.O.S. - Adoptive Dissensus, 2009, Minouk Lim)
- 국립현대미술관, 임민욱 | 국제호출주파수 | 2011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Minouk Lim | International Calling Frequency | 2011)
- 리얼디엠지프로젝트, [RDP 2022 / Artist] 임민욱 (REAL DMZ PROJECT, [RDP 2022 / Artist] Minouk Lim)
- BB&M, 임민욱: Memento Moiré (BB&M, Minouk Lim: Memento Moiré)